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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남의 나라에 떨어진 우리 세식구를 구원해주러 온 이들은 먼저 와서 터를 잡고 공부하고 있던 대학원 동생이랑 남편의 고등학교 후배였다. 넉넉한 밴까지 빌려 공항으로 마중을 와 주었다..고맙게도. 목적지로 향하는 차창으로 처음 보게 된 도시는 미국 중서부에 있는 세인트루이스라는 도시였다. 왕년엔 10대 도시로 꼽힐만큼 번창했다는 그 도시였다는. 허나 첫 느낌은 오래된 건물들탓일까 기울어져가는 듯한 회색이었다고 기억된다. 비행기에서 얌전하게 와주었던 두살배기 아들이 한번 터뜨린 울음은 그런 낯선 느낌 탓인지 오는 내내 쉽게 가라앉지 않아 우리의 진땀을 빼게 했었다. 대학원 동생이야 우리를 그곳 학교로 정하게 된 이유중에 하나였을 만큼 서로 다 아는 처지니 굳이 인사를 챙기는 건 새삼스러운 일이었지만 우리는 그곳에 도착해서야 남편 일년 고등학교 후배의 존재를 알았기에 고맙다고 했을 때 그 친구가 했던 말이 기억난다. 그렇게 고마워하지 않으셔도 되요...하던. 왜냐하면 그곳에 살다보면 처음에 이렇게 지게 된 신세들은 도움을 받은 이들한테 갚는 게 아니라 앞으로 새로 올 누군가를 마중하러 공항 나가거나 그네들한테 이런 저런 도움을 주면서 갚게 되더라는. 우리의 첫날밤은 대학원 동생집에서 묵었다. 너무 울어대서 피곤했을 아들은 곯아 떨어졌지만 시차가 적응이 덜 된 남편과 나는 새벽에 주변을 한 바퀴 둘러봤다. 우리가 맞이하는 첫날 아침을 기억하기 위해.  

다음날 우리는 동생이 미리 등록을 해놓았다는 가족 기숙사에서 짐을 풀었다. 결혼한 기혼 학생가족들만 살수 있다는 그 곳은 학교에서 십여분 떨어져 있었다. 스무 다섯평 남짓한 크기에 두개 혹은 세개짜리 방에다, 거실 그리고 냉장고랑 오븐이 갖춰져있는 부엌을 갖추고 있는 우리가 기대했던 그 이상의 넓은 공간이었다. 지은 지 아주 오래 되어 낡았다고는 하지만 관리를 잘 한 탓인지 비교적 깨끗했고, 무엇보다 우리 셋을 들뜨게 했던 베란다 문만 열면 볼 수 있는 넓은 초록색 잔디 공간이었다. 시멘트바닥에 익숙해 그런 녹지공간에 목말라 있던 서울토박이 우리가족은 도착한 며칠 동안 한껏 들떠 주변의 잔디를 밟고 다녔다. 아들과 남편은 해질 무렵 여기 저기 빛을 발하면서 풀밭을 뒤덮는 반딧불 꽁무니의 불빛을 따라 다녔고 사람이 가까이 가도 도망칠 생각을 안 하는 간 큰 다람쥐를 쫓아다니면서 우리는 그렇게 틈만나면 아들내미의 손을 잡고 기숙사 근처를 어슬렁 거리며 배회(!)하고 다녔다. 제일 맘에 들었던 건 기숙사 오분거리에 서울 같았으면 적어도 한두시간은 꼬박 차로 밟아야 볼 수 있음직한 제법 큰 호수를 끼고 있는 공원이었다. 거기에 가면 광릉수목원에서나 볼 수 있음직한 쭉쭉 뻣은 나무들로 눈이 시원했고 아이들 놀이터도 있어 처음 한동안은 저녁만 먹으면 아들내미의 손을 잡고 그 공원을 몇바퀴 돌면서 만나게 되는 다람쥐나 오리, 운좋은 날 만나게 되는 사슴등을 구경하면서 신선한 공기를 맘껏 들이켜댔었다. 허나 그렇게 여유부리며 산책을 하는 횟수는 바쁘게 돌아가는 학교 생활로 인해 점점 줄어들었고 요즘 같아선 마지막으로 거길 걸었던게 언제였나 싶을 만큼 발길이 뜸해졌다.  

예상은 했지만 여기도 사람살이라...아무리 대충산다고 해도 필요한 살림들을 마련해야 했다. 그런 비용을 최소화하겠다고 한국에서 부터 압력밥솥이랑 밥그릇 두개, 수저두쌍, 당분간 먹을 쌀, 거기다 친정엄마 가 챙겨주신 통마늘꾸러미까지...무게가 되는 한 꾸역 꾸역 담아 온 살림들은 초반에 살림장만하는데 드는 돈을 줄일 수 있어 아주 요긴했으며 결혼할 때 장만했던 압력밥솥은 이제 십년이 넘어 낡긴 했지만 여전히 유용하게 잘 쓰고 있다. 생각난다. 가족 기숙사 집을 지정받아 들어온 첫 날...아무것도 없는 텅빈 공간에서 우린 밥상 대신 라면 박스를 엎어 놓고 그 위에서 밥이랑 간단한 저녁을 먹었고 침대가 없어 맨바닥에 후배가 챙겨다 준 이불을 깔고 잤던게. 남편말대로 MT라도 온 그런 기분으로. 그랬던 텅빈 공간이 이제는 들고 나는 지인들이 주고 간 가구들로 꽉차있다. 언젠가 여기다 끄적거린 적이 있듯이 그런 가구들은 여기서 맺은 인연을 떠올리는 매개이기도 하다. 컴퓨터 책상을 보면 일본으로 돌아간 나나라는 친구를 떠올리게 하고 식탁테이블은 루지애나로 간 남편 선배 부부를 떠올리게 하고 책꽂이는 한국으로 돌아간 친하게 지낸 머슴아를, 티브이장식장은 대전으로 돌아가 자리를 잡은 한 커플을.....그렇게 가구를 한번 훑는 것만으로도 8년동안 맺은 인연들과 같이 했던 시간들을 추억할 수 있으니 새로 산 가구들보다 훨씬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우리집에서 여기 와서 처음으로 거금(!)을 주고 장만한 유일한 물건이 침대다.  여기서 만난 남편 고등학교 후배가 침대만은 허리건강을 위해 제대로 된 것을 써야 한다고 하기에 침대를 400불넘게 장만했고 그 나머지 살림들은 아주 다양한 경로로 구해져서 우리집 공간을 채우기 시작했다. 운 좋게도 때 마침 공부를 마치고 한국으로 들어가시는 한국분들한테 티브이랑 소파를 물려받거나, 가을에 자주 열린다는 야드세일(yard sale)을 쫓아다니면서 필요한 물건들을 하나 하나 장만했다. 허니 내 생각엔 유학자금이 빠듯하다면 굳이 처음부터 가구들을 다 들여놓을려고 무리를 할 필요가 없다 싶다. 살다보면 이렇게 저렇게 필요한 물건을 얻거나 싸게 장만할 수 있다는 점에서. 쓰던 거라고 하긴 하지만 아주 쓸만한 수준의 물건들을 얻을 수 있으니까 서두를 필요가 없다 이말이다.  우리가 살림을 장만한 방법중에 가장 재밌었던 것은 여기 가족 기숙사 쓰레기통옆에 나와있는 물건들을 주워 오는 거였다. 여기 학교 가족 기숙사에서 사는 대부분이 우리처럼 살림이 빠듯한 외국학생들이 많은지라 이사갈 때 혹은 살림을 업데이트할 때 그들은 자기네가 쓰던 가구나 물건들을 무빙세일(moving sale)을 통해 아주 헐값으로 처분하기도 하고 필요한 누군가를 위해 쓰레기통 옆에다 얌전히 내다 놓곤 해서 우린 그 이름모를 이웃들덕을 톡톡히 봤고 우리 역시 쓰던 물건들을 쓰레기통옆에다 내다놓으면 얼마 안 있어 필요한 누군가가 그 물건들을 가져간다. 그 누군가가 대부분이 중국학생들이 대부분이다. 우린 얼마 전 까지만 해도 해가 질 무렵 저녁 산책길에 오며 갈라치면 남의 쓰레통 근처를 탐사(?)하는 버릇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지난달인가...건너편 쓰레기통에 누군가 내다놓은 멀쩡한 식탁이 지금 우리 뒷마당에 놓여져 아주 확실하게 재활용되고 있다.  누구말에 의하면 이동네에서 우리처럼 '야드세일'에 성공한 집도 없다고 한다. 우리돈 시세로 하면 천원 이천원에 제법 물건같은 물건들을 집어오는 재주가 남다르고 해서 그러는게다. 기실 야드세일은 우리가 뭘 사고 싶어 찾는 경우고 있지만 미국사람들이 쓰다가 내놓은 물건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여간 쏠쏠한게 아니다. 물론 진짜 새 물건들을 아주 헐값에 내놓는 이가 있는가 하면 아주 가끔이긴 해도 새것을 사는게 차라리 나을 성싶을 만큼 턱도 안되는 가격을 요구하는 얌체들도 있다.

미국에 오면 필수품이라는 자동차 얘기를 해볼까. 미국사정을 모르는 시어른께서 그러셨단다. 장보고 쇼핑하는데 무슨 자가용이 필요하냐고..말이다. 차없이도 학교는 다닐 수 있다. 한시간에 두번씩 있는 학교 캠퍼스를 도는 셔틀버스가 있으니까. 허나 장을 보고 쇼핑을 하는 경우에 월마트나 크로거등 다운타운을 도는 한시간에 한번 있는 셔틀버스를 이용하면 장을 보는데 두 세시간을 써야했고 무거운 것들을 들고 버스를 오르 내리기란 쉽지 않았다. 그렇게 우린 차없이 일년반을 버텼다. 달랑 우리 둘만 있는 것도 아니고 세살배기 아들내미를 데리고 그렇게 차 없이 버틸 수 있다는게 여기 사람들은 안다...쉽지 않다는 것을. 해서 주변 분들의 도움이 컸다. 누구보다 여기 먼저 와서 공부를 하고 있던 학교 동기랑 여기서 만나게 된 남편의 고등학교 후배가 필요할 때마다 차를 태워줬다. 제일 많이 도움을 받았던 건 처음 여기 저기서 살림장만을 할 때도 그렇고 은행구좌열고 전화신청하고 학교 등록같은 볼일을 볼 때마다 우리를 도와줬다. 그렇게 받았던 도움들이 너무 고마워서 사는게 조금씩 여유가 있어지면서 우린 가급적이면  이곳에 처음 정착하는 분들한테 도움을 드릴려고 한다. 우리만 그럴까...다들 처음 와서 받은 은혜들을 그렇게 갚는다..우리가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처음 오는 분들한테 차를 태워드리고 쓰던 물건들을 드리고 하면서. 남편 후배가 고마워하는 우리한테 그랬었다. 자기도 처음에 도움 많이 받았다고...다음에 우리도 처음 오는 분들을 자기처럼 도와주게 될거라고..여기서는 그렇게 서로 도와주고 도움받고 하면서 살게 된다고 말이다.  

사람사는 곳은 어디나 마찬가지리라...배짱을 부려 떠나오긴 했지만 부딪혀보기전에 갖었던 새로운 생활과 학업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걱정거리들이 여기서 하루 하루를 보낼수록 조금씩 조금씩 무게가 덜해져갔고..궁하면 통한다...는 말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있으면 있는대로 살기 마련이라는 걸 새삼 남의 나라 땅 살이에서 절감 또 절감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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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새김질을 들어가기 전에...

공부한다고 한국을 떠나온지 햇수로 10년째가 되어온다. 어느새 여기 올 때 비행기 유아석(infant seat)에 누웠던 아들이 12살이 되어가고, 우리의 결혼 햇수 또한 12년이 넘었으니까.. 그 시간 동안 10년을 우린 이곳에서 보낸 셈이다. 새삼스레 그 짧지 않은 그 시간들을 되새김질하고 싶어진 것은 둘중에 먼저 공부를 끝낸 남편이 한 주립대학에 자리를 잡게 되면서..이제사 여기서 보낸 시간들을 조금은 여유로운 웃음으로 떠올리고 싶다는 마음의 여유에서 일게다. 몇푼 안 되는 돈 달랑 들고 그것도 혼자가 아니라 둘다 공부하겠다는 말그대로 똥배짱하나로 시작했던 남의 나라땅 살이...그 시간동안 겪었던...이런 저런 고비들이 많았기에..하여 주머니가 넉넉하다고 해서 유학하는 것만은 절대 아니라는 것을 유학을 꿈꾸지만 현실에 묶여 저지르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얘기해주고 싶기도 해서. 물론 그 길이 쉽지 않다는 것도 함께. 돈이 있으면 에둘러가지 않고 가로 질러 갈 수 있는 빠른 길이 있음에도 턱없이 가벼운 주머니덕에 한참은 돌아 가야 했던...마냥 더디게만 여겨졌던 거북이 걸음이긴 해도.. 끝을 보겠다는 뜻만 접지 않는다면.. 결국은 할 수 있다고 얘기하고 싶어서다. 그리고 그 길에서 만났던 소중한 인연들도 함께 되새기고 싶은 맘에 그냥 끄적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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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말렸었다. 형편도 안되는 우리가 여유있는 사람들이나 갈법한 유학이란 걸 간다고하니까. 그냥 저렇게 맘으로 꿈꾸다 말겠지 하는 주변의 반응에 은근히 오기가 동하기도 했다. 돈있는 사람만 유학하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자는....그런 오기말이다. 허긴 누가 봐도 '맨땅에 헤딩하기'가 따로 없긴 했다. 자식의 유학자금을 보태줄 만한 형편이 안 되는 건 시집이나 친정이나 다르지 않았으니 양가에 기대할 뭣도 없는데다 설사 있다 해도 서른 중반을 바라보는 늦은 나이에 우리만 잘 살아보겠다고 연로하신 부모님들을 두고 떠나야 하는 철없는 짓을 저지르는 주제들인터라 그런 도움은 아예 애초부터 꿈도 꾸지 않았다. 허나 그런 고집과는 달리 우리가 힘들 때 어찌 아시고 얄팍한 당신들의 주머니에서 건네주신 쌈짓 돈을 염치없이 몇번 받긴 했지만. 그래도 적어도 떠날 때 우리 맘은 그랬었다.

무조건 벌리고 보자는 식의 이몸하고는 달리 돌다리를 건너기전에 여기 저기 두들겨봐야 하는 돌다리파인 남편은 과연 우리가 잘 하는 짓인지..간다고 해도 끝까지 해낼 수 있을지..하는 우려를 비행기가 뜨기전까지 접지 못했다. 지금 되돌이켜 생각해봐도 그건 말 그대로 똥.배.짱이었다. 게다가  우리의 실력이 유학에 성공했다고 수기를 쓴 누구 누구처럼 출중하야 장학금을 받을 주제도 못 되었으니까.  주머니도 얄팍하기 그지없고 그렇다고 실력까지 내세울 뭣도 없는 우리가 과연 남들처럼 고생끝에 온다는 그 '복'(?)을 볼 수 있을까 싶은 걱정이 어찌 전혀 없었겠는가. 기실 그렇게 주제파악하고 그만 접자는 맘이 고개를 들어 하루에 열두번 내 속을 휘저어대곤 했었다. 그럴 때마다 과감하게(!) 접지 못했던 건..그렇다고 유학을 꿈꾸지 못하지 말란 법은 없잖은가..하는 발끈함이었고..무엇보다  결혼 전부터 키워온 꿈인데..결혼했으니 혼자가 아니라 둘이라 서로 힘 보태주면 혼자일 때보다 더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가서 부딪혀보지도 않고.. 부딪혀서 머리가 깨지기도 전에... 미리 깨질 것을 걱정해 이대로 접는다면 나중에 후.회. 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남은 시간동안 누구 누구탓을 하면서 살고 싶은 맘은 전혀 없었으니까.

허긴 오기 전에 주변상황이 많이 꼬이긴 했었다. 이러다 못 가고 주저 앉는거 아닌가..싶을 만큼. 그럼 그렇지..우리 형편에 무슨 유학이었냐.. 헛꿈을 한번 꾼거라치고 접고 싶을 만큼. 시아버님께서 뇌졸중으로 쓰러지셔서 중환자실에 누워 계셨고 친정어머니도 뱃속에 무슨 혹이 생긴 듯 하다고 하셔서 여기 저기 병원을 찾아다니며 검사를 받으러 다니시는 마당에..자식된 도리로 어떻게 떠날 수 있었겠냐고 그때 처지를 핑계삼아 눌러 앉을 수도 있었다. 해서 이러 저러 해서 못 갔노라고..내 탓에다 처지 탓을 하면서 미쳐 가지 못한 길에 대한 미련을 곱씹으며 살았을 게다. 허나 그렇게 밖에서 기웃거리면서 막연히 힘들거라고 못 해낼 거라고 접기 보다는 일단 어떻게 해서라도 그 안으로 머릴 들이밀고 시작하면 그 안에 다 방법이 있을거라는 맘에 그런 상황들이 나아지길 기다렸고 시아버님이 퇴원하셔서 집에 돌아오시고 친정어머니의 진찰결과도 나쁘지 않게 되면서 놓았단 마음을 다 잡고 천천히 구체화시켰다. 그렇게 오랫동안 별러왔던 계획을 그렇게 그냥 주저 앉히기에는 억울해서 결국 그래, 일단 가보자...가서 해보는 데까지 해보자..나중에 후회하지 않을 정도까지만 해보는거다..그래도 안 되면 깨끗하게  포기하고 짐싸서 오는거다...라고 맘 굳게 먹고 말이다. 얼핏보면 이 무모해보일 우리의 계획은 우리의 남은 인생을 후회하면서 살지 않기 위해 행동으로 옮겨졌다. 그 과정에서 이몸보다 생각이 많아 이것 저것 맘에 걸려하던 남편도 나랑 같은 맘으로.. 

난 남의 나라에서 공부하고 싶어하는 유학의 꿈이 허영기 섞인 꿈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대학원에 들어가면서부터 언제 한번 제.대.로. 공부를 계속하고 싶다는 맘을 품었다. 내 이 야무진 꿈을 알면서도 가족이나 친구들은 결혼까지 했고 거기다 아들까지 낳은 내가 저렇게 그냥 꿈만 꾸다 접고 말겠지 했나 보다. 결혼한 지 이년만에 계획대로 떠난다고 했을 때..안 가는 줄 알았는데 결국 가긴 가네..라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던 걸 보면. 여하튼 출국시기는 대학원에서 영화공부를 시작한 남편의 석사과정이 끝난 다음으로 잡았다. 뒤늦은 결혼에다 유학까지 생각하고 있었던터라 내 계획에는 아이에 대한 부분이 없었지만 아이를 너무 좋아하는 남편의 뜻대로 난 결혼하자마자 아이를 갖었고 임신을 해서도 아들을 낳은 후에도 우리 둘은 최대한의 총알(유학자금을 우린 그렇게 얘기했다) 비축을 위해 과외에다 학원선생에다 리서치 파트타임에다 여기 저기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분주하게 뛰어 다녔다. 말 그대로 발바닥에 땀나게 말이다. 허나 그렇게 땀흘린 것에 비해 우리의 총알은 계획한 만큼 늘어나지 않았다. 그건 우리 벌이의 대부분이 생활비로 빠져 나갔기에 어느 세월에...하는 한탄이 절로 나왔다. 그렇게 일년 반을 뛰어다니다 남편의 졸업작품을 찍을 즈음에 시댁으로 들어가 6개월정도를 살면서 유학을 구체적으로 준비했다. 이천만원 좀 넘는 전셋돈에서 졸업작품을 찍는데 드는 비용을 빼고 난 나머지 돈에다 조금이라도 더 보태서 유학살이에서 적어도 일년은 버틸만한 총알을 갖고 떠나고 싶었지만 우리의 계획과는 달리 오히려 알량한 총알은 자꾸 줄어들어만 갔다. 하여 총알확보되기를 기다린답시고 이렇게 미루다보면 점점 늦어져서 어쩌면 아예 접게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끝에 우린 애초 계획대로 남편이 대학원을 졸업하고 난 그 해 여름(1999년)에 저질렀다.. 사천불(4백만원)이라는 말도 안되는 돈을 들고.

유학준비도 유학원도 도움없이 혼자서 했다. 이런 저런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토플이랑 지알이 공부는 손에서 놓지 않았고 유학원을 통해서 하면 거의 백만원 넘게 든다는 학교 지원이나 비자 인터뷰에 필요한 서류등은 인터넷에서 얻은 자료들 덕에 혼자 준비했다. 이때는 우리것 뿐만 아니라 우리랑 같이 공부하러 가겠다고 따라 나선 한 동생 것까지 같이 준비해주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가장 큰 골칫거리는 비자인터뷰때 재정증명으로 들이밀어야 하는 통장잔고 만들기였다. 친구들한테 부탁해서 여기 저기 돈을 끌어 모아 입금시켜 비자 인터뷰에서 거절당하지 않을 만큼의 금액을 만들어 잔고증명을 띠었다. 물론 그 증명서만 떼고 나서 빌린 돈들은 모두 쥔장들한테 돌려주었지만 잠깐동안이나마 적쟎은 돈을 선뜻 내준 친구들한테 고마울 따름이다. 학교는 대학원 동기가 먼저 가서 공부하고 있는 학교로 결정했다. 다른 주립대학교에 비해 학비도 저렴했고 남편과 내가 공부하고 싶은 분야가 둘다 있고, 부부중에 한명이 조교(assistanship)을 하면 그 배우자의 학비를 삼분지 일정도 감면받을 수 있고,아들도 3살이 넘으면 무료로 학교(pre-school: 유치원의 이전과정)에 들어갈 수 있다는..기타 등등의 제반 조건등이 우리의 처지에 들어맞는.

마지막 결정은 우리 둘중에 누가 배우자 비자(F2 visa)를 하느냐 였다. 그건 둘다 학생비자(F1 visa)로 들어가면 미국내 합법적인 체류를 위해 외국학생이 최소한의 3과목(9학점)을 들어야 하는 풀타임 학생이기에 학비도 문제려니와 그 당시 두살이 채 안되는 아들내미를 둘중 하나가 돌봐야 하기에..둘다 학생비자(F1)로 공부할 형편은 못 된다는 생각에 우린 둘이 머릴 맞대고 고민했다. 지금은 이민법(immigration law)이 바뀌어서 배우자 비자(F2)로 공부할 수 없지만 그때만 해도 배우자 비자를 갖고 있으면 풀타임(full time)이 아니라 파트 타임(part time)으로 공부할 수 있었던터라 영어공부를 손에 놓지 않았던 내가 오기 직전까지 단편영화 만든다고 작업에만 매달린 남편보다는 영어적응을 위한 시간에 여유가 있다 싶어 입학을 연기하고 아들내미를 돌보기로 했다. 게다가 학교조교 자리를 얻는데 꼭 필요하다는 컴퓨터 다루는 기술들은 기계치인 나보다 남편이 훨씬 낫기에...더군다나 남편을 배우자비자(F2)로 신청하면 비자인터뷰에서 퇴짜(reject)당할 확률이 훨씬 높다는 근거없으나 그럴듯한 소문을 들었던 터라 우린 남편을 풀타임학생인 학생(F1)로 신청한 비자인터뷰를 했다. 지나고 나서 하는 얘기지만 많이 부실한 재정증명에도 혹시나 하는 맘에 잔뜩 긴장하게 했던 비자 인터뷰는 몇가지의 질문으로 싱겁게 끝났고 결국 우리는 1999년 7월 9일에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20개월 된 아들을 infant seat에 앉히고.. 아니 눕히고.

오랫동안 지켜봐온 이몸의 고집을 아는터라 맘으로나마 걱정을 곁들여 격려해준 친정식구들에 비해 시댁 어른들은 우리의 유학을 마뜩찮아 하셨다. 안되는 형편에 저렇게 무릴 해가면서까지 가야 하나 싶으셨던게다. 이곳에 와서 남편이 아르바이트로 이런 저런 힘든 일을 한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그러셨을게다. 이몸만 아니었으면 한국에서 고생 안 하고 잘 살고 있었을 아들이 남의 나라땅에서 그렇게 고생을 한다고. 애초 여기 올 때 고생을 각오하고 떠나는 우리한테 시부모님께서는 20개월짜리 아들내미를 당신들 곁에 두고 가라고 하셨었다. 돈없이 남의 나라 살이를 살러가니 아들내미까지 돌보려면 어려울거라시면서. 남편도 그러자고 했다. 허나 고생을 해도 같이 해야 한다고, 3살만 되면 그곳에서 학교에 갈 수 있다니까 그때까지 내가 돌보면 된다고 내가 우겨서 같이 데리고 왔다. 그런 내 고집스런 결정은 우리 힘든 미국생활내내 참 잘 한 짓이다 싶을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만일 한국에 두고 왔다면 아들내미 보고 싶어 힘들 때 한국으로 날아갔을 지도 모른다.  우리 곁에 그 아들이 있었기에 힘이 되고 힘들어도 웃을 수 있었던 순간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알기에...

그렇게 가족과 친구들의 걱정어린 시선을 받으면서 비행기에 올랐다..그게 10년전이다. 오는 가는 동안, 예민해서 걱정했던 아들은 긴장한 아빠 엄마 맘을 알기나 하는 양 칭얼대거나 보채지도 않고 유아석(infant seat)에서 아주 곤히 잠만 잤고 남편과 난 앞으로 닥칠 새로운 경험들에 대한 설레임과 두려움으로 서로의 손을 꼭 잡았었다. 누구말대로 맨땅에 해딩이라는 걸 시작하려니 그럴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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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 말대로 진짜 몇푼 안 되는 돈 달랑 들고 '대책없이' 유학이란 걸 떠나 왔을 때...잘 갔다 오라는 지인들의 격려 뒤에 숨은.. 과연 쟤네가 잘 해내고 올까.. 하는 걱정반 호기심 반 섞인 그들의 마음들을 모르지 않았었다. 허긴 그럴만도 할만큼 우리의 형편은 넉넉하지 않았으니까.

전세자금에서 남편 졸업작품 영화 찍고 남은 돈 달랑 들고 이곳에 왔을 때...우린 공부 다 마치기 전엔 한국에 돌아가지 않겠다는 맘이었다. 만에 하나 조교자리가 없으면 '뭐라도' 한다 굳게 맘먹고 왔으니까. 그런 우리한테 제대로 된 가구나 살림 살이를 돈주고 산다는건  거의 '사치'로 여겨졌었다.

처음 공부를 시작한 동네는 미국 중서부 일리노이주에 있는 시골 주립대학이었다. 거기 도착했던 첫날이 기억난다. 배정받은 학교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무것도 없었던 공간. 아니 그나마 다행스러웠던 건 대부분의 학교 아파트엔 다 있다는 냉장고와 조리해 먹을 수 있는 오븐이 갖춰져 있다는 지금 생각하면 참 당연한 것들인데 우린 그것만으로도 감사해했었다. 그것말고는 카펫도 안 깔린 휭한 거실 맨바닥에 아무 것도 없던 우린 며칠동안을 그렇게 차가운 바닥에 앉아 라면박스를 엎어 밥상으로 삼고 그 위에서 밥을 먹었다. 엠티온것마냥 들떠하면서 말이다.  

더군다나 운이 좋았던 건 그 즈음에 공부 다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한 가족이 있어 그분들이 쓰시던 카펫, TV, 소파, 부엌 살림살이 등을 공짜로 얻을 수 있었다는거다. 그렇게 살림을 물려주는 그림은 유학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어차피 공부하러 잠시 머무는 뜨내기 삶들인지라 그렇게 서로 도와주고 도움을 받는게. 비록 오래 쓰시던 물건들이라 대부분이 많이 낡긴 했었지만..한국서 갖고 온 압력밥솥이랑 우리 세식구 수저랑 밥그릇이 전부였던 우리한테 그분들이 넘겨주고 간 살림살이는 한동안 너무 유용했음은 물론이다. 해서 그분들한테 감사한 마음을 늘 갖고 있던 우린 그분들이 공부하시면서 몸담고 계시던 한국 교회 식구들중에 아이가 있는 한집을 택해서 우리 아들이 작아서 못 입지만 그래도 쓸만한 옷가지들을 챙겨 주는 것으로 그때 받았던 고마운 맘을 표현했지만 정작 그 옷들을 드린 분들에게 이런 우리의 속내를 얘기한 적이 별로 없던터라 철이 바뀔 때마다 훌쩍 훌쩍 크는 아들의 옷들중에 입을 만한 것들을 챙겨서 갖다 드리는 이유를 그분들은 모르셨을게다. 

그곳은 풍족하지 않은 유학생들끼리 모여사는 곳이라 누가 이사를 가거나 한국에 들어갈 때 쓰던 살림살이나 가구들을 남은 이들한테 물려주거나 헐값에 팔곤 한다. 물론 가난한 학생들만 있지는 않다. 형편이 되서 좋은 가구 놓고 살다가 한국에 들어갈 때 다 싣고 가는 이들도 있으니까. 만일 쓸만한 살림인데 마땅히 줄 상대가 없을 때엔 쓰레기통옆에다 슬쩍 내다놓으면  필요한 누군가가 들고 가곤 한다. 지금이야 웬만한 것들은 다 있는데도 가끔 쓰레기통 옆을 지나칠라치면 주변에 나와있는 가구들을..굳이 필요하지도 않으면서.. 습관적으로 살펴보는 버릇은 여전하다. 그건 아마도 첫해 산책을 핑계로 열심히 동네 한바퀴를 돌아다니며 쓸만한 물건들이 나와있지 않나 탐색하던 그때의 버릇탓이다. 물론 제대로 된 물건을 찾는게 쉽진 않지만..그래도 운좋으면 제법 쓸만한 것들을 주워 쓸 수 있었다.  한국에서 살았다면 이런 융통성(?)은 생각하지도 못 했을게다. 그게 다 거기서 배운 살아가는 방법이다.

우리가 그곳에서 돈을 주고 산 것 물건중에 제일 비싼 품목이 바로 '침대'다. 지금도 아주 잘 쓰고 있는. 그곳에 도착한 첫날 우리를 마중왔던 후배, 우리보다 그곳에 4년정도 먼저 와서 공부하고 있던, 다른 건 몰라도 침대는 괜찮은 걸 사야 한다는 그 후배의 충고대로 그때 거금 400불 가까이 주고 장만한 게 침대였으니까. 그게 500불 주고 넘겨받은 중고 자동차 다음으로 가장 큰돈(?)을 주고 산 살림이였다. 

초창기, 우리 세식구는 살림살이를 장만하러 틈틈이 동네 야드세일(Yard Sale)을 찾아다녔었다. 그덕에 두살배기였던 아들의 장난감이랑 비디오 테잎이나  마이크로 웨이브, 수납장, 의자같은 살림살이들을 아주 헐값에 장만할 수 있었다. Yard Sale을 그렇게 부지런히 찾아다닌 것은 물건 사는 재미보다도 기실 이네들이 판다고 내놓은 이런 저런 물건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던 탓도 있다. 처음엔 차가 없었던 관계로 주변 아는 사람들, 특히 후배한테 적쟎은 민폐를 끼치긴 했지만...그 재미로 아침마다 부지런을 떨면서 찾아 다녔었다. 아침에 일찍 가야 그나마 살 물건도 구경할 물건도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는 한동안 야드세일 대신 Good Will이라는 중고품 가게를 자주 갔었다. 대부분 개인들의 기부(Donation)한 물건들을 깨끗하게 정리해서 팔던. 우린 그곳의 단골이었다.

8년을 그곳에서 지내는 동안 참으로 많은 지인들이 우리 곁을 떠났다. 몇몇은 졸업후 직장을 잡거나 다른 주에서 남은 공부를 계속한다고 다른 주로 떠나거나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그네들은 떠나면서 우리집 공간엔 그들이 넘겨주고 간 살람살이들이 하나 둘 채워져갔다. 해서 그곳을 떠나올 때 즈음 휭하니 텅 비어있던 우리집은 그네들이 남기곤 간 것들과 우리가 야금 야금 사들인 살림살이들로 꽉 채워져 있었다. 그런 살림들에 우리는 또 다른 '소중한' 의미를 갖고 있다. 그곳에서 생활하는 동안 맺었던 소중한 인연들을 떠올리게 하는 '매개'로써 말이다.  

한동안 유용하게 썼던 허나 몇년 후에 폐차장으로 보내졌던 니싼 스포츠 차, 아들이 좋아하던 감았다가 떴다 하던 라이트가 달린 그 차랑 의자, 라운드 테이블, 서랍장은 먼저 한국으로 들어간, 지금은 모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후배들을 떠올리게 하고

TV, VTR, 철제 수납서랍은 락을 좋아하는 남편과 절친했던 동생을, 아들이 좋아하는 물감, 색연필등의 문방구, 책상, 스탠드, 의자는 일본 친구를, 장식장과 촛대는 지금 한국에서 강의 하고 있는 덩치좋은 미국 친구를, 책장이랑 하얀색 테이블, 예준이 눈썰매는 한국에서 결혼했다는 한 친구를, 세탁기, 빨래건조대, 부엌살림들은 우리 아랫집에 살던 부산내기 갑장 친구를, 식탁 테이블이랑 지금 깔고 있는 카펫, 플레이스테이션은 루지애나로 이사간 남편 선배 가족들을 , 식탁 의자, 밥통, 장식 선반, 그리고 여름에 펼쳐놓곤 하던 커다란 파라솔(?)은 금속공예가 전공이던 예술쟁이 부부를, 컴퓨터와 아들이 좋아하는 파워레인저가 그려진 큰 타올은 별명이 우리집 딸이라는 씩씩한 처자를, 아들 공부하는 책상이랑 소파는 지금도 우리곁에 있는 두딸을 키우고 있는 씩씩한 젊은 엄마를, 거실에 있는 또 하나의 체크 무늬 소파랑 오디오는 엘에로 이사가 결혼한 한 커플을, 그리고 지금은 한 아기의 아빠 엄마가  된 친구들은 우리집 낡은 TV 장식장을 업그레이드 시켜놓고  한국으로 돌아갔다.

이들 대부분은 언젠가..한국에 돌아가면 결국 만나야 할.. 여기서 맺은 소중한 인연들이다. 그네들이 남기고 떠난 물건들에 눈길이 머물 때마다.. 자연스럽게 누군가를 그리고 여기서 함께 했던 즐거운 혹은 마음 아팠던 순간들까지 딸려 생각나게 한다.  주머니는 비록 얄팍하지만 그런 소중한 인연들이 많아 마음은 늘 부자라고 얘기하는 남편말 처럼 가난한 유학생이기에 겪게 되는 흔치 않은..따스한 경험임엔 분명하다. 먼후일에도....이런 그림들은 선명하게 우리의 추억속에 남겨져 있을게다. 해서 이곳을 떠올릴 때마다 꺼낼 법한... 따뜻한 추억거리들이 배어있는 그 물건들도 같이 떠오를터이니.... 참으로 남다른 경험이잖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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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ind-up Bird Chronicle (Audio CD, Unabridged)
Murakami, Haruki / Naxos Audio Books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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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전에 읽었던 그의 작품이라고는 '노르웨이의 숲'인가...그 책 한권밖에 없었다. 그것도 아주 아주 오래전에. 그게 몇년전이었는지는 정확지 않지만. 해서 어떤 내용이었는지도 기억이 가물 가물하다. 다만 한번 빠지면 한 작가의 책들을 다 읽는 내 책읽는 습관으로 미루어 볼 때  책 한권으로 끝내고 다른 작품들을 읽지 않았던 걸 보면 적어도 그때는 하루끼의 소설이 내 코드랑 그리 맞지 않았나..하고 짐작할 뿐이다. 

그렇게 한국에서도 읽지 않았던 그의 소설들을 여기 와서 읽게 된 건 2005년 여름부터였다.  지겨운 논문작업을 끝내고 나서 벼르고 벼렀던 대로 이제부터 실컷 놀자는 맘에서 영화랑 딱딱하지 않은.. 아주 재밌는 소설들을 찾아 읽는데 쏠쏠한 재미를 붙이고 시작했을 때였으니까. '용두사미'의 스타일이라 뭐든지 초반엔 너무 심하게 열심히 하는 터라...그때는 일주일에 두세번씩 동네 도서관(public library)에 들려 한번에 5개까지 공짜로 빌릴 수 있는 영화들이랑 무한정으로 빌릴 수 있는 책들을 잔뜩 빌려다 집에 쌓아놓고 시간날 때마다 영화를 보고 책을 읽어댔다. 그렇게 놀려고 맘 먹었으면서도 그냥 '순전히' 놀자니 웬지 그래서는 안 될 것같구 해서 구실을 붙인게 '영어'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게 놀자는 거였다. 그건 그나마 영어로 된 것들을 손에서 놓지 않고 있다면 공부하면서 절감했던 턱없이 후달리는 영어실력에 대한 내공을 키워보자는...대신 빡쎄게는 말고..좀 느긋하게.. 영화로 들으면서 듣기실력 좀 늘리고.. 재밌는 책들을 소리내어 읽으면서 즐기다보면 영어의 표현력이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싶은 맘에서 시작한 셈이다. 물론 '용두사미'스타일답게 시간이 갈수록 그 초반의 열성은 점점 식기는 했지만...아직까지 하고 있기는  하다.

영화는 이것 저것 주워들은 귀동냥도 있고 원체 좋아하는 터라 이것 저것 좋은 것들을 고를 수 있었던데 비해 책의 경우..처음엔 주제파악을 못하고 넌픽션을 빌려 읽다가 그 참을 수 없는 지루함에 졸기를 몇번..빌린 책들에 은근히 내 침자욱까지 찍어놓고 혼자 미안해 하기를 몇번...그러다 아주 재밌는 소설을 빌리기로 했다. 뭘 빌릴까..하며 둘러보다 눈에 화악 들어오는게 적당한 두께의 문고판 크기 책들이었다. 물론 그 두께와 크기가 눈에 들어왔을리는 만무고 그 표지의 노골적인 남녀상열지사 그림에 필이 꽂혀서 한두권을 빌려 읽고나서 내린 결론은 역시 내용은 표지만도 못한 수준이었고 사랑으로 시작해서 사랑으로 끝나는 그렇고 그런..영어 표현을 익히는 차원에서라도 거의 영양가가 없다는 거였다. 베스트 셀러 아니면 미국 작가에 대한 정보가 거의 전무한 고로 그 다음으로 빼든게 일단 귀에 익은 존 그리샴(John Grisham)이란 작가의 작품들이었다. 처음엔 그런대로 재밌었다. 'Broker,' 'the King of torts,' 'Partner'등...그렇게 몇권을 읽다 보니 한마디로 물린다고 해야하나. 너무 뻔한 플롯에다 끝부분이 예상되는 반복된 패턴... 물론 덕분에 법률표현이나 뒷골목에서 행해지는 은밀하고 거친 표현등은 재밌게 읽긴 했지만. 그러다 뉴욕타임지 베스트 셀러 리스트에 올려진 책들을 몇개 읽었다. 허나 하나같이 '그저 그런'류의 소설들이었고 계속 다음 작품을 읽고 싶게하는 작가는 못 찾았다.

그렇게 이책 저책을 뒤적거리고 있는데 여기서 알게 된 한 동생이 'The Wind-Up Bird Chronicle'라는 제법 두툼한 소설책을 건네줬다. 그녀는 아주 재밌게 읽었다면서. 받고보니 다름아닌 하루키의 작품이었다. 교포인 그녀한테서 받은 책이 미국 작가가 아니라 일본작가의 책이라니.. 여기서 태어나고 자랐어도..그래도 정서는 오리엔탈쪽인걸 신통해하면서 그 책을 받긴 했지만 오래전에 읽었던 그의 소설을 떠올렸고 그 뒷맛에 대한 기억때문에 그닥 많은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렇게 미적대며 읽기 시작한 나는 얼마 안 있어 그 책 한권을 읽었고 그 뒤에도 동네 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그의 작품들을 하나씩 빌려읽기 시작했다..'Ather the quake,' 'An elephant vanished,' 'Kafka on the shore,' 'South of the Border, West of the Sun,' 그리고 지금 읽고 있는 'A wild sheep chase.'

뒤늦게 알게 되었지만 그의 소설들은 참 매력적이다. 그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조금씩 알듯 했다. 왜 이런 시골구석 동네 도서관에서도 남의 나라 작가의 소설들을 몇권씩이나 갖고 있는지.. 책을 빌릴 때 사서들이 가끔 그의 소설을 'fantastic'하다며 빌리는 나보다 더 좋아하는지..그의 소설이 46개국의 언어로 번역되어 팔리는지..  말이다. 얼마 안 있어 난 그 도서관에 있는 그의 책들을 다 읽었고 지금은 다른 인근 도서관에서 갖고 있다는 'A wild sheep chase'을 interlibrary loan으로 빌려 읽고 있다 (잠시 샛길로 빠져 여기 도서관시스템이 좋은 점들중에 하나가 인근 도서관간의 연계( interlibrary loan이란 이름으로)가 아주 잘 되어 있다는 점이다. 학교 도서관도 물론 동네 도서관까지도 자기들이 갖고 있는 않는 책이나 저널들을 학생이나 지역주민이 원한다면 같은 주(State)나 인근 시(city)에 있는 다른 도서관에서 빌려서 챙겨주는 아주 사랑스런 시스템이다. 학교 도서관같은 경우엔 논문(article)을  신청하면 해당 페이지를 복사해서 우편으로 보내주고 동네 도서관에서는 신청한 책을 언제쯤 빌려갈 수 있는지 친절하게 전화로 알려준다. 물론 순전한 공짜일리는 없다. 우리가 학교나 지역에 내는 학생회비 혹은 세금에 그런 비용이 포함되어있긴 하겠지만 그래도 얼마나 착한 시스템인가 말이다).

다시 하루키책들 이야기로 돌아가면 그의 소설들을 읽으면서 우선 드는 생각은 그의 이야기 방식이 영어라는 언어랑  궁합이 아주 잘 맞는다는 거였다. 물론 이건 순전한 개인적인 느낌이다.  앞에서 얘기했지만 어차피 소설책을 손에 든것도 다양한 영어 표현방식을 연습하자는 속내도 있었으니 다른 소설보다도 훨씬 읽기 편하게 써내려간 게 원작을 영어로 번역하다보니 결과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세세하게 어쩔 때는 지나치게 하나 하나 친절하게 묘사하는 그의 글쓰는 방식이 영어식 표현이랑 참 잘 어울린다. 아마도 그게 나로 하여금 그의 소설들을 계속 찾게 한 첫번째 이유일게다. 그건 한국에서 읽었던 '노르웨이 숲'에 대한 내 기억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그 책이 어느 출판사였고 역자가 누구였는지도 지금은 기억 못 하지만 그때  기억으론  하루키의 이야기 스타일이 내 표현대로 한다면 참 많이 '번진다'는 거였는데. 글쎄..다른 말로하자면 좀 산만하다고 해야하나. 지나치게 세밀하다고 해야 하나. 아마도 그건 우리말로 읽어서 그렇지 않았을까..싶다. 예를 들어, 영어로 된 그의 표현들중에 얼추 비슷한 것을 떠올려보면 "He pushed the bridge of glasses without a word" 을 우리 말로는 "그는 아무말없이 안경을 밀었다" 정도로 표현될게다. 사뭇 다른 느낌이지 않은가. 이런 영어문장의 특징을 언어학자들은 어떻게 구분지을지는 모르지만 우리말의 표현으로는 그냥 사물을 뭉뚱그려져 표현되는 느낌인데, 영어의 표현은 하나 하나 그려내는 그의 소설방식을 아주 돋보이게 한다. 다르게 말한다면 우리말로 번역된 책에서 그의 표현은 제대로 정리 정돈이 안 된 방안을 멀리서 찍어서 그안에 담겨진 사물 하나 하나가 제대로 안 잡힌 사진을 들여다보는 그런 기분인데 반해 영어의 표현은 그 방의 구석 구석 그 하나 하나의 그림을 아주 디테일하게 들여다보는 기분을 들게 한다. 물론 그냥 기분이나 느낌이 그렇다는 얘기다. 그 언어구조나 느낌의 차이를 딱 집어내는 건 내 능력밖이니 번역의 차이에서 오는 느낌에 대한 얘기는 그만 하련다.

짐작컨대 한국에서 그의 소설을 읽었을 때만 해도 현실과 비현실을 아무렇지 않게 넘나드는 그의 글쓰기가 나한테는 무척 낯설기도 했을게다. 그때까지만 해도 난 다른 젊은친구들이 열광했다는 그의 그런 화법에 익숙하지 않았을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이전에 읽었던 그 책의 번역수준이 많이 딸려서 그럴수도 있을거라고 괜히 트집도 잡아보긴 하지만. 암튼 한 작품이 좋으면 그 소설가의 다른 작품까지 다 읽어야 직성이 풀이는 내 책읽는 스타일에 그의 다른 작품을 더 이상 읽지 않았던 걸 보면 적어도 그때는 그의 소설을 소화하기엔 이래 저래 적합하지 않았던게다. 해서 왜들 그렇게 하루키..하루키..하고 그의 소설을 찾아 읽어대는지 대체 그 맛이 뭔지를 몰랐다가 이제서야 이렇게 좋아서 떠들어대고 있다. 이 또한 영락없는 뒷북근성이다.  

그의 소설...매력의 핵은 독특한 그의 상상력에 있다 싶다. 도대체 나보다도 훨씬(!) 오래된 나이(49년생이라니까)에도 불구하고, 어디에서 그런 환상들을 품고 있다가 꺼내서 빚어내는지...읽다가 덮고 나서 나머지 이야기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게 만드는 글쓰는 재주까지 타고 났는지...마냥 부럽기만하다. 그의 소설에서는 고양이가 말을 하고 (Kafka on the shore), 개구리가 춤을 추고 (After the quake), 우리말로 괴물이라고 뭉뚱그려 얘기할 수 있는 아주 비현실적인 존재는 그의 소설 여기 저기에 심심찮게 나타난다. 그리고 소설의 주인공이 처한 상황이 현실이라는 건지 꿈속이라는 건지를 헷갈리게 하는 대목도 많고, 그의 소설속 캐릭터들은 어떤 알 수 없는 기운이나 운명에 의해 엮여서 만나고 헤어진다. 해서인지 그의 소설에서 일본 애니의 대가인 미야자끼(Hayao Miyazaki)냄새가 많이 난다. 아마도 그건 일본산 작가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아닌가 싶다. 그네들의 문화적 뿌리에서 기인하는. 지금 우리한테는 미신이네 뭐네하며 무시되어오고 있는 존재들이 일본의 문화 곳곳..그네들 일상 곳곳에서 아직도 제몫의 숨을 충분히 내쉬고 있기 때문일게다. 허긴 일상에서 눈만 돌리면 접하게 되는 모든 것에 인간의 존재를 초월한 기운 혹은 정령(spirit)이 있다고 믿는 일본인들한테 그의 소설에서 다루어지는 소재들은 미야자끼 만화나 일본 애니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존재들이라 우리처럼 새로울 게 없는 것들일 수도 있을게다. 허나 서구문화의 눈으로 보기엔 그런 일본문화의 세계는 동양에 대한 막연한 신비감을 부채질해왔고 일본의  다양한 귀신 캐릭터들은 하루끼의 소설이나 미야자끼의 만화등을 통해 문화상품으로 세계시장에서 팔리고 있잖은가.

그의 소설에 단골 소재꺼리가 몇 있다. 예컨대, 집을 나간 아내, 아니 나갔다는 표현으로는 뭔가 부족한..어느 날 깜쪽같이 실종된 아내가 많이 등장한다. 그리고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중심에 속하지 않고 변두리에서 특이하게 산다. 학교를 다니지 않는 아이들은 보통이고 일하던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직장을 때려치우는 캐릭터들이 많다. 결혼을 했다고 해도 뭔가 현실적인 부부들의 살가운 냄새는 별로 없다. 아마도 그의 쿨(cool)한 표현탓인지도 모르지만. 해서 인지 왠지 그의 실제 결혼 생활도 그렇게 쿨(?)하지 않을까..하고 넘겨짚기도 한다. 그리고 소설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임에도 이차세계대전(World War II)에 대한 이야기가 어떤 식으로 든지 등장한다. 다소 뜸금없어 보일 수도 있는 그런 전쟁에 대한 그리고 전쟁에서 일그러진 인간의 모습에 대한 두려움 섞인 그의 일별은 새삼스럽게 어렴풋하게나마 전쟁을 겪었을 그의 세대를 새삼스레 일깨워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또 다른 소재는 섬사람답게 '지진'에 대한 두려움이 작품에 많이 나타나있다. 해서 정령의 힘을 빌어 누군가가 지진의 공포에서 도꾜를 구한다는 이야기를 천진난만한 동화적 모티브로 얘기하고 있지만 그 밑에는 피할 수 없는 '지진'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다. 이런 몇가지 소재들은 굵직한 이야기꺼리에 어떤 식으로든지 엮어져있다. 그중 재밌게 읽은 책들은 그의 단편들을 엮은 'Ather the quake,'랑  장편 'The Wind-Up Bird Chronicle'랑 'Kafka on the shore'다. 참..책읽기를 할 때 최근작부터 읽는건 그다지 좋은 방법은 아니지 싶다. 그런 걸 염두하고 읽지 않은터라 지금 읽고 있는 'A wild sheep chase'은  이전에 썼는지 신선도(?)가 다른 책들에 비해 훨씬 덜하다. 읽으면서 낯익은 표현이랑 소재들을 자주 대하게 되니 하는 말이다. 허니 그의 책 읽는 재미가 조금은 시큰둥해졌다.

조만간 도서관에서 다른 책들을 뒤적거릴게다. 하루끼만큼 매력적이진 않더라도...또 다른 매력적인 작가의 책을 찾으려고. 그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참 많이 부러워했다. 우리나라 작가의 작품이 이렇게 시골구석 도서관에 꽂혀 있는 것을 보게 된다면 얼마나 감격스러울까..하는 맘에. 이젠 하루끼가 잘 쓰는..하루끼 책들을 영역한 이들이 잘 쓰는 영어표현들은 많이 익숙해지긴 했다..눈에 띌만한 괄목상대한 정도는 아니더라도 이렇게 소설책 읽는게 영어 실력에 나름대로 도움이 되긴 되는 듯하다. 물론 책 읽는 재미가 먼저지만 말이다. 
 

덧붙임: 2005년 여름부터 공부를 다시 시작한 2007년에 이르는 시간동안 읽었다. 그리고 그때 끄적거려 놓은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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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박민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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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책 제목부터 특이했다.
프로 야구 원년 그 말도 안되는..
기도 안 차게 엄청난 점수차로 꼴찌자리를 고수하던
삼미 슈퍼스타즈를 기억하기에
대체 그들을 소재로 그것도 장편의 이야기로 꾸려갈 뭔가가
과연 있겠냐는 섣부른 판단은 책장을 넘기면서 사라졌다.

박민규라는 작가의 입담은
구세대인 내 보기엔 '신세대' 화법이라고 구분지을 수 있을 만큼
기존 작가 (적어도 내가 아는 이들)의 화법과는 다르다.
문어체가 아닌 구어체에 가까운
궁시렁 대는 듯한 그의 이야기 방식이 자연스러웠던 것은
아마도 이 소설에 자전적인 요소가 많은 탓이 아닐까..
그것에 대한 판단은 그의 다른 소설을 읽어보고 나서 해야할게다.

일단 한낮 개인사에 묻혀질 법한 소소한 이야기를
가볍고 재치있게 풀어가는 그의 이야기 스타일엔
높은 점수를 줄만하다.
여기서 '가벼움'이란 표현하는 방식을 이름이다.
만일 알맹이 없는 가벼움이라면
이 책은 우리집에서 볼일(?)보는 동안에만 읽혀지는
화장실용으로 그쳤터이나
대환과 나는 줄곧 볼일이 끝난 후에도
그 책을 접기 싫어 밖으로 갖고 나와 읽으며
킁킁 대고 웃었다.

주인공이 이야기 하는 세상은
'프로'와 '아마추어'로 나뉘어져 있다.
주인공은 한때 일류대와 명함이 부끄럽지 않은 회사를 거침으로써
'프로'들의 세상에 적을 둔 적이 있긴 하지만
결국 그는 '진짜 인생은 삼천포'에 있다는
상당히 철학의 깊이가 느껴지는 결론으로
그냥 '아마추어'세상에서 머물며 느긋한 삶을 택한다.
아니 생각해보니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그렇듯이 살다보니 그렇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 책에서 ‘삼미’가 갖고 있는 메타포는
단순한 꼴찌 야구팀으로써가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늘 일등만 기억한다는 이 치열한 경쟁사회에 대한
'반기'자 '역행'이다.
자본주의 프랜차이즈의 첨병인 프로야구 바닥에서
전혀 프로답지 않은 경기를 벌인
'삼미'를 그토록 추억하는 이유가
일견 '프로'의 세상에서 수용되지 못한
변두리 삶들의 ‘넋두리’라고 할 수 있음에도
이 책에 일관되는
그 삼미 야구팀의 플레이 방식과 철학(?)에 대한
작가의 해석이 궤변스럽다기 보다는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기에 충분할 만큼
나름대로의 이유와 논리가 있다.

받아치기에 엄두 안나는 공은
절대 무리해서 치지 않고
잡지 못할 공은 굳이 무리해서 잡지 않는다는
삼미의 플레이방식은
'프로'의 세상에선 용납되지 않았던 것 처럼..
여느 프로야구 팀들처럼'프로'의 세상에서
피터지는 경쟁에서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이 팀은 경기와 훈련을 통해
'정신을 수양'한다는 뜸금없는 철학을 갖고 있었던 것처럼..
주인공과 또 한명의 열성당원인 그의 친구 조성훈은
자신들의 삶이 그런 '삼미'를 닮았다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살기를 추구한다.

새삼 우리의 기억에 잊혀졌던
꼴찌 '삼미'에 주목하는 이유는 과연뭘까.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는지..
삼미의 투수였던 '감사용'을 캐릭터로 했던 영화가 있더니
이런 소설도 있다.
어느 것이 먼저였는지 정확하지도 않고 중요하지도 않다.

오직 일등과 일류만 쳐주는
우리 사회에서
꼴찌들에게는 결코 있을 법 하지 않은
그 꼴찌의 철학에 관심을 기울이는 건
그냥 우리 대중문화의 일시적인 트랜드라 해도
반가운 건
획일적인 면에 있어서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우리 사회의 융통성이
조금씩 나아진다는 징조가 아닐까 하는 넘겨짚음 탓이다.

언제부턴가 우린 이전엔 대접받던 '범생'이란 말에
경기를 일으키며
이젠 착한 것만으로는 용서가 안 되는 세상이란 암시들을
여기 저기에서 보여주고 있다.

예전에는
칭찬받던 그 평범하고 모범적인 전형들이 거부당하고 있는게다.
일례로 대중문화에 한민감한 우리의 청춘들은
스스로 '엽기적’이기를 자청하면서
허구와 현실을 헷갈려 하기도 한다.
물론 그런 한때의 트랜드 따위로
일류를 지향하는 우리 사회 인식이 바뀔 거라고
기대 할 만큼 순진한 이는 없을게다.
사람들은 다만 그런 '낯선’ 트랜드에
호기심어린 눈빛을 보내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스스로 '프로'의 세계에 들어가려고
고시를 보고 일류대학 합격 등의 공인된 장치를 통해
그 ‘프로’의 세계에 어떡해서 든지 비집고 들어가려고
피끓는 청춘을 고스란히 도서관에서 썪히길
마다하지 않긴 지금도 마찬가지일터이니.

그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이제껏 굳어진 시각과는 다른
낯설고 소소해 보이는 코드 하나로
세상을 빗대어 풍자하는 작가의 입담과
시종일관 그 코드를 놓치지 않는 그 일종의 내공에
있을지도 모를 그의 다른 소설들을 기대하게 된다.

이 '꼴찌'의 철학에 충분히 공감하게 되는 건
나 역시 '프로'의 세계가
늘 남의 세계라고 여겨왔던 변두리 체질이기 때문일게다.
물론 프로야구 원년 삼미가 꼴등의 자릴 지킬 때
난 우승팀이었던 오비베어즈의 박철순을 향해
열광의 박수를 보냈음에도
내가 주인공인 내 삶을
그런 무엇과 동일시한다는 게
허구에서나 가능한 설정이라는 걸 알아버린 아줌마한테
굳이 적용해보자면...
기실 초등학교때부터 줄곧 한번도 일등이 되기 위해,
어떤 조직의 중심에 서기 위해,
그리고 누군가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이를 악물었던 적이 과연 나한테 있었던가..
이책을 읽으며 되물은 적이 있다.
대답은 별로 없었다는 거다.

동시에 누군가가 했던 말도 생각났다.
공부를 계속하고 싶다는 내 희망사항에 대해
그건 내 전공바닥에서 더이상 아마가 아닌
프로가 된다는 걸 의미한다는
그 당연할지도 모를 말이
왜 나한테는 무지하게 부담스러웠던 걸까.
아마도 내가 가지고 있는 '프로의식’의 함량이
기준에 훨씬 못 미치기 때문일게다.
거기에 대한 내 반응은 '프로'는 무슨..
그냥 '좋아서' 하는거지..라는 아주 맥빠진 몇마디로
진지한 상대방을 실망시켰었다.

물론 나같은 함량미달들이 겪는 문제는
말한 대로 좋아서 하는 짓이
항상 '좋지만은 않다'는 거다.
하기 싫고 집어 던지고 싶을 때가 허다하다.
그때마다 난 그 잦은 빈도의 이유가
남들의 그 '프로 근성'이 나한테는 아주 부족해서 일거라는
자기 진단을 주저없이 내린다.

사실 그런 함량미달 근성이
무엇에나 쫓기기 보다 조금이라도 느긋해지고 싶은
내 특유의 똥배짱을 만들어 내는 지도 모른다.

있는 껏
느긋하고 싶다.
쫓기면서 계획된 대로 차곡 차곡
뭔가에 맞추어 숨을 헐떡이며 뭔가를 하고 싶지 않다.
그랬다면
난 훨씬 일찍 내 삶의 방향을 결정했을 지도 모른다.

남편은 그랬다. 
공부 끝난 이후의 삶도 삶이겠지만
물론 그 삶엔 우리의 기대치가 높아진 삶이겠지만
지금의 삶도 즐기자고.
지금도 살고 있는거니까.

그러고싶다.
나 역시.

덧붙임: 이책은 여기서 같이 유배생활을 하고 있는 남편의 후배한테서 빌려 읽었다. 읽은 지 꽤 되는데 이제라도 몇자 끄적이는건 순전히 내 삶의 되새김질을 위해서다. 여기서의 우리 삶이 그렇듯이.  

또 덧붙임: 2005년에 끄적거린 글이다. 사년이 흐른 지금...공부를 끝낸 남편은 미국 남부 시골의 한 주립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공부가 남은 난 아직도 학생노릇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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