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 말대로 진짜 몇푼 안 되는 돈 달랑 들고 '대책없이' 유학이란 걸 떠나 왔을 때...잘 갔다 오라는 지인들의 격려 뒤에 숨은.. 과연 쟤네가 잘 해내고 올까.. 하는 걱정반 호기심 반 섞인 그들의 마음들을 모르지 않았었다. 허긴 그럴만도 할만큼 우리의 형편은 넉넉하지 않았으니까.

전세자금에서 남편 졸업작품 영화 찍고 남은 돈 달랑 들고 이곳에 왔을 때...우린 공부 다 마치기 전엔 한국에 돌아가지 않겠다는 맘이었다. 만에 하나 조교자리가 없으면 '뭐라도' 한다 굳게 맘먹고 왔으니까. 그런 우리한테 제대로 된 가구나 살림 살이를 돈주고 산다는건  거의 '사치'로 여겨졌었다.

처음 공부를 시작한 동네는 미국 중서부 일리노이주에 있는 시골 주립대학이었다. 거기 도착했던 첫날이 기억난다. 배정받은 학교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무것도 없었던 공간. 아니 그나마 다행스러웠던 건 대부분의 학교 아파트엔 다 있다는 냉장고와 조리해 먹을 수 있는 오븐이 갖춰져 있다는 지금 생각하면 참 당연한 것들인데 우린 그것만으로도 감사해했었다. 그것말고는 카펫도 안 깔린 휭한 거실 맨바닥에 아무 것도 없던 우린 며칠동안을 그렇게 차가운 바닥에 앉아 라면박스를 엎어 밥상으로 삼고 그 위에서 밥을 먹었다. 엠티온것마냥 들떠하면서 말이다.  

더군다나 운이 좋았던 건 그 즈음에 공부 다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한 가족이 있어 그분들이 쓰시던 카펫, TV, 소파, 부엌 살림살이 등을 공짜로 얻을 수 있었다는거다. 그렇게 살림을 물려주는 그림은 유학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어차피 공부하러 잠시 머무는 뜨내기 삶들인지라 그렇게 서로 도와주고 도움을 받는게. 비록 오래 쓰시던 물건들이라 대부분이 많이 낡긴 했었지만..한국서 갖고 온 압력밥솥이랑 우리 세식구 수저랑 밥그릇이 전부였던 우리한테 그분들이 넘겨주고 간 살림살이는 한동안 너무 유용했음은 물론이다. 해서 그분들한테 감사한 마음을 늘 갖고 있던 우린 그분들이 공부하시면서 몸담고 계시던 한국 교회 식구들중에 아이가 있는 한집을 택해서 우리 아들이 작아서 못 입지만 그래도 쓸만한 옷가지들을 챙겨 주는 것으로 그때 받았던 고마운 맘을 표현했지만 정작 그 옷들을 드린 분들에게 이런 우리의 속내를 얘기한 적이 별로 없던터라 철이 바뀔 때마다 훌쩍 훌쩍 크는 아들의 옷들중에 입을 만한 것들을 챙겨서 갖다 드리는 이유를 그분들은 모르셨을게다. 

그곳은 풍족하지 않은 유학생들끼리 모여사는 곳이라 누가 이사를 가거나 한국에 들어갈 때 쓰던 살림살이나 가구들을 남은 이들한테 물려주거나 헐값에 팔곤 한다. 물론 가난한 학생들만 있지는 않다. 형편이 되서 좋은 가구 놓고 살다가 한국에 들어갈 때 다 싣고 가는 이들도 있으니까. 만일 쓸만한 살림인데 마땅히 줄 상대가 없을 때엔 쓰레기통옆에다 슬쩍 내다놓으면  필요한 누군가가 들고 가곤 한다. 지금이야 웬만한 것들은 다 있는데도 가끔 쓰레기통 옆을 지나칠라치면 주변에 나와있는 가구들을..굳이 필요하지도 않으면서.. 습관적으로 살펴보는 버릇은 여전하다. 그건 아마도 첫해 산책을 핑계로 열심히 동네 한바퀴를 돌아다니며 쓸만한 물건들이 나와있지 않나 탐색하던 그때의 버릇탓이다. 물론 제대로 된 물건을 찾는게 쉽진 않지만..그래도 운좋으면 제법 쓸만한 것들을 주워 쓸 수 있었다.  한국에서 살았다면 이런 융통성(?)은 생각하지도 못 했을게다. 그게 다 거기서 배운 살아가는 방법이다.

우리가 그곳에서 돈을 주고 산 것 물건중에 제일 비싼 품목이 바로 '침대'다. 지금도 아주 잘 쓰고 있는. 그곳에 도착한 첫날 우리를 마중왔던 후배, 우리보다 그곳에 4년정도 먼저 와서 공부하고 있던, 다른 건 몰라도 침대는 괜찮은 걸 사야 한다는 그 후배의 충고대로 그때 거금 400불 가까이 주고 장만한 게 침대였으니까. 그게 500불 주고 넘겨받은 중고 자동차 다음으로 가장 큰돈(?)을 주고 산 살림이였다. 

초창기, 우리 세식구는 살림살이를 장만하러 틈틈이 동네 야드세일(Yard Sale)을 찾아다녔었다. 그덕에 두살배기였던 아들의 장난감이랑 비디오 테잎이나  마이크로 웨이브, 수납장, 의자같은 살림살이들을 아주 헐값에 장만할 수 있었다. Yard Sale을 그렇게 부지런히 찾아다닌 것은 물건 사는 재미보다도 기실 이네들이 판다고 내놓은 이런 저런 물건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던 탓도 있다. 처음엔 차가 없었던 관계로 주변 아는 사람들, 특히 후배한테 적쟎은 민폐를 끼치긴 했지만...그 재미로 아침마다 부지런을 떨면서 찾아 다녔었다. 아침에 일찍 가야 그나마 살 물건도 구경할 물건도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는 한동안 야드세일 대신 Good Will이라는 중고품 가게를 자주 갔었다. 대부분 개인들의 기부(Donation)한 물건들을 깨끗하게 정리해서 팔던. 우린 그곳의 단골이었다.

8년을 그곳에서 지내는 동안 참으로 많은 지인들이 우리 곁을 떠났다. 몇몇은 졸업후 직장을 잡거나 다른 주에서 남은 공부를 계속한다고 다른 주로 떠나거나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그네들은 떠나면서 우리집 공간엔 그들이 넘겨주고 간 살람살이들이 하나 둘 채워져갔다. 해서 그곳을 떠나올 때 즈음 휭하니 텅 비어있던 우리집은 그네들이 남기곤 간 것들과 우리가 야금 야금 사들인 살림살이들로 꽉 채워져 있었다. 그런 살림들에 우리는 또 다른 '소중한' 의미를 갖고 있다. 그곳에서 생활하는 동안 맺었던 소중한 인연들을 떠올리게 하는 '매개'로써 말이다.  

한동안 유용하게 썼던 허나 몇년 후에 폐차장으로 보내졌던 니싼 스포츠 차, 아들이 좋아하던 감았다가 떴다 하던 라이트가 달린 그 차랑 의자, 라운드 테이블, 서랍장은 먼저 한국으로 들어간, 지금은 모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후배들을 떠올리게 하고

TV, VTR, 철제 수납서랍은 락을 좋아하는 남편과 절친했던 동생을, 아들이 좋아하는 물감, 색연필등의 문방구, 책상, 스탠드, 의자는 일본 친구를, 장식장과 촛대는 지금 한국에서 강의 하고 있는 덩치좋은 미국 친구를, 책장이랑 하얀색 테이블, 예준이 눈썰매는 한국에서 결혼했다는 한 친구를, 세탁기, 빨래건조대, 부엌살림들은 우리 아랫집에 살던 부산내기 갑장 친구를, 식탁 테이블이랑 지금 깔고 있는 카펫, 플레이스테이션은 루지애나로 이사간 남편 선배 가족들을 , 식탁 의자, 밥통, 장식 선반, 그리고 여름에 펼쳐놓곤 하던 커다란 파라솔(?)은 금속공예가 전공이던 예술쟁이 부부를, 컴퓨터와 아들이 좋아하는 파워레인저가 그려진 큰 타올은 별명이 우리집 딸이라는 씩씩한 처자를, 아들 공부하는 책상이랑 소파는 지금도 우리곁에 있는 두딸을 키우고 있는 씩씩한 젊은 엄마를, 거실에 있는 또 하나의 체크 무늬 소파랑 오디오는 엘에로 이사가 결혼한 한 커플을, 그리고 지금은 한 아기의 아빠 엄마가  된 친구들은 우리집 낡은 TV 장식장을 업그레이드 시켜놓고  한국으로 돌아갔다.

이들 대부분은 언젠가..한국에 돌아가면 결국 만나야 할.. 여기서 맺은 소중한 인연들이다. 그네들이 남기고 떠난 물건들에 눈길이 머물 때마다.. 자연스럽게 누군가를 그리고 여기서 함께 했던 즐거운 혹은 마음 아팠던 순간들까지 딸려 생각나게 한다.  주머니는 비록 얄팍하지만 그런 소중한 인연들이 많아 마음은 늘 부자라고 얘기하는 남편말 처럼 가난한 유학생이기에 겪게 되는 흔치 않은..따스한 경험임엔 분명하다. 먼후일에도....이런 그림들은 선명하게 우리의 추억속에 남겨져 있을게다. 해서 이곳을 떠올릴 때마다 꺼낼 법한... 따뜻한 추억거리들이 배어있는 그 물건들도 같이 떠오를터이니.... 참으로 남다른 경험이잖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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