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기전에 예상은 했었다. 한국서 유학준비를 하는 동안 아무리 토플이나 지알이같이 학교 지원에 필요한 영어점수가 웬만큼 된다 해도 막상 가서 살면서 공부하는 동안 부딪히게 될 일상적인 의사소통에서 영어가 우리의 발목을 수시로 잡아챌 것이라는 것을. 그덕에 얼마나 많은 좌절감을 맛보게 될 것이라는 것 정도는 굳이 미국땅에 가지 않아도 여기 저기에 줏어들은 충분한 경험담들 덕에. 더군다나 남편이나 나나 조동사 뒤에는 동사원형이 와야 하고 사형식 문장에 오는 동사는 수여동사여야 한다는 식의 성문종합식 영어가 익숙한 오래된 세대인터라 자칫하면 주객이 전도되어 영어가 공부를 하기 위한 수단(way)이 아닌 목적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했었더랬다.

남의 나라 땅에서 살면서 우리처럼 영어때문에 쓴맛을 겪어 본 이가 어디 한둘이랴. 이미 다 아는 것들인데도 영어문장으로 입밖으로 내보기가 쉽지 않아 말들이 혀끝에서 빙빙돌기만 하는 그 답답함을 느껴본 이가 우리뿐이랴. 지금 생각해보면 오히려 여기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그래도 내깐에는 한국에서 아르바이트로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는 그 가락하나 믿고 어줍잖은 관광객 수준의 영어를 떠들어댔던 적이 있었다. 그땐 참 용감했었다. 지금보다는 적어도. 헌데 여기서 살아온 세월이 한해 두해 보태지면서 깨닫게 된다. 그 뒤로 보낸 시간에 비례해서 상승곡선을 그리며 유창해질 줄 기대했던 우리 아니 정확하게 얘기하면 내 영어실력이 그 처음에 떠들어대던 영어 수준에서 그리 많이 나아지지 못했다는 것을. 해서인지..언젠가부터 누군가가 미국 오신 지 얼마나 되냐고 물으면 대답 대신 그냥 씨익 웃고 만다... 그건 묻는 사람들의 대개가 여기서 산 짠밥만큼이나 영어를 잘 할거라고 기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물론 여기서 보낸 세월이 전혀 꽁은 아니다. 그렇게 처음에는 혀끝에서만 뱅뱅 돌 뿐 내뱉지 못하고 삼켰던 말들을 그래도 오랜 짠밥덕에 그런대로 주섬 주섬 얘기를 해대기도 하고, 수업 듣는데 백프로까지는 아니더라도 뭔말을 하는지 알 만큼은 들리기에 하는 소리다. 정확하게 얘기하면 상대방이 말 하는 것을 이해하는데는 영어실력과 함께 요구되는게 '눈치'다. 오래 산 만큼 비례해서 느는 건 그런 '눈치'다. 미쳐 작은 것 까지는 다 알아듣지 못한다고 해도 상대방이 무슨 얘길하는지 예상할 수 있으니 답답한 신세는 면한 셈이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누군가가 자동차 접촉사고가 났을 때 제일 먼저 자신의 차가 얼만큼 잘 못 되었고 얼마나 다쳤는가 보다 그걸 경찰이나 상대방에게 영어로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하는 걱정부터 앞 선다는 말에 고개를 주억 주억할 만큼 공감에 또 공감하게 되는 걸 보면 아직은 내 나랏말처럼 입에 귀에 착착 달라붙지 않고 귀랑 입이랑 머리랑 여전히 따로 놀면서 엉키는 수준인 셈이다.   

영어랑 관련된 웃지 못할 해프닝들은 남의 나라 살이를 하는 이들이 그렇듯이 나 역시 몇박 몇일로 엮어낼 만큼 소소하게 많긴 하다. 그 중에서 기억나는 몇가질 끄집어 내자면 처음으로 대한항공을 타고 미국땅에 도착해서 미국내 비행기로 갈아타려고 들렸던 LA 공항내에서 겪은 충격이었다. 때를 놓쳐서 우리 셋다 많이 배가 고팠기에 한끼 때울 요량으로 맥도널드에 들렸다. 남편이 주문한다고 간지 한참 지나서야 햄버거랑 감자튀김을 갖고 돌아온다. 줄 선 사람들 많지 않던데 늦었냐고 했더니 남편이 대뜸 헛웃음을 웃어대면서 하는 말이 "나..참나..너 그거 아냐. 여긴 포테이토가 아니라 프렌치 프라이즈란다..프렌치 프라이즈." 무슨 말인가 했더니 햄버거랑 같이 나오는 감자 튀김을 하나 더 시키려고 "포테이토"라고 주문을 했더니 맥도널드 점원들 반응이 니가 무슨 말을 하는 지 못 알아듣겠다는 얼굴로 다시 말해달라는 말만 몇번이나 반복해서 그렇지 않아도 영어에 약한 남편 무지 당황했단다. 그때 남편의 기분이 어땠는지 그날 이후로 수시로 공감할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 뻥뻥 터지기 시작했다. 특히 남편의 경우처럼 자기깐에는 자신있게 말했는데 상대방이 여영 못 알아듣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오면 대부분이 등에 식은땀이 나게 마련이다. 우린 대개가 그네들이 우리가 한말을 잘못 알아 들을 수 있다는 쪽보다는 혹시나 우리 발음이나 액센트가 틀렸나 싶어 뒤따라 나오는 목소리는 첨보다 더 자신없어 지고 발음은 더 어색해지기 마련이다. 그때 남편 역시 혹시나 이 간단한 단어조차도 자기의 발음이 틀린건가 싶어 "포테이토" 라는 단어에서 나올 수 있는 억양과 발음들을 이렇게 저렇게 바꿔대며 서너번 얘기해댔더니 그중 한명이 웃으면서 "오..프렌치 프라이즈.." 하더란다. 알고도 남는다. 그때 남편이 느꼈을 허탈감을.  

그 이후로 그런 류의 일들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자주 겪고 듣는다. 유감스럽게도 이 나라 사람들은 그렇게 남의 나라 사람들에 대해 배려할 줄을 모른다. 물론 대부분이 그렇다는 건 절대 아니다. 이런 얘기를 들으면 무지 억울해 할 만큼 우리 얘기에 귀를 기울이는 친절한 이들도 많긴 하다. 대체로 외국학생들하고 가깝게 지내는 미국 사람들은 안다. 다른 나라의 언어를 배우는게..특히 한국사람이나 일본사람들한테 모국어와 전혀 다른 문장구조로 되어있는 영어를 한다는게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해서 이들은 외국학생들의 발음이 정확하지 않다고 해도, 그네들의 낯선 억양에도 불구하고 귀를 기울이고 들어주며 대화를 주고 받는다. 헌데 앞에서 얘기했던 그런 류의 패스트 후드점에서 그런 일을 자주 당하게 된다는걸 보니 거기서 일하는 이들에 대한 편견이 저절로 생기게 된다. 대체 손님들이 주문할 수 있는 그 몇가지 안되는 빤한 메뉴들에서 상대방이 무슨 주문을 했는지 짐작하지 못하는 것 자체가 이해가 안 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렇게 외계의 언어로 떠들어대는 것처럼 영 못 알아들을 수준도 아니건만.  허긴 억양도 발음도 형편없을 우리말을 진땀흘려가며 하려고 애쓰는 외국인들이 기특해서 그들의 덜된 말이 끝날 때까지 들어주고 그 어려움을 이해하려는 자세가 되어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배려들을 그네들한테 기대하지 마라. 그렇게 우리가 미국땅에서 제일 먼저 받은 인상은 자기나라 말인 영어만 한다면 세계 어딜가도 불편함이 없을 이 나라 사람들이 버리지 못하고 있는 세계 공용어인 영어에 대한 턱없는 오만함이었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다.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들려고 조금만 귀를 기울이고 듣는다면 못 알아들을 말들이 과연 몇 개나 있겠는가. 더군다나 그 빤한 패스트후드점에서 말이다. 그건 순전히 태도나 마음가짐의 문제다. 내가 자꾸 패스트후드점을 얘기하는 건 학교 다니는 동안 제일 많이 부대낀 곳이기 때문이다. 어디 비단 패스트후드가게 뿐이랴.  예를 들어 우리 학교 학생회관에 있는 맥도널드에서 일하는 점원들중 몇명은 못 알아듣겠다는 자기들의 반응에 당황하는 외국학생들, 특히 아시안 학생들한테 때론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듯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걸 한두번 봤겠는가. 그러다 한번은 커피를 마시려고 물을 시키는 한 동양처자 뒤에 줄을 서있있다. 그때 주문을 받던 흑인 남자 종업원이 워터를 달라는 그 처자의 말에 "왓(what)?"이라고 다시 되묻는다. 아주 불친절한 반응에 그 처자의 목소리는 쏙 기어들어 가고 그런 처자를 종업원은 쳐다보고 있는 거다. 이런 상황을 지켜보던 내가 그 흑인 종업원에 태도에 더 열을 받아 오지랖넓게 나서서 물었다. 대체 그  간단한 '워터(water)'라는 단어를 어떻게 발음해야 못 알아들을 수 있는지..어떻게 그 빤한 메뉴에서 고른 워터를 듣고 니가 뭘 원하는지 영 모르겠다는 저런 얼굴을 할 수 있는지..이해가 되지 않아서 였다. 진짜로 얘가 무슨 말하는지 몰라서 그렇게 묻는거냐고..니네 메뉴에 워터라는 발음하고 헷갈릴 메뉴가 있냐고. 물론 나라고 제대로 된 영어로 따져댔겠는가. 열을 받으면 더 버벅대곤 하면서도 열받아서 묻는 내 태도에 질렸는지 그 종업원이 두말 않고 물 한컵을 갖다 주고는 내 뒤를 향해서서 넥스트(다음 손님을 향해)하고 소릴 지른다. 이건 결코 내 자랑이 아니다. 그건 내가 퍼부어댄 영어가 유창해서도 결코 아니고 그건 순전히 부끄러움을 타지 않는 내 아줌마 기질에 질려서 그리고 알아 듣고도 못 알아들은 척 하고 있는 걸 알고 있으니 할말이 없어서였을게다. 결국 아무 말 않고 물을 갖다 주는 모습에 오히려 그 동양처자 더 열받았을게다. 그렇다. 그 종업원은 못 알아들은게 아니고 못 알아들은 척 한게다. 그 처자는, 알고보니 일본처자, 그 이후로 가끔 학교에서 마주칠 때마다 우린 그때 일이 떠올라 웃으며 서로의 안부를 물을 정도로 안면을 트고 지냈다. 

그렇다고 이렇게 당당할 만큼 영어를 잘 하느냐...면 물론 그건 아니다. 영어를 잘 하는게 아니라 여기서 소수인종(minority)로 오래 살다 보면 그렇게 무시 받지 않으려는 기질들이 강해지는 것 같다. 아직 10년이 지났어도 내 발음은 여전히 조형기식 버젼에 더 가까운 정도니까. 영어에서 그나마 짠밥에 비례해서 많이 나아지는 건 '듣기' (listening)가 아닐까 싶다. 영어를 배우는건 타고난 성격하고도 같이 가는 듯 싶다..남편과 나를 보면. 나보다는 선천적으로 상대방의  말에 귀를 잘 기울이고 촘촘히 듣는 남편의 영어 듣기 실력은 성격 급하고 덜렁대느라 상대방 말을 대충 대충 듣는 이몸보다는 여기의 짠밥에 정비례한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으니 하는 말이다. 더군다나 영어 듣기연습에서 교과서로 간주되는 티브이 보는 걸 아주 즐겨하는 남편이다 보니 지금은 이네들이 하는 왠만한 말들이 귀에 들어온다고 하니 아직도 그 경지가 요원하기만 한 난 마냥 부러워할 뿐이다. 티브이 보는 걸 안 즐겨하는 대신 내가 택한 방법은 소설같은 읽을꺼리들을 손에 들고 소리내서 읽는거다. 그렇게 이네들의 표현들을 내 나름 잔뜩 혀에 버터를 바른 듯이 읽다 보면 이네들의 표현도 익혀질 거라는 게 희망사항이다. 허니 말하고 쓰는 건 몰라도 듣기 실력은 여전히 후달릴 수 밖에 없다. 내 이 형편없는 듣기 실력덕에 여기 온 초부터 남이 하는 말을 대충듣고 엉뚱한 데를 긁어대기는데 빛나는 활약상을 보인 적이 어디 한두번이랴. 다 얘기하면 그렇고 한가지만 얘기하자면, 미국 온지 첫해였다. 그땐 남편이 수업때문에 학교에 가고 세살짜리였던 아들내미하고 둘이 집에 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그것도 아주 문이 부서질만큼 세게...쾅쾅. 문을 여니 우리가 사는 아파트에서 일하는 아저씨들이 몇이 서있다. 그네들의 갑작스런 떼거리 방문에 이율몰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으니 그런다. 아니 내가 듣기로는 그랬단다. "buck control"이라고. 순간 당황했다. 뭐이..돈을 어케한다고. 해서 물었다. 왜 나한테 돈 어쩌구 하냐고. 했더니 아시안 아줌마의 동문서답에 할말을 잃은 아저씨들 할말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더니 아주 천천히 다시 얘기해준다. 벅스가 아니고 버그 콘트롤(bug control)이라고. 우리말로 하면 집안에 벌레약을 쳐준다는 거였는데 난 그 "bug"를 "buck"으로 잘못 알아듣고는 큰소리 친게다. 그때서야 제대로 알아듣고 한참을 웃어댔었다...나만. 그 아저씨들은 안 웃고. 잘 모르면 가만히 있는게 중간에라도 간다는 말이 생각나는 하루였다. 어줍잖게 줏어들은 단어로 buck이 돈이라는 뜻도 있다는 생각에 무턱대고 왜 돈 얘기가 나오냐고 했으니. 내말을 들은 남편..위로랍시고 자긴 buck에 돈이라는 뜻이 있는지도 몰랐다며 때론 아는게 이렇게 병이 될 때도 있다고 웃어댔지만 난 아직도 그일을 잊을 수 없다. 특히 왜 돈얘기를 하냐고 외치던 내 당당함을. 

어디 듣는 것 뿐이랴. 많이 듣는 만큼 발음도 좋아지는 건 분명하다. 남편보다 덜 보고 덜 들으니 내 발음도 그냥 저냥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은 당연. 특히 다들 어렵다고 얘기하는 것처럼 R과 L발음은 쉽지 않다. 이거랑 관련해서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하나 더 있다. 초반에 나가기 시작했던 미국교회를 다닌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였을게다. 한번은 한국에 있는 모대학 학생들이 방학을 이용해서 단체로 이곳 학교로 단기 어학연수를 밟으러 왔다고 하기에 나를 포함해서 그 교회에 다니던 몇명의 한국사람들이 음식을 준비해서 다 같이 호숫가에 있는 한 공원에서 점심을 먹으러 간 적이 있었다. 먹기 전에 한 교회 남자집사님한테 기도를 부탁드렸다. "Can you pray for us before taking lunch?"라고. 헌데 내 부탁을 받은 그 남자 집사님 반응이 심상찮다. 내가 하는 얘기를 못 알아들었다는 얼굴이다. 흠..뭔가 잘못되었나 했더니 그 집사님은 기도(pray)를 부탁한다는 내말을 같이 놀자는(play)는 말로 들은게다. 이런 이런...이노무 r이랑 l..지금도 그 발음을 하려면 의식적으로 혀를 굴리고 입을 옆으로 더 늘리는통에 더 어색하게 들릴게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잠시긴 하지만 의식적으로 혀를 입천장에다 붙였다 굴렸다 하면서 R과 L 두 발음을 연습한 적도 있지만 그거야 단어 하나 하나일 때는 의식할 수 있지만 문장속에 있을 때는 그렇게 연습한 것들을 잊어버린 내 입에서 나오는 R과 L의 발음은 거의 차이가 없이 나온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언어에 대해 남편이나 나나 공통적으로 절감하는게 있다. 아무리 세월이 가도 영어에서 여전히 안되는 건 안 된다는 거다. 이런 데 학교 다닐 때 일년 미국 어학연수 다녀온 후배들한테 일년동안 배웠으니 잘 하겠다 싶어..농삼아..어디 영어한번 유창하게 해봐는 물정모르는 소릴 해댔으니...참 그때 그 녀석들은 얼마나 당황했을까. 여기 와서야 그 맘들이 이해된다. 남의 나라 말을 배우는데 무엇보다 제일 마지막에 걸리는 건 다름아닌 '문화'의 차이다 싶다. 이네들의 문화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언어에 대한 이해에도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누군가 물었다. 수업시간에 손들고 선생님(teacher)하고 부르는게 예의없는 거냐고. 얼핏 듣기엔 선생님하고 부르는 거니까 별 이상이 없는 것 같지만 그 말을 듣는 상대방은 아주 기분나빠할 만큼 예의가 없는 표현이라고 생각한단다. 그보다는 미스터(Mr.) 혹은 미즈(Ms)라고 부르는게 일반적이라니.. 이런 작은 예에서도 단순히 문법에 맞는 말을 할줄 안다고 해서 남의 나라 말을 잘 한다고 생각하면 섣부른 판단이 되는게다. 예 온지 얼마 안 되서 파리채를 찾으러 월마트에 가서 헤매다가 거기서 일하는 직원한테 파리채를 설명한 적이 있다. 안 되는 영어로 생각나는 단어들을 마구 연결시켜 떠들어댔다. 이건 날아가는 파리를 잡는 도구라고(it's akind tool to smash flies)... 내 덜된 영어를 인내심을 갖고 들어주던 그 직원이 알려준 건 "Oh..swatter."였다. 아주 간단한 그 단어를 몰라 그 넓은 매장을 돌아다니고 길게 설명을 해댔던거다. 그럴때면 참 허탈하다. 이렇게 우리의 발목을 잡는건 책상앞에서 읽게 되는 영어가 아니라 이렇게 일상적인 것들이었다. 또 다른 예는 직접 겪은게 아니고 아는 언니를 통해서 들은 에피소드다. 미국와서 아이를 처음 학교 보낸 한국 부모, 학교에서 brown bag을 갖고오라는 말에 브라운색의 백을 찾으러 월마트며 어디며 온동네를 헤매고 다녔단다. 헌데 여기서 brown bag이란 그냥 점심에 먹을 것을 싸갖고 오라는 말인데.. 첨 듣는 이들이야 알리가 없다. 허니 곧이 곧대로 브라운색 백을 찾아서 담아줬다고 하니.. 웃지 못할 일화다. 그런 일상적인 것들은 책에서 얻어지는 것도 아니고 살면서 부딪히면서 알수 밖에 없으니 자연히 잘못 잡히고 깨질 수 밖에. 한 나라의 언어를 익힌다는 것이 얼마나 쉽지 않은가를 우린 여기서 살면 살수록 뼈속깊이 절감하기에 이곳에서 언더그라운드 인생인 우린 시간이 흘러도 안 되는 것 여전히 안 되는 거라고, 남의 나라땅에서는 사는 한 그런 건 어쩔 수 없이 포기하면서 살 수 밖에 없다면서 그렇게 살고 있다. 다른 이들은 그런 미국문화를 제대로 흡수하겠다고 한국사람들보다는 미국사람들하고 어울려 영어를 조금이라도 잘 해보겠다고 애쓰는데 말이다.  
 
그런 영어의 문제는 어디 우리뿐이랴. 한국에서 갓 오신 분들을 보면 그런 모습은 더 절실하다.특히 공부하는 남편따라 오로지 내조만 하겠다고 오시는 여성동지들을 보면. 처음 여기 올 때는 한국에서 선생님이다 치과의사다 조각가다 해서 자기 분야에서 잘 나갔다며 좀 어깨에 힘이 들어갔던 분들도 영어가 잘 안 되면 작은 일에서부터 큰일에 까지 영어를 잘 하는 누군가에게 부탁을 하게 되는 신세고 보면 일년도 안되서 목에 들어갔던 힘이 빠지고 스스로 무력감을 느끼는 분들을 많이 뵈었다. 그런 분들을 볼 때마다 대체 영어가 뭐길래...싶어진다. 다른 나라에 가서도 그 나라 말을 못 한다고 해서 저렇게 까지 움추려들까..다른 언어가 아니고 영어라서 그럴까..아주 사소한 표현들을 영어로 말하고 조금이라도 대화다운 대화를 해본 날엔 영어공부에 대한 의지가 불끈 불끈 쏟다가도 기껏 얘기했는데 상대방의 반응이 시원챦을 때는 그 의지가 한번에 바람빠진 공처럼 느껴지니...말 그대로 영어에 웃고 영어에 우는 신센게다. 언젠가 한국에서 아주 잘 나간다는 한분이 남편따라 이곳에 와서 지내다 한번은 아이가 아프다고 해서 학교에 가셨더란다. 헌데 아이를 조퇴시키야 되는데 그 말이 입에서 안 나와서 말도 못한 채 주춤대다 때마침 학교에 들렸던 한국사람을 잘 모르는 분인데도 붙잡고 도와달라고 했다며 한숨을 내쉬더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더군다가 한국에서 갓 오셨을 때 목에 잔뜩 힘이 들어갔던 그분에 대해 못마땅했던 이들의 입을 타고 내 귀까지 전해진게다. 말 그대로 영어에 관한 한 다 동병상련인게다. 어디 그런 일이 한둘이겠는가. 여기서 영어때문에 웃고 우는 일이.

그렇다고 영어 때문에 기죽어 살 필요는 없다는게 남편과 나의 생각이다. 언어는 우리가 여기서 공부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tool)이지 목적이 아니라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안되는 영어에 대한 합리화라고 해도 할 수 없다. 허나 수업시간에 번드르르하한 영어로 참으로 알맹이 없는 말들을 그럴 듯하게 포장해서 떠드는 미국아이들을 볼 때마다 어쩔 수 없이 드는 생각이기도 하다. 남편말대로 니들이 영어말고는 나보다 나은게 뭐있길래...하고 말이다. 그런 남편 답게 그는 강의 첫시간에 자기 수업에 들어온 아이들한테 자기의 영어 액센트나 발음때문에 불평할려면 수강신청할 생각을 하지 말라고 공표를 해버렸단다. 그건 그네들 귀엔 어색하게 들릴 지도 모를 영어때문에 정작 배워야 할 알맹이들을 배우지 못하게 될 거라는..아주 자신에 찬 얘기였을게다. 그런데도 수강신청을 취소한 아이는 하나도 없었고 이제는 다들 남편의 억양과 발음에 익숙해졌는지 잘 따라온다고 하니.. 우리가 해왔던 생각.. 태도에 달려있다는 거다. 남의 나라 언어를 그 나라 사람보다 못 하는 건 당연하다. 대신 우린 그네들이 가지지 못한 것들을 갖고 있다고 착각(!)이라도 해도 그렇게 생각하며 살자. 배우고 가르치는데 모자라는게 어디 언어뿐이랴. 남의 나라 말을 자기 말처럼 익힌다면야 더 없이 좋겠지만 우린 그렇다고 영어때문에 좌절하지 말자. 해서 우린 이네들이 듣기엔 덜된 영어라고 해도 자신있게 하자고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어찌보면 짠밥에 비례해서 느는 건 눈치뿐 아니라 말 그대로 똥배짱인지도 모른다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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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나온 지 제법 오래된 영화다. 1988년에 개봉되었으니까. 이 영화를 보려고 맘 먹었던 건 밀란 쿤데라 (Milan Kundera)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Unbearable lightness of being)'을 원작으로 했다는 것과  '나의 왼발 (My left foot)'이나 '아버지의 이름으로 (In the Name of the Father)'에서 봤던 다니엘 데이 루이스(Daniel Day-Lewis)가 전혀 다른 이미지로 나온다니 궁금했다. 한국에서는 '프라하의 봄'이라는 다소 생뚱맞은(?) 제목으로 개봉되었던 걸로 기억난다.

체코 망명작가인 Milan Kundera의 작품에는 그만의 독특한 정서가 있다. 그걸 잘 드러내주는 작품이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농담(The joke)'일게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무심코 뱉은 농담 한마디로 인해 그때까지 누려왔던 것과는 너무 다른 나락의 삶으로 떨어진다는 한마디로 참 재수없는(!) 한 남자의 삶을 그리고 있다. 이 영화가 원작으로 삼았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Unbearable lightness of being)'도 크게 다르지 않다. 국내 의학계 뇌수술의 최고 권위자였던 한 의사(Thomas)가 친구들과의 토론끝에 가벼운 맘으로 신문에 기고했던 글이 그의 인생에 발목을 잡는다. 병원에서 쫓겨난 그는 청소부로 살아간다는 대략의 줄거리를 가진 이 이야기는 한 나라의 정치적 ism이 그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한 개인의 삶에 어느 정도까지 개입할 수 있는 가를 보여준다. 기실 그런 류의 이야기는 우리한테는 그리 낯설지 않긴 하다.

정작 Milan Kundera 본인은 자기 작품엔 어떤 정치적 동기도 없다고 했다지만 내가 읽었던 그의 몇 작품들만으로도 그는 조국 체코의 공산주의라는 체제가 평범한 이들의 삶을 어떻게 좌지우지하고 하루 아침에 밑바닥으로 떨어진 사람들은 그런 체제의 칼날에 어떻게 반응하는 가에..그리고 어쩔수 없이 지배체제의 꽉 막힌 사회의 메카니즘과 그 사회에 팽배한 이데올로기를 그리고 있다는 걸 그의 작품에서 읽어내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특히 그의 소설이 관심을 끄는 이유는 그렇게 한 개인의 삶들을 짓누르고 있을 정치 이데올로기라는 주제들의 무거움을 특유의 희화적이고 풍자섞인 표현들로 거둬내...가벼워 보이지만 결코 가볍지만은 않은 그의 특유한 입담에 있다. 그건 진지한 주제를 바윗덩이만한 무게로 다루는 것보다 그런 진지함을 가벼움으로 더 진지하게 만드는 쪽을 더 좋아하는 개인적 취향탓이다.   

해서 이 영화를 보기전에 궁금했었다.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이 누군지. 그런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의 독특한 정서들을 영화라는 그릇에 잘 담아냈을까...하는 궁금증으로 이 해묵은 영화를 찾아 봤다. 책을 먼저 읽은 터라 잘못(?) 찍으면 영락없는 포르노일 수도 있고 아주 잘 찍으면 제법 쓸만한 예술영화겠다...며 어줍잖은 기대로 말이다. 보고 난 후엔...소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긴 하지만 무엇이든 가벼움으로 일관하는 Tomas를 연기했던 Daniel Day-Lewis와 답답하리만치 진지하기만 한 Teresa를 맡았던 Juliette Binoche의 연기가 이 영화의 맛을 최대치로 끌어낼 수 있었다 싶다.

영화 끄트머리에 가면 알 게 된다. Thomas의 가벼움은 결코 단순한 가벼움이 아니며,  Teresa의 진지함 역시 순전하게 진지할 수 만은 없다는 것을. 처음엔 그 둘의 가벼움과 진지함은 다소 어긋난 것 처럼 보이나 결국엔 자신에게 던져진 피할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그 둘한테서 그런 가벼움과 진지함은 동전의 양면이 아니라 종내엔 서로 마주 하고 있는 통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여자관계에서만은 참을 수 없이 가벼운 Thomas는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번복하겠다는 말 한마디로 이전의 풍요로운 세월로 돌아갈 수 있다는 유혹에도 불구하고 차라리 물걸레를 들고 유리창을 청소하는 그 자리에 남기로 한 Tomas한테도 그의 삶에서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Thomas의 가벼움으로 상처를 받았던 Teresa 역시 한 정치집회에서 찍었던 자신의 사진들이 반정부적 인물을 색출해내는 정부에 의해 이용되었다는 사실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돌아가는 세상일에 그런 그녀의 진지함도 결국 흔들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허긴 굳이 그런 영화적인 상황이 아니라고 해도 삶이라는 게 우리로 하여금 줄곧 가벼울 수 있게..시종 진지할 수 있게..내버려 두질 않다는 것을 우리도 잘 알잖는가... 영화속 이야기이긴 하지만 자신의 가벼움과 진지함이 세상에서 전혀 다르게 받아들여 지고 심지어 악용될 수 있다는 것을..이 두 사람은 아주 비싼 댓가를 치루며 배우고 있다.  Milan Kundera는 그의 소설 초반에서 이렇게 묻는다. "What then shall we choose?,"  "Weight or lightness?"  내 기억으론 그에 대한 해답은 소설의 마지막부분에 있다. .이 영화 역시 그 해답을 후반..Thomas와 Teresa의 삶에서 보여주지만 원작의 맛을 충분히 살리기엔 미진한 감이 있다.

알고 보니 Philip Kaufman은 북회귀선(Henry&Jane)이랑 퀼스(Quills)를 만든 감독이었다. 포스터에는 'A lovers Story'라는 부제가 붙었건만 내 눈엔 그냥 단순한 '남녀상열지사' 라기 보다는 시대와 사회를 잘못 타고 난 두 사람이 각자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사람사는 이야기다. 해서 좋았나 보다. 이 영화처럼 드라마틱한 상황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는 일상에서 부딪히는 수많은 경우들 역시 우리에게 가벼울 것인가..진지할 것인가..중 선택을 요구하고 있긴 별 다르지 않기에. 그네들의 살아내는 모습이 우리네 하고 그닥 달라 보이지 않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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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나라 땅에 와서 8년을 한 곳에서 살았으니 오래 살긴했나 보다. 우린 지난 달 말에 이삿짐 트럭 뒤에다 차를 달고 남쪽으로 자그마치 11시간 남짓을 달려 처음으로 이사란 걸 했다.  일리노이..그러니까 중서부에서 옥수수밭만 보고 살다가 늪지대가 보이고 야자수가 보이는 남쪽으로. 몇 년전에 여행으로 왔을 때만해도 이렇게 더운데서 어떻게 사냐고...헉헉대면서..싫어하던 그 날씨에서 이제부터 우린 살게 된게다. 허니 우린 하루가 멀다하고 옛날 살던 동네를 그리워하고 있다. 아들이랑 둘이서..전에 살던 거긴 베란다 문만 열면 푸른 잔디가 깔려있는 뒷마당이 있었는데 여긴 기숙사 건물들끼리 너무 다닥 다닥 붙어있는데다 풀밭이라곤 공용으로 쓰는 운동장이 다라고.. 거긴 아침마다 딱따구리가 나무를 쪼아대는 소리를 들으면서 잠에서 일어나곤 했는데 여긴 그런 새소리 듣기도 쉽지 않고 바짝 붙은 앞건물에서 내려다 보일까 싶어 문도 활짝 못 열겠다고, 거긴 사슴이랑 다람쥐등 우리아들이 좋아라 하는 동물들을 뒷마당에서 가끔 만날 수 있었는데 여긴 학교 캠퍼스를 가야 볼 수 있는 다람쥐가 다고 거기 기숙사는 오래 되었어도 넓고 깨끗했는데 여긴 거기에 비하면 좁고 낡았다고..그리고 거긴 바퀴벌레나 개미라는 걸 모르고 살았는데 지금 우린 바퀴벌레와 씨름하느라 끙끙대고 있다고..그렇게 우리는 입만 열었다 하면 여기랑 옛날 살던 동네랑 비교하곤 한다.

여기 도착한 첫날, 우리가 살게 될 가족 기숙사라고 배정받은 아파트 문을 열었을 때 그 난감함이란...그냥 한숨 밖에 나오질 않았다. 그순간 전에 살던 곳에서 우리와 이웃으로 살다 이곳으로 몇년 전에 옮겨 왔던 한 언니 말이 떠올랐다. 새로 이사한 곳에 비하면 우리가 살던 있던 그 기숙사는 거의 궁궐(palace) 수준이라고 하던. 그 얘기를 들었을 때는 그냥 한 귀로 흘러들었을게다. 설마 우리가 이곳으로 올줄도 모르고. 이제 그 언니의 말이 새삼스레 떠오르면서 새삼 그동안 우리가 너무 좋은 기숙사에서 사치스럽게(?) 살았구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젠 눈만 돌리면 옥수수밭 투성이던 그 지루한 시골이 너무 그립다. 작긴 하지만 운전하다 딴 생각을 해서 엉뚱한 곳으로 들어서도 구석 구석 익숙해서 눈을 감고도 길을 찾아낼 수 있는....그리고 여전히 그곳에서 지내고 있는 좋은 사람들이 보고 싶다.

나도 그런데...그곳을 고향처럼 여기며 사랑하던 아들은 오죽하랴. 낯선 곳에서 이틀밤을 보내고 난 며칠전이었나..아들은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다며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학교를 다녀와서는 더 심해졌다. 예전에 살던 곳에서는 아주 다양한 피부색을 가진 친구들이 골고루 있어서 친구 사귀는데도 별 어려움이 없었는데.. 흑인이 많이 사는 동네다 보니 같은 반 친구들 대부분이 흑인들이라는 아주 낯선 환경에 아들은 아직도 적응이 안 되는가보다.  학교 가는 아침만 되면 아들은 배가 살살 아파온다고 하고 이제 가슴께가 아프다고 한다. 거짓말할리는 없고..신경성인게다. 맘이 예민해지니 몸에서 반응이 오는게다. 물론 아들을 힘들게 하는 건 그것만이 아닐게다. 살던 곳하고 너무 다른 낯선 환경도 그런데 그렇게 좋아하는 아빠도 함께 하지 않으니 우리 아들 맘이 더 안 좋을 수밖에. 남편은 여기 짐정리를 대충 도와주고 지난주에 다섯시간 차로 밟아 북쪽으로 올라갔다. 가을부터 강의를 시작하는 그곳에서도 많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는 탓에 아쉽더라도 더 머물 여유가 없어서 서둘러서 올라갔다.

새삼스런 두집 살림이라니...그건 늦은 나이에도 접지 못한 공부에 대한 내 미련때문이라 아들이랑 남편한테 더 미안할 뿐이다. 공부를 먼저 끝낸 남편이 자릴 잡으면 그땐 내 공부를 다시 시작하겠다고 지원했던 몇 학교들중에 이곳이 남편 학교랑 제일 가까운 곳이어서 당분간 떨어진 이곳에서 남편은 남편대로 그리고 난 나대로 제2의 미국생활을 시작하기로 맘 먹은게다. 누가 등 떠밀어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닌데도 정작 남편이 혼자 돌아가는 모습에 코끝이 찡해 왔다. 그러고보니 처음이다. 미국와서 한 일년쯤 지났을 때 한국서 챙겨온 알량한 유학총알(자금)이 바닥나자 여름방학동안 대도시에 가서 웨이터라도 해야겠다고 3개월동안 뉴욕에서 일하느라 떨어져 있었던 그때 이후로는. 아빠를 너무 좋아하는 아들한테는 모르긴 해도 아빠의 자리는 더 크게 느껴질게다. 아들이 나와 같이 지내기로 한 것은 남편이 살게 된 곳보다 내가 공부하게 된 이곳에 한국 친구들이 훨씬 많아서였는데 해서 좋은 한국친구들을 만나서 다행이다 하고 있는데..정작 학교엔 한국친구들이 별로 없고 흑인이 대부분이어서 적응하기가 쉽지 않은가보다. 그런 모습을 후회가 된다. 괜히 데리고 왔나 하는 생각에. 그리고 아들한테 미안하다. 아빠 엄마 공부하겠다고 남의 나라 땅에 와서 빠듯한 살림에 제대로 못 해주고 한국에 있었으면 듬뿍 받았을 할아버지 할머니등 친척들 사랑도 못 받고 늘 한국에 대한 그리움만 안고 살게 하고 있는게. 아빠가 떠나기 전날까지 아빠 안 가면 안되요...하고 어리광을 부리던 아들, 정작 아빠가 떠나시는 날 아침엔 의젓하게 나를 위로했었다. 엄마..괜찮지요..아빠 금방 또 오실꺼니까요..하면서.

이삿짐 푸는 걸 도와주겠다고 먼길을 같이 길동무해준 후배들중에 하나가 그랬다. 이젠 한숨 돌린거 아니냐고..누구말대로 남의 나라 땅에서 바닥은 치지 않냐고. 맨땅에 헤딩하면서 바닥을 쳐봤으니 이제부턴 처음 미국땅을 밟았을 때보다 이래 저래 형편이 훨씬 좋아진거라고...그러니 좀 여유있는 맘으로 공부하라고 말이다.  그래..그렇긴 하다. 8년전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으로도 씩씩하게 잘 살았는데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다소 부실하긴해도 헬멧(?)을 쓴 듯이 든든하긴 하니 조금은 여유로운 또 다른 시작이라고 할 수 있겠지.

그래도..이곳에서의 새로운 생활에 아들이나 나나 어느정도 시간이 필요하겠다 싶다. 시골쥐모자 낯선 도시에 왔으니 옛날 그곳을 잊고 이곳에 적응하려면...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지리라 믿는다. 아들도 나도. 조금은 삭막한 주변에도, 낯선 풍경들이랑 사람들도 그리고 살속으로 내리꽂히는 듯 강렬한 땡볕에도. 그런 햇볕을 올려다보면서도 이곳의 볕은 이 전에 살던 곳의 볕과는 강도부터가 다르다...싶은 걸보니 아직도 맘은 그 옛날 살던 시골에서 머뭇거리고 있나 보다. 어서 적응해야지...우선 저 땡볕부터.  

* 2007년 8월에 끄적였던 글을 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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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산타 없는거 알아요"

누가 나쁜 얜지 착한 얜지 다 안다는 산타 할아버지한테 선물을 받기위해 매년 크리스마스때마다 받고 싶은 선물을 소원이라며 빌곤 하던 아들이 드디어 사실(!)을 알아버렸단다. 허긴 아들내미가 내년이면 13살인데..산.빙.교 (산타를 빙자한 교육)의 약발이 떨어질 때가 지나긴 했다. 그나마 산타를 워낙 좋아하는 나라에 살다보니 이제까지 산빙교 효과덕을 많이 봤다. 너 그렇게 하면 산타할아버지한테 선물을 받을 수 있겠냐는 식으로. 그래도 이미 다 안다는 얼굴을 하면 너무 재미없잖는가. 해서 물었다.

산타가 없다구 누가 그러는데?
"누구형도 그러구 누구도 그러구 저랑 제이슨만 빌리브(believe)해요..."
그래..그럼 올 크리스마스엔 산타 할아버지한테 선물 못 받겠네.
"그거 아빠 엄마가 주는거 다 알아요"
산타 할아버지 우리아들이 산타가 없다고 생각하는 걸 아셨으니까 이제 크리스마스 선물 안 주시겠다.
"Who cares (상관없어요).."
그래? 선물 못 받는데도 후케얼즈라고 얘기하는 걸 보니 이미 다 알아버린게다.
허긴 며칠 전 학교 아파트에 사는 한국 이웃이 그랬다. 그 집 둘째가 어느 날 다짜고짜 산타가 없지요..하길래 누가 그러냐고 했더니 바로 우리집 아들내미 이름을 대면서 그 형아가 얘기해줬다고 하더란다. 아들내미는 확신에 차서 아직도 산타를 믿고 있는 동생들한테 얘기하고 다니는게다.

우리 집 아들내미를 비롯해 아이들한테 산타는 도깨비방망이같은 존재일게다. 어쩌면 그렇게 자기가 갖고 싶은 것을 잘 알고 굴뚝도 없는 집에 그것도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오다가 잠든 틈을 타서 들어와 머리맡에 선물을 놓고 가시는지 신기해하면서. 매년 크리스마스 다음 날 아침이면 그렇잖아도 잠이 없는 아들녀석은 새벽 4시부터 일어나 집안을 두리번거리곤 했다. 그러다 선물을 발견하곤 와우..하며 놀라곤 하던 아들모습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는데..이젠 산타가 없다고 얘기하고 다닌다니. 그럼 아빠 엄마의 이 하얀 거짓부렁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건지 알고는 있는 걸까..

이곳에 아이들은 한국에서 크는 아이들보다 순진한 구석이 더 많은 듯 하다. 한국말을 어눌하게 해서 그런건가..한국에서 갓 온 아이들의 말투는 마치 어른들의 것처럼 징그럽다 싶을 만큼 유창한데다가 생각도 어른들 빰칠만큼 영악해서 영 아이같지 않을 때가 많은데. 그런 아이들하고 어울리는 우리아들뿐만 아니라 여기서 자라고 있는 아이들은 마치 세상물정 모르는 시골아이들처럼 보일 때가 많다. 대개가 동갑이거나 동생들인데도 한국에서 갓 온 아이들이 형이나 누나같이 보인다. 산타가 없다고 아들한테 귀뜸해줬다는 그 형아도 한국에서 온지 얼마 안 된다는 두살 많은 형인데 아들내미왈 자기도 그 말을 듣고도 처음엔 아닐거라고 생각했단다. 허긴 산타에 대한 환상을 깨자니  산타가 있어야 받을 수 있다던 선물이 날라가는 것 같아 아쉽고 한편으로 그냥 있다고 하자니 그런건 없다고 하는 다른 친구들이랑 그 형아 말에 귀가 솔깃하기도 했는데 이젠 다 안단다... 산타할아버지가 없다는 걸. 그러고보니 산타랑 관련해서 한 한국이웃이 했던 말이 기억난다. 자기 큰 딸애는 머리가 클수록 산타가 없다고 하면서도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선물때문인지 산타가 있다고 믿는 척 한다고. 그런 편리한 생각보다는 차라리 선물을 포기하더라도 산타가 없다는 알고 있다고 공표해버리는 아들내미가 마음에 들긴 했다.

아들이 산타의 존재에 대해 의심스런 눈길을 보냈던 적은 많았을게다. 몇년 전이었나. 산타가 놓고 갔다는 선물을 열던 아들, "엄마..산타할아버지도 우리집이랑 똑같은 종이(포장지)로 선물을 샀네요" 지은 죄도 없는데 그땐 말 그대로 헉..하고 맘이 덜컹해놓고 나중에 얼마나 웃었던지. 크리스마스 시즌용 포장지를 살까 하다가 포장지 한장에 삼사천원해서 그걸 아끼겠다고 집에서 쓰던 포장지로 선물을 싸면서 그렇잖아도 맘 한구석이 찜찜했는데..눈썰미 좋은 아들내미가 그걸 놓치지 않은게다. 그러곤 친구들한테 산타가 주고 간 선물 포장지가 우리집에서 쓰는 포장지랑 똑같더라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며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양 두 눈을 동그래져서 얘기하는거다. 그때 내가 뭐라고 했더라....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을 낳는다고..음..샅타할아버지도 아빠 엄마랑 같은 달라트리(Dollar Tree)에서 포장지를 사셨나보다..우리가 재활용(recycle)하듯이 산타할아버지도 쓰던 포장지 재활용하실 지도 모르는거 아니냐는 둥 내깐에는 그럴듯하다 싶어 능청스럽게 대답해줬고 아들은 그럴 수도 있겠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또 한번은 산타를 만나보겠다며 기다리는 아들이 잠들기를 기다리다 아들보다 먼저 잠들고 아들보다 늦게 일어난 덕에 선물을 갖다 줄 때를 놓친 적도 있었다. 해서 그 해엔 산타할아버지 대신 우리가 선물을 줬다. 아마도 그런게 모여서 결국 아들은 산타가 없다는 결론에 이른게다. 이젠 크리스마스때마다 아들한테 치던 장난을 못 치게 되었구나..싶으니 서운하기까지 했다.

산타에 대한 남편과 나의 하얀(?) 거짓부렁중에 제일 압권(!) 것은 산타 할아버지는 전기로 돌아가는 장난감(electronic toy)은 취급하지 않으신다고 했던 것일게다. 그렇게 얘기한 것은 우리 유학생활의 얄팍한 주머니 탓이다. 그땐 남편이나 나 둘다 공부하느라 이래 저래 빠듯하던 초창기 시절이었다. 아들을 위해 제대로 된 크리스마스 선물을 마련할 여유가 없던 우리는 몇 지인들을 통해 구세군(Salvation Army)에서 저소득층(low income)들한테 공짜로 선물을 나눠준다는 얘기를 듣고는 귀가 솔깃했다. 남편의 조교월급이 수입의 전부인 우리야 당연히 저소득층이지 하고 찾긴 했지만 처음엔 주춤했었다. 그건 선물을 신청하려고 줄 서있던 대부분이 흑인인데다 하나같이 허름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차림새여서 그 영양가없는 자존심이 고갤 살짝 든게다. 허나 그런 자존심 슬쩍 누르면서 같이 간 한국 지인들하고 순서를 기다렸다. 혹시나 우리아들이 시민권자가 아니라 선물을 안 줄지도 모르겠다 싶었지만 그래도 일단 한번 신청해보자는 맘에 수업 중간에 없는 시간을 내서 그 대열에 낀게다. 다행히도(?) 아들의 출생을 증명하는 여권을 보자고 한 것 말고는 별탈없이 선물 신청서를 내밀었다.

선물은 3가지까지 신청할 수 있었다. 물론 3가지 다 주는 건 아니고 그 셋중에 하나 혹은 둘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대신 'electronic toy'는 취급 안 된다고 했다. 너무 크고 비싼 것을 적어내기가 그래서 첫 해엔 책이랑 아들이 좋아하는 자동차 장난감을 신청했다. 자전거나 썰매등을 신청하는 사람들을 슬쩍 슬쩍 넘겨다 보면서. 신청하고 와서도 설마 시민권자도 아닌데 우리한테까지 차례가 돌아올까하는 궁금증하기도 하고 우리가 진짜 불쌍한 이웃이 되었다는 생각에 잠시 우울하기도 했었다. 한국에 있었을 때, 연말이 되면 불우이웃을 도우라고 시청이나 시내한복판에 딸랑딸랑 두부종을 흔들면서 서있던 구세군 아저씨 아줌마들이 떠올랐고 그 안에 돈을 집어넣은 적이 있던가 싶을 만큼 인색했던 내가 선물을 받아도 되나..하는 따위의 생각도 하면서 말이다.

며칠 후 선물을 받으러 오라며 그 약도가 그려진 편지가 도착했다. 차가 없던 그 때 난 집에 있었고 같이 선물을 신청했던 한국이웃들 중의 한집 차를 타고 다녀온 남편의 손엔 시커먼 쓰레기 봉투가 들려져있었다. 공짜로 받는데 선물답게 주길 바랬다면 너무 큰 욕심이었을까. 그렇게 "쓰레기스럽게' 준 선물을 받아오려니 남편 역시 나처럼 맘이 좀 안 좋긴 하더라고 했지만.. 포장이 뭐 그리 대순가. 그 안엔 아들이 좋아하는 책들이랑 장난감 자동차들이 내가 신청한 그대로 들어 있었는데. 그덕에 가난한 유학생 아빠 엄마를 둔 아들은 진짜 산타랑 비슷한(?) 구세군 아저씨 아줌마가 보내준 장난감을 선물로 받고 마냥 즐거워 했었다. 공짜 선물에 맛들인 우린 그 다음 해에도 선물을 신청하겠다고 줄을 섰고 스케이보드를 아들한테 크리스마스 선물로 안겨줬다. 그때 아들이 갖고 싶은 선물로 게임기등 전기제품등을 얘기하면 농담삼아 산타할아버지는 전기로 움직이는 건 취급 안 한다고 말했던 걸 기억하는 아들은 한동안 산타할아버지가 전기제품은 선물로 취급하지 않으시는 걸로 오해(!)했었다.

어려운 시절도 지나고 나면 다 추억으로 남는다. 재작년에 그 동네를 방문했을 때 한바퀴 돌아보면서 그곳을 다시 찾으니 그때 길게 줄을 서서 선물 신청할 차례를 기다렸던 구세군 사무실은 자리를 옮겼는지 다른 가게가 대신 들어서 있었다. 그래...우리도 그랬던 적이 있었다. 아들한테 얘기해줄게다. 산타에 대한 이 웃지못할 오해에 대해 말이다. 이제는 구세군 종소리를 듣고 옛날처럼 그냥 지나치지 못 한다. 적은 돈이라도 보태게 된다. 어려울 때 그렇게 따뜻한 도움을 받았기에. 그리고 작은 도움이 모여 자식한테 제대로 된 선물을 해주지 못해 우울한 크리스마스를 보낼 우리같이 가난한 가정들이 그 도움덕에 크리스마스를 따뜻하게 보낼 수 있었으니까. 


*작년 (2008년) 크리스마스 즈음에 쓰다. 크리마스때마다 그 시절이 떠오르는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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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금 빼서 유학자금으로 챙겨간 총알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던 2000년도 여름. 남편은 뉴욕으로 일하러 떠났다. 나중에 생각해보면 5시간 걸리는 가까운 시카고도 있었는데 기차로 14시간 넘게 걸리는 뉴욕으로 갔는지..싶을 때도 있었지만 아는 사람이 있다는 이유로 그 먼 뉴욕으로 떠났고 난 아들과 단둘이 남아 그해 여름을 났다. 맨하튼가 한국식당에서 웨이터로 일했다는 남편은 석달만에 허리띠 구멍을 세개로 줄이고 얼굴이 반쪽이 되서 돌아왔다. 다음학기 등록금과 생활비를 벌어서. 석달 동안 그곳에서의 남편의 생활을 생각할 때마다 아직도 가슴이 먹먹해져 눈을 껌벅대곤 한다.  

긴 기차여행 끝에 뉴욕에 도착한 남편은 아는 동생네서 이삼일동안 머물면서 일자리를 찾았다. 수입이 괜찮다는 말에 웨이터일을 하기로 하고 한국판 중앙일보나 한국일보에 난 식당에서 낸 웨이터 구인광고를 보고 식당 몇군데를 찾아다닌 끝에 뉴욕에 간지 며칠 안되 맨하튼에 있다는 한 한정식집에서 일을 시작했다. 웨이터일을 하기 위해 내가 좋아하는 수염을 깎았다는 남편의 말을 전화로 들을 때 코끝이 아려 아무말도 못하는 내게 걱정하지 말라고 여기 생활도 재밌다고 하는 남편의 위로에도 떨어져 있는 내내 남아있는 난 그렇게 계속 맘이 아렸다. 숙소도 같이 일하는 웨이터 동료랑 같이 지내는 걸로 방값을 절약할 수 있다고 좋아했을 때도. 새벽에 뉴욕 전철을 타고 나가 하루종일 일을 하다 집에 돌아오면 지쳐서 쓰러져 잔다고 했을 때도. 여지껏 한번도 흘려본 적 없는 쌍코피가 났다고 했을 때도. 쉬는 날에도 누군가 일이 있어 손이 빈다고 하면 무조건 대타로 나가 일을 뛴다고 했을 때도. 그리고 팁을 많이 받았다며 좋아라 하는 날에도.  

남편을 통해서 알게 된 뉴욕 웨이터와 웨이츄레스 일은 결코 쉽지 않은 듯 했다. 허긴 울 오마니 말씀대로 남의 주머니에서 돈받아가야 하는 일치고 쉬운 게 어디 있으랴 만은. 대부분의 웨이터와 웨이츄레스 주 수입원은 주인장이 주는 쥐꼬리보다도 짧은 주급이 아니라 손님이 주는 팁이라고 한다. 헌데 그 팁도 자기가 받았다고 해서 자기 몫으로 챙기는 것이 아니라 일단 받은 모든 팁들은 일괄적으로 한 곳에다 넣고 나서 하루일이 다 끝난 후에 헤드 웨이터가 각자의 비율에 따라 나누어 준다고 한다. 헌데 그 나누는 기준이란게 얼핏 들으면 공정하지 않은 듯 했다. 왜냐하면 그 곳에서 일한 연수에 비례해서 나눈다고 하니 우리가 식당에 갔을 때 팁을 놓을 때는 대부분의 경우 친절하게 서비스해주던 이들한테 조금이라도 더 얹어주곤 하는데 그런 짠밥에 비례해서 나눈다고 하니 친절해서 팁을 많이 받았을 누군가는 손해를 보는 듯 하기에 하는 소리다. 허나 어쩌랴 그것이 그 곳의 룰이라는데. 신입이 군말없이 따라야지. 해서 처음 한달 남편은 사람 명수대로 나누어서 할당되는 몫 전부가 아니라 그 40퍼센트만 받았다고 한다. 처음 온 신입은 40%에서 시작해서 조금씩 올려 두서나 달이 지나야 원래 받는 몫의 100%를 다 받을 수 있다고 하니 가을학기 개강 전까지 기껏해야 3개월 정도만 일하는 남편의 경우엔 일을 그만 둘때까지 계속 100%에 못 미치는 돈을 받아야 한다는 얘기니 더 더욱 공정하지 않게 들렸을게다. 허나 다행히도 남편은 한달도 안되서 100% 팁을 다 받을 수 있었단다. 그 이유는 적지않은 나이에 가족까지 떼어놓고 열심히 일하는 걸 보고 그런 파격적인(!) 결정을 했다고 한다. 모르긴 해도 눈썰미가 좋아 일을 금새 익힌데다 어딜가나 사람들하고 잘 어울리는 성격의 남편은 그곳 사람들과도 즐겁게 생활했을 테고 그곳에서 매일 매일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은 그날 하루를 마감하는 남편과의 전화통화로 그리고 돌아와서 들려주는 얘기들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때 잠자리에 들기 직전에 주고받던 전화 대화의 주 관심은 일당 팁을 얼마나 받았냐는 거였다. 그날 팁을 많이 받았는지 시원챦게 받았는지는 남편의 목소리만 들어도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었으니까. 많이 받을 때는 하루 팁이 거의 200불이 될 때도 있었지만 적은 날은 100불도 안 될 때도 있었으니까. 우린 그해 여름을 그렇게 보냈다. 남편은 반찬그릇들과 뚝배기등이 얹혀진 쟁반들을 들고 식당 일이층을 오르내리면서 난 그날 하루 어떤 손님들을 만났고 팁을 얼마 받았고 그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얘기해주는 남편의 전화를 받기 위해 하루 하루를 사는 듯 했으니까. 그런 남편의 웨이터 아르바이트 경험덕에 우린 식당에서 식탁위에 놓고 나오는 팁에 대해 전보다 훨씬 신중해졌다. 팁을 주는 이들한테는 별거 아닐 수 있지만 그 곳에서 일하시는 분들한테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알기에.

그렇게 석달을 넘게 고생한 끝에 남편은 가을학기 등록금과 생활비가 될 만한 몫돈을 벌어왔고 그덕에 우린 자칫하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를 심각한 고비를 겨우 넘길 수 있었다. 뉴욕에서 일하고 돌아온 후로 남편은 종종 과일 디저트를 담아내던 웨이터솜씨를 발휘해서 오렌지나 수박등을 제대로(!) 깎아 내놓곤 한다. 허나 입에 대지는 않는다. 특히 수박은. 남편이 수박을 안 먹는 이유는 그 맨하튼 식당에서 디저트용으로 너무 많은 수박을 잘라야 했던 기억에다가 뉴욕에서 돌아오고 나서 일하게 된 야채가게 아르바이트에서의 더 힘든 경험탓인지 수박엔 입도 대지 않는다. 그 야채가게는 한국인 부부가 운영하는 가게였는데 다른 곳에 비해 물건들이 싱싱한데다 가격도 저렴해서 주머니가 가벼운 유학생들이나 저소득층 주민들이 주된 손님들이었다. 남편은 그 곳에서 일주일에 스무시간 정도 일을 했는데 특히 여름이 제일 일이 많아 힘든 계절이었다.특히 한국 수박보다 두서너배 크고 길쭉한 이곳 수박이 여름 한철 잘 나가는 품목이다 보니 어쩔 때는 하루에 삼사백통의 수박들이 들어오는데 그 많은 수박들을 트럭에서 가게안까지 날라서 수박을 담아놓는 커다란 통안까지 깨지거나 곯지않게 차곡 차곡 쌓아야 하는 일이 가장 고된 일이라고 했다. 더군다나 그 통이라는게 높아 수박을 쌓으려면 허리를 굽혔다 폈다 하는 작업을 수박통 갯수만큼 해야하기 때문에. 수박이 들어온 날 남편의 옷은 수박을 안으면서 묻었을 흙과 땀으로 흥건했던 걸 기억한다. 그때 질려서인지 남편은 수박을 먹지 않는다. 우리를 위해 먹기 좋게 잘라주고 씨를 발라주면서도.  


남편은 그런 고생스런 경험들이 그땐 많이 힘들었지만 더 없이 소중하게 여긴다. 영화작업을 하는 그에게 그런 경험들을 소재로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하니 남한테 들은 이야기가 아닌 자신가 겪은 이야기들이니 아마도 진정성이 느껴지는 영화를 만들 수 있게 하는 힘이 될거라고 믿는다. 매사 긍정적인 남편은 늘 사람들을 좋아한다. 해서 어디서든 누구한테든 맘을 다하는 성격이다. 손님들도 아는가 보다. 그런 남편의 마음과 몸가짐이 단순한 서비스가 아니라는 것을. 뉴욕에서 일할 때도 같이 일하는 사람들도 손님들도 많은 이들이 그런 남편을 기억하고 보고 싶어하고 특히 저소득층 주민들이 많이 찾곤 하던 그 야채가게에서 일할 때도 무거운 수박을 사들고 가는 노인분들이나 여자들을 위해 수박을 차까지 들어다 주곤 하던 그는 언제 부턴가 거리나 월마트에서 만나는 누군가와 반갑게 안부를 주고 받곤 했는데 그 사람들 대부분이 야채가게 단골손님이라고 소개시켜주곤 했다. 기억에 남는 분들 중에 그 야채가게 단골 손님이었다는 할머니 한 분이 우리 가족을 추수감사절 저녁에 초대를 해주셨다. 풍족하지 않으신데도 우리를 위해 칠면조를 굽고 과일을 내어놓으시며 준비해주신 덕에 그 할머니랑 두 아들이랑 보낸 추수감사절의 소박하지만 정성어린 저녁은 우리가 여기서 먹은 여느 추수감사절 음식에 비할 바가 못될 만큼 오래오래 추억하게 된다.  

삼년 전 가족여행으로 뉴욕을 갔을 때 남편은 아들과 나를 그때 일했다는 식당으로 데리고 갔었다. 그때 같이 일했다던 헤드웨이터와 반가운 재회를 했고 아들과 난 그 식당을 둘러보면서 웨이터 복장이라는 까만색 양복바지에 하얀색 와이셔츠, 까만색 신발을 신고 김이 모락 모락 나는 한국음식들이 올려져있을 묵직한 쟁반을 들고 일이층을 오르고 내리고 했을 아빠와 남편의 모습을 그려봤다. 언젠가 그곳에서 같이 일하던 동료들하고 찍었다는 사진속에서 수염을 깎고 웃고 있는 남편의 낯설고 어색했던 모습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그 이듬핸가 시카고로 여행했을 때 남편은 우리를 미시간 호수 근처의 한 벤치로 데려갔다. 6년 전 뉴욕가는 기차를 기다리면서 앉았던. 그때 그 벤치에 앉아 기차시간을 기다리면서 내가 점심으로 싸줬다던 삶은 달걀을 먹었던 기억을 얘기해주었고 우리 가족은 그 벤치에 다 같이 앉아 그때 이야기를 했다. 근데 난 왜 하필 목이 잘 매는 삶은 달걀을 싸줬을까...입대시키는 것도 아닌데..하면서. 떨어져 있는 시간동안 남편을 제일 힘들게 했던 건 일보다도 우리와 떨어져 있어서 였다고 했다. 특히 그렇게 이뻐하는 아들이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 석달동안 엄마랑 지내던 세살배기 아들이 오랫만에 만난 아빠를 낯설어 했을 때 많이 서운해하던 남편의 얼굴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렇게 뉴욕을 다녀온 후에 가끔 자기도 방학동안 웨이터일 하면서 용돈 좀 벌고 싶어 뉴욕으로 떠나겠다는 청춘들이 몇  찾아왔었지만 그네들 대부분이 일주일도 못 되서 돌아오거나 뉴욕 관광만 하고 오는 그네들의 손엔 뉴욕에서 사들고 쇼핑가방들이 들려져 있었다. 남편 말대로 절실하지 않으면 하기 힘든 일이기 때문일게다. 기실 외국인이 학생 신분으로 그런 아르바이트를 하는 건 이 나라에서는 명백한 불법이다. 그럼에도 워낙 그렇게 일하는 사람들은 많다. 더군다나 뉴욕이나 큰 도시에서 학생들은 그런 아르바이트들로 용돈이랑 학비를 번다. 한인업주들도 세금에 대한 부담도 없고 영어 쓸 필요도 없으니 그네들을 고용한다고 한다. 허나 유감스럽게도 그렇게 힘들게 돈을 벌어 학비를 쓰는 이들도 있지만 많은 이들이 뉴욕 생활을 즐기는데 쓴다고 한다. 공부는 뒷전으로 한채 공부를 하러 왔는지 돈을 벌러 왔는지 헷갈려하다 결국은 공부를 접고 돈만 벌다 불법체류자로 남는 젊은이들이 뉴욕만 해도 꽤 많다고 한다.  

남편은 공부에다 아르바이트, 조교 그리고 나 역시 공부랑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우린 힘든 고비를 하나 하나 넘길 수 있었다. 남편은 5월 졸업후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하는 가을학기가 시작되는 8월까지의 여름방학동안 잠시지만 동네 한국식당에서 아르바이를 했다. 주위에서 말리는 이도 있었다. 이젠 하지 말라고. 허나 남편은 뭐 어떠냐며 노는 것 보다 낫다고 한달 넘게 웨이터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때 졸업하고 취직을 했다는 아빠가 웨이터일을 한다고 했을 때 아들이 물었다. "그럼 아빠 잡(job)이 프로페서(professor)가 아니고 웨이터에요?" 물론 아들은 웨이터인 아빠에 대해 실망을 해서 물은 게 아니었겠지만 그런 아들을 보고 나와 주변 사람들이 한차례 웃었던 기억이 난다. 아들과 난 그렇게 건강한 정신의 아빠이자 남편을 사랑한다. 그런 그의 건강함이 우리가 지난 시간을 견디게 할 수 있었던 힘이기에. 물론 그렇게 일하는 과정이 쉽진 않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힘들지만은 않았던 건 그 시간동안 만났던 수많은 이들과 그 공간에서의 경험들덕에 우린 비록 주머니는 가난한 유학생부부였지만 늘 마음만은 누구보다도 부자로 살 수 있었다고 믿는다. 그리고 앞으로도 변함없이 그렇게 건강하게 지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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