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남의 나라에 떨어진 우리 세식구를 구원해주러 온 이들은 먼저 와서 터를 잡고 공부하고 있던 대학원 동생이랑 남편의 고등학교 후배였다. 넉넉한 밴까지 빌려 공항으로 마중을 와 주었다..고맙게도. 목적지로 향하는 차창으로 처음 보게 된 도시는 미국 중서부에 있는 세인트루이스라는 도시였다. 왕년엔 10대 도시로 꼽힐만큼 번창했다는 그 도시였다는. 허나 첫 느낌은 오래된 건물들탓일까 기울어져가는 듯한 회색이었다고 기억된다. 비행기에서 얌전하게 와주었던 두살배기 아들이 한번 터뜨린 울음은 그런 낯선 느낌 탓인지 오는 내내 쉽게 가라앉지 않아 우리의 진땀을 빼게 했었다. 대학원 동생이야 우리를 그곳 학교로 정하게 된 이유중에 하나였을 만큼 서로 다 아는 처지니 굳이 인사를 챙기는 건 새삼스러운 일이었지만 우리는 그곳에 도착해서야 남편 일년 고등학교 후배의 존재를 알았기에 고맙다고 했을 때 그 친구가 했던 말이 기억난다. 그렇게 고마워하지 않으셔도 되요...하던. 왜냐하면 그곳에 살다보면 처음에 이렇게 지게 된 신세들은 도움을 받은 이들한테 갚는 게 아니라 앞으로 새로 올 누군가를 마중하러 공항 나가거나 그네들한테 이런 저런 도움을 주면서 갚게 되더라는. 우리의 첫날밤은 대학원 동생집에서 묵었다. 너무 울어대서 피곤했을 아들은 곯아 떨어졌지만 시차가 적응이 덜 된 남편과 나는 새벽에 주변을 한 바퀴 둘러봤다. 우리가 맞이하는 첫날 아침을 기억하기 위해.
다음날 우리는 동생이 미리 등록을 해놓았다는 가족 기숙사에서 짐을 풀었다. 결혼한 기혼 학생가족들만 살수 있다는 그 곳은 학교에서 십여분 떨어져 있었다. 스무 다섯평 남짓한 크기에 두개 혹은 세개짜리 방에다, 거실 그리고 냉장고랑 오븐이 갖춰져있는 부엌을 갖추고 있는 우리가 기대했던 그 이상의 넓은 공간이었다. 지은 지 아주 오래 되어 낡았다고는 하지만 관리를 잘 한 탓인지 비교적 깨끗했고, 무엇보다 우리 셋을 들뜨게 했던 베란다 문만 열면 볼 수 있는 넓은 초록색 잔디 공간이었다. 시멘트바닥에 익숙해 그런 녹지공간에 목말라 있던 서울토박이 우리가족은 도착한 며칠 동안 한껏 들떠 주변의 잔디를 밟고 다녔다. 아들과 남편은 해질 무렵 여기 저기 빛을 발하면서 풀밭을 뒤덮는 반딧불 꽁무니의 불빛을 따라 다녔고 사람이 가까이 가도 도망칠 생각을 안 하는 간 큰 다람쥐를 쫓아다니면서 우리는 그렇게 틈만나면 아들내미의 손을 잡고 기숙사 근처를 어슬렁 거리며 배회(!)하고 다녔다. 제일 맘에 들었던 건 기숙사 오분거리에 서울 같았으면 적어도 한두시간은 꼬박 차로 밟아야 볼 수 있음직한 제법 큰 호수를 끼고 있는 공원이었다. 거기에 가면 광릉수목원에서나 볼 수 있음직한 쭉쭉 뻣은 나무들로 눈이 시원했고 아이들 놀이터도 있어 처음 한동안은 저녁만 먹으면 아들내미의 손을 잡고 그 공원을 몇바퀴 돌면서 만나게 되는 다람쥐나 오리, 운좋은 날 만나게 되는 사슴등을 구경하면서 신선한 공기를 맘껏 들이켜댔었다. 허나 그렇게 여유부리며 산책을 하는 횟수는 바쁘게 돌아가는 학교 생활로 인해 점점 줄어들었고 요즘 같아선 마지막으로 거길 걸었던게 언제였나 싶을 만큼 발길이 뜸해졌다.
예상은 했지만 여기도 사람살이라...아무리 대충산다고 해도 필요한 살림들을 마련해야 했다. 그런 비용을 최소화하겠다고 한국에서 부터 압력밥솥이랑 밥그릇 두개, 수저두쌍, 당분간 먹을 쌀, 거기다 친정엄마 가 챙겨주신 통마늘꾸러미까지...무게가 되는 한 꾸역 꾸역 담아 온 살림들은 초반에 살림장만하는데 드는 돈을 줄일 수 있어 아주 요긴했으며 결혼할 때 장만했던 압력밥솥은 이제 십년이 넘어 낡긴 했지만 여전히 유용하게 잘 쓰고 있다. 생각난다. 가족 기숙사 집을 지정받아 들어온 첫 날...아무것도 없는 텅빈 공간에서 우린 밥상 대신 라면 박스를 엎어 놓고 그 위에서 밥이랑 간단한 저녁을 먹었고 침대가 없어 맨바닥에 후배가 챙겨다 준 이불을 깔고 잤던게. 남편말대로 MT라도 온 그런 기분으로. 그랬던 텅빈 공간이 이제는 들고 나는 지인들이 주고 간 가구들로 꽉차있다. 언젠가 여기다 끄적거린 적이 있듯이 그런 가구들은 여기서 맺은 인연을 떠올리는 매개이기도 하다. 컴퓨터 책상을 보면 일본으로 돌아간 나나라는 친구를 떠올리게 하고 식탁테이블은 루지애나로 간 남편 선배 부부를 떠올리게 하고 책꽂이는 한국으로 돌아간 친하게 지낸 머슴아를, 티브이장식장은 대전으로 돌아가 자리를 잡은 한 커플을.....그렇게 가구를 한번 훑는 것만으로도 8년동안 맺은 인연들과 같이 했던 시간들을 추억할 수 있으니 새로 산 가구들보다 훨씬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우리집에서 여기 와서 처음으로 거금(!)을 주고 장만한 유일한 물건이 침대다. 여기서 만난 남편 고등학교 후배가 침대만은 허리건강을 위해 제대로 된 것을 써야 한다고 하기에 침대를 400불넘게 장만했고 그 나머지 살림들은 아주 다양한 경로로 구해져서 우리집 공간을 채우기 시작했다. 운 좋게도 때 마침 공부를 마치고 한국으로 들어가시는 한국분들한테 티브이랑 소파를 물려받거나, 가을에 자주 열린다는 야드세일(yard sale)을 쫓아다니면서 필요한 물건들을 하나 하나 장만했다. 허니 내 생각엔 유학자금이 빠듯하다면 굳이 처음부터 가구들을 다 들여놓을려고 무리를 할 필요가 없다 싶다. 살다보면 이렇게 저렇게 필요한 물건을 얻거나 싸게 장만할 수 있다는 점에서. 쓰던 거라고 하긴 하지만 아주 쓸만한 수준의 물건들을 얻을 수 있으니까 서두를 필요가 없다 이말이다. 우리가 살림을 장만한 방법중에 가장 재밌었던 것은 여기 가족 기숙사 쓰레기통옆에 나와있는 물건들을 주워 오는 거였다. 여기 학교 가족 기숙사에서 사는 대부분이 우리처럼 살림이 빠듯한 외국학생들이 많은지라 이사갈 때 혹은 살림을 업데이트할 때 그들은 자기네가 쓰던 가구나 물건들을 무빙세일(moving sale)을 통해 아주 헐값으로 처분하기도 하고 필요한 누군가를 위해 쓰레기통 옆에다 얌전히 내다 놓곤 해서 우린 그 이름모를 이웃들덕을 톡톡히 봤고 우리 역시 쓰던 물건들을 쓰레기통옆에다 내다놓으면 얼마 안 있어 필요한 누군가가 그 물건들을 가져간다. 그 누군가가 대부분이 중국학생들이 대부분이다. 우린 얼마 전 까지만 해도 해가 질 무렵 저녁 산책길에 오며 갈라치면 남의 쓰레통 근처를 탐사(?)하는 버릇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지난달인가...건너편 쓰레기통에 누군가 내다놓은 멀쩡한 식탁이 지금 우리 뒷마당에 놓여져 아주 확실하게 재활용되고 있다. 누구말에 의하면 이동네에서 우리처럼 '야드세일'에 성공한 집도 없다고 한다. 우리돈 시세로 하면 천원 이천원에 제법 물건같은 물건들을 집어오는 재주가 남다르고 해서 그러는게다. 기실 야드세일은 우리가 뭘 사고 싶어 찾는 경우고 있지만 미국사람들이 쓰다가 내놓은 물건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여간 쏠쏠한게 아니다. 물론 진짜 새 물건들을 아주 헐값에 내놓는 이가 있는가 하면 아주 가끔이긴 해도 새것을 사는게 차라리 나을 성싶을 만큼 턱도 안되는 가격을 요구하는 얌체들도 있다.
미국에 오면 필수품이라는 자동차 얘기를 해볼까. 미국사정을 모르는 시어른께서 그러셨단다. 장보고 쇼핑하는데 무슨 자가용이 필요하냐고..말이다. 차없이도 학교는 다닐 수 있다. 한시간에 두번씩 있는 학교 캠퍼스를 도는 셔틀버스가 있으니까. 허나 장을 보고 쇼핑을 하는 경우에 월마트나 크로거등 다운타운을 도는 한시간에 한번 있는 셔틀버스를 이용하면 장을 보는데 두 세시간을 써야했고 무거운 것들을 들고 버스를 오르 내리기란 쉽지 않았다. 그렇게 우린 차없이 일년반을 버텼다. 달랑 우리 둘만 있는 것도 아니고 세살배기 아들내미를 데리고 그렇게 차 없이 버틸 수 있다는게 여기 사람들은 안다...쉽지 않다는 것을. 해서 주변 분들의 도움이 컸다. 누구보다 여기 먼저 와서 공부를 하고 있던 학교 동기랑 여기서 만나게 된 남편의 고등학교 후배가 필요할 때마다 차를 태워줬다. 제일 많이 도움을 받았던 건 처음 여기 저기서 살림장만을 할 때도 그렇고 은행구좌열고 전화신청하고 학교 등록같은 볼일을 볼 때마다 우리를 도와줬다. 그렇게 받았던 도움들이 너무 고마워서 사는게 조금씩 여유가 있어지면서 우린 가급적이면 이곳에 처음 정착하는 분들한테 도움을 드릴려고 한다. 우리만 그럴까...다들 처음 와서 받은 은혜들을 그렇게 갚는다..우리가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처음 오는 분들한테 차를 태워드리고 쓰던 물건들을 드리고 하면서. 남편 후배가 고마워하는 우리한테 그랬었다. 자기도 처음에 도움 많이 받았다고...다음에 우리도 처음 오는 분들을 자기처럼 도와주게 될거라고..여기서는 그렇게 서로 도와주고 도움받고 하면서 살게 된다고 말이다.
사람사는 곳은 어디나 마찬가지리라...배짱을 부려 떠나오긴 했지만 부딪혀보기전에 갖었던 새로운 생활과 학업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걱정거리들이 여기서 하루 하루를 보낼수록 조금씩 조금씩 무게가 덜해져갔고..궁하면 통한다...는 말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있으면 있는대로 살기 마련이라는 걸 새삼 남의 나라 땅 살이에서 절감 또 절감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