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새김질을 들어가기 전에...

공부한다고 한국을 떠나온지 햇수로 10년째가 되어온다. 어느새 여기 올 때 비행기 유아석(infant seat)에 누웠던 아들이 12살이 되어가고, 우리의 결혼 햇수 또한 12년이 넘었으니까.. 그 시간 동안 10년을 우린 이곳에서 보낸 셈이다. 새삼스레 그 짧지 않은 그 시간들을 되새김질하고 싶어진 것은 둘중에 먼저 공부를 끝낸 남편이 한 주립대학에 자리를 잡게 되면서..이제사 여기서 보낸 시간들을 조금은 여유로운 웃음으로 떠올리고 싶다는 마음의 여유에서 일게다. 몇푼 안 되는 돈 달랑 들고 그것도 혼자가 아니라 둘다 공부하겠다는 말그대로 똥배짱하나로 시작했던 남의 나라땅 살이...그 시간동안 겪었던...이런 저런 고비들이 많았기에..하여 주머니가 넉넉하다고 해서 유학하는 것만은 절대 아니라는 것을 유학을 꿈꾸지만 현실에 묶여 저지르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얘기해주고 싶기도 해서. 물론 그 길이 쉽지 않다는 것도 함께. 돈이 있으면 에둘러가지 않고 가로 질러 갈 수 있는 빠른 길이 있음에도 턱없이 가벼운 주머니덕에 한참은 돌아 가야 했던...마냥 더디게만 여겨졌던 거북이 걸음이긴 해도.. 끝을 보겠다는 뜻만 접지 않는다면.. 결국은 할 수 있다고 얘기하고 싶어서다. 그리고 그 길에서 만났던 소중한 인연들도 함께 되새기고 싶은 맘에 그냥 끄적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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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말렸었다. 형편도 안되는 우리가 여유있는 사람들이나 갈법한 유학이란 걸 간다고하니까. 그냥 저렇게 맘으로 꿈꾸다 말겠지 하는 주변의 반응에 은근히 오기가 동하기도 했다. 돈있는 사람만 유학하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자는....그런 오기말이다. 허긴 누가 봐도 '맨땅에 헤딩하기'가 따로 없긴 했다. 자식의 유학자금을 보태줄 만한 형편이 안 되는 건 시집이나 친정이나 다르지 않았으니 양가에 기대할 뭣도 없는데다 설사 있다 해도 서른 중반을 바라보는 늦은 나이에 우리만 잘 살아보겠다고 연로하신 부모님들을 두고 떠나야 하는 철없는 짓을 저지르는 주제들인터라 그런 도움은 아예 애초부터 꿈도 꾸지 않았다. 허나 그런 고집과는 달리 우리가 힘들 때 어찌 아시고 얄팍한 당신들의 주머니에서 건네주신 쌈짓 돈을 염치없이 몇번 받긴 했지만. 그래도 적어도 떠날 때 우리 맘은 그랬었다.

무조건 벌리고 보자는 식의 이몸하고는 달리 돌다리를 건너기전에 여기 저기 두들겨봐야 하는 돌다리파인 남편은 과연 우리가 잘 하는 짓인지..간다고 해도 끝까지 해낼 수 있을지..하는 우려를 비행기가 뜨기전까지 접지 못했다. 지금 되돌이켜 생각해봐도 그건 말 그대로 똥.배.짱이었다. 게다가  우리의 실력이 유학에 성공했다고 수기를 쓴 누구 누구처럼 출중하야 장학금을 받을 주제도 못 되었으니까.  주머니도 얄팍하기 그지없고 그렇다고 실력까지 내세울 뭣도 없는 우리가 과연 남들처럼 고생끝에 온다는 그 '복'(?)을 볼 수 있을까 싶은 걱정이 어찌 전혀 없었겠는가. 기실 그렇게 주제파악하고 그만 접자는 맘이 고개를 들어 하루에 열두번 내 속을 휘저어대곤 했었다. 그럴 때마다 과감하게(!) 접지 못했던 건..그렇다고 유학을 꿈꾸지 못하지 말란 법은 없잖은가..하는 발끈함이었고..무엇보다  결혼 전부터 키워온 꿈인데..결혼했으니 혼자가 아니라 둘이라 서로 힘 보태주면 혼자일 때보다 더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가서 부딪혀보지도 않고.. 부딪혀서 머리가 깨지기도 전에... 미리 깨질 것을 걱정해 이대로 접는다면 나중에 후.회. 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남은 시간동안 누구 누구탓을 하면서 살고 싶은 맘은 전혀 없었으니까.

허긴 오기 전에 주변상황이 많이 꼬이긴 했었다. 이러다 못 가고 주저 앉는거 아닌가..싶을 만큼. 그럼 그렇지..우리 형편에 무슨 유학이었냐.. 헛꿈을 한번 꾼거라치고 접고 싶을 만큼. 시아버님께서 뇌졸중으로 쓰러지셔서 중환자실에 누워 계셨고 친정어머니도 뱃속에 무슨 혹이 생긴 듯 하다고 하셔서 여기 저기 병원을 찾아다니며 검사를 받으러 다니시는 마당에..자식된 도리로 어떻게 떠날 수 있었겠냐고 그때 처지를 핑계삼아 눌러 앉을 수도 있었다. 해서 이러 저러 해서 못 갔노라고..내 탓에다 처지 탓을 하면서 미쳐 가지 못한 길에 대한 미련을 곱씹으며 살았을 게다. 허나 그렇게 밖에서 기웃거리면서 막연히 힘들거라고 못 해낼 거라고 접기 보다는 일단 어떻게 해서라도 그 안으로 머릴 들이밀고 시작하면 그 안에 다 방법이 있을거라는 맘에 그런 상황들이 나아지길 기다렸고 시아버님이 퇴원하셔서 집에 돌아오시고 친정어머니의 진찰결과도 나쁘지 않게 되면서 놓았단 마음을 다 잡고 천천히 구체화시켰다. 그렇게 오랫동안 별러왔던 계획을 그렇게 그냥 주저 앉히기에는 억울해서 결국 그래, 일단 가보자...가서 해보는 데까지 해보자..나중에 후회하지 않을 정도까지만 해보는거다..그래도 안 되면 깨끗하게  포기하고 짐싸서 오는거다...라고 맘 굳게 먹고 말이다. 얼핏보면 이 무모해보일 우리의 계획은 우리의 남은 인생을 후회하면서 살지 않기 위해 행동으로 옮겨졌다. 그 과정에서 이몸보다 생각이 많아 이것 저것 맘에 걸려하던 남편도 나랑 같은 맘으로.. 

난 남의 나라에서 공부하고 싶어하는 유학의 꿈이 허영기 섞인 꿈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대학원에 들어가면서부터 언제 한번 제.대.로. 공부를 계속하고 싶다는 맘을 품었다. 내 이 야무진 꿈을 알면서도 가족이나 친구들은 결혼까지 했고 거기다 아들까지 낳은 내가 저렇게 그냥 꿈만 꾸다 접고 말겠지 했나 보다. 결혼한 지 이년만에 계획대로 떠난다고 했을 때..안 가는 줄 알았는데 결국 가긴 가네..라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던 걸 보면. 여하튼 출국시기는 대학원에서 영화공부를 시작한 남편의 석사과정이 끝난 다음으로 잡았다. 뒤늦은 결혼에다 유학까지 생각하고 있었던터라 내 계획에는 아이에 대한 부분이 없었지만 아이를 너무 좋아하는 남편의 뜻대로 난 결혼하자마자 아이를 갖었고 임신을 해서도 아들을 낳은 후에도 우리 둘은 최대한의 총알(유학자금을 우린 그렇게 얘기했다) 비축을 위해 과외에다 학원선생에다 리서치 파트타임에다 여기 저기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분주하게 뛰어 다녔다. 말 그대로 발바닥에 땀나게 말이다. 허나 그렇게 땀흘린 것에 비해 우리의 총알은 계획한 만큼 늘어나지 않았다. 그건 우리 벌이의 대부분이 생활비로 빠져 나갔기에 어느 세월에...하는 한탄이 절로 나왔다. 그렇게 일년 반을 뛰어다니다 남편의 졸업작품을 찍을 즈음에 시댁으로 들어가 6개월정도를 살면서 유학을 구체적으로 준비했다. 이천만원 좀 넘는 전셋돈에서 졸업작품을 찍는데 드는 비용을 빼고 난 나머지 돈에다 조금이라도 더 보태서 유학살이에서 적어도 일년은 버틸만한 총알을 갖고 떠나고 싶었지만 우리의 계획과는 달리 오히려 알량한 총알은 자꾸 줄어들어만 갔다. 하여 총알확보되기를 기다린답시고 이렇게 미루다보면 점점 늦어져서 어쩌면 아예 접게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끝에 우린 애초 계획대로 남편이 대학원을 졸업하고 난 그 해 여름(1999년)에 저질렀다.. 사천불(4백만원)이라는 말도 안되는 돈을 들고.

유학준비도 유학원도 도움없이 혼자서 했다. 이런 저런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토플이랑 지알이 공부는 손에서 놓지 않았고 유학원을 통해서 하면 거의 백만원 넘게 든다는 학교 지원이나 비자 인터뷰에 필요한 서류등은 인터넷에서 얻은 자료들 덕에 혼자 준비했다. 이때는 우리것 뿐만 아니라 우리랑 같이 공부하러 가겠다고 따라 나선 한 동생 것까지 같이 준비해주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가장 큰 골칫거리는 비자인터뷰때 재정증명으로 들이밀어야 하는 통장잔고 만들기였다. 친구들한테 부탁해서 여기 저기 돈을 끌어 모아 입금시켜 비자 인터뷰에서 거절당하지 않을 만큼의 금액을 만들어 잔고증명을 띠었다. 물론 그 증명서만 떼고 나서 빌린 돈들은 모두 쥔장들한테 돌려주었지만 잠깐동안이나마 적쟎은 돈을 선뜻 내준 친구들한테 고마울 따름이다. 학교는 대학원 동기가 먼저 가서 공부하고 있는 학교로 결정했다. 다른 주립대학교에 비해 학비도 저렴했고 남편과 내가 공부하고 싶은 분야가 둘다 있고, 부부중에 한명이 조교(assistanship)을 하면 그 배우자의 학비를 삼분지 일정도 감면받을 수 있고,아들도 3살이 넘으면 무료로 학교(pre-school: 유치원의 이전과정)에 들어갈 수 있다는..기타 등등의 제반 조건등이 우리의 처지에 들어맞는.

마지막 결정은 우리 둘중에 누가 배우자 비자(F2 visa)를 하느냐 였다. 그건 둘다 학생비자(F1 visa)로 들어가면 미국내 합법적인 체류를 위해 외국학생이 최소한의 3과목(9학점)을 들어야 하는 풀타임 학생이기에 학비도 문제려니와 그 당시 두살이 채 안되는 아들내미를 둘중 하나가 돌봐야 하기에..둘다 학생비자(F1)로 공부할 형편은 못 된다는 생각에 우린 둘이 머릴 맞대고 고민했다. 지금은 이민법(immigration law)이 바뀌어서 배우자 비자(F2)로 공부할 수 없지만 그때만 해도 배우자 비자를 갖고 있으면 풀타임(full time)이 아니라 파트 타임(part time)으로 공부할 수 있었던터라 영어공부를 손에 놓지 않았던 내가 오기 직전까지 단편영화 만든다고 작업에만 매달린 남편보다는 영어적응을 위한 시간에 여유가 있다 싶어 입학을 연기하고 아들내미를 돌보기로 했다. 게다가 학교조교 자리를 얻는데 꼭 필요하다는 컴퓨터 다루는 기술들은 기계치인 나보다 남편이 훨씬 낫기에...더군다나 남편을 배우자비자(F2)로 신청하면 비자인터뷰에서 퇴짜(reject)당할 확률이 훨씬 높다는 근거없으나 그럴듯한 소문을 들었던 터라 우린 남편을 풀타임학생인 학생(F1)로 신청한 비자인터뷰를 했다. 지나고 나서 하는 얘기지만 많이 부실한 재정증명에도 혹시나 하는 맘에 잔뜩 긴장하게 했던 비자 인터뷰는 몇가지의 질문으로 싱겁게 끝났고 결국 우리는 1999년 7월 9일에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20개월 된 아들을 infant seat에 앉히고.. 아니 눕히고.

오랫동안 지켜봐온 이몸의 고집을 아는터라 맘으로나마 걱정을 곁들여 격려해준 친정식구들에 비해 시댁 어른들은 우리의 유학을 마뜩찮아 하셨다. 안되는 형편에 저렇게 무릴 해가면서까지 가야 하나 싶으셨던게다. 이곳에 와서 남편이 아르바이트로 이런 저런 힘든 일을 한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그러셨을게다. 이몸만 아니었으면 한국에서 고생 안 하고 잘 살고 있었을 아들이 남의 나라땅에서 그렇게 고생을 한다고. 애초 여기 올 때 고생을 각오하고 떠나는 우리한테 시부모님께서는 20개월짜리 아들내미를 당신들 곁에 두고 가라고 하셨었다. 돈없이 남의 나라 살이를 살러가니 아들내미까지 돌보려면 어려울거라시면서. 남편도 그러자고 했다. 허나 고생을 해도 같이 해야 한다고, 3살만 되면 그곳에서 학교에 갈 수 있다니까 그때까지 내가 돌보면 된다고 내가 우겨서 같이 데리고 왔다. 그런 내 고집스런 결정은 우리 힘든 미국생활내내 참 잘 한 짓이다 싶을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만일 한국에 두고 왔다면 아들내미 보고 싶어 힘들 때 한국으로 날아갔을 지도 모른다.  우리 곁에 그 아들이 있었기에 힘이 되고 힘들어도 웃을 수 있었던 순간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알기에...

그렇게 가족과 친구들의 걱정어린 시선을 받으면서 비행기에 올랐다..그게 10년전이다. 오는 가는 동안, 예민해서 걱정했던 아들은 긴장한 아빠 엄마 맘을 알기나 하는 양 칭얼대거나 보채지도 않고 유아석(infant seat)에서 아주 곤히 잠만 잤고 남편과 난 앞으로 닥칠 새로운 경험들에 대한 설레임과 두려움으로 서로의 손을 꼭 잡았었다. 누구말대로 맨땅에 해딩이라는 걸 시작하려니 그럴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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