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나라 땅에 와서 8년을 한 곳에서 살았으니 오래 살긴했나 보다. 우린 지난 달 말에 이삿짐 트럭 뒤에다 차를 달고 남쪽으로 자그마치 11시간 남짓을 달려 처음으로 이사란 걸 했다.  일리노이..그러니까 중서부에서 옥수수밭만 보고 살다가 늪지대가 보이고 야자수가 보이는 남쪽으로. 몇 년전에 여행으로 왔을 때만해도 이렇게 더운데서 어떻게 사냐고...헉헉대면서..싫어하던 그 날씨에서 이제부터 우린 살게 된게다. 허니 우린 하루가 멀다하고 옛날 살던 동네를 그리워하고 있다. 아들이랑 둘이서..전에 살던 거긴 베란다 문만 열면 푸른 잔디가 깔려있는 뒷마당이 있었는데 여긴 기숙사 건물들끼리 너무 다닥 다닥 붙어있는데다 풀밭이라곤 공용으로 쓰는 운동장이 다라고.. 거긴 아침마다 딱따구리가 나무를 쪼아대는 소리를 들으면서 잠에서 일어나곤 했는데 여긴 그런 새소리 듣기도 쉽지 않고 바짝 붙은 앞건물에서 내려다 보일까 싶어 문도 활짝 못 열겠다고, 거긴 사슴이랑 다람쥐등 우리아들이 좋아라 하는 동물들을 뒷마당에서 가끔 만날 수 있었는데 여긴 학교 캠퍼스를 가야 볼 수 있는 다람쥐가 다고 거기 기숙사는 오래 되었어도 넓고 깨끗했는데 여긴 거기에 비하면 좁고 낡았다고..그리고 거긴 바퀴벌레나 개미라는 걸 모르고 살았는데 지금 우린 바퀴벌레와 씨름하느라 끙끙대고 있다고..그렇게 우리는 입만 열었다 하면 여기랑 옛날 살던 동네랑 비교하곤 한다.

여기 도착한 첫날, 우리가 살게 될 가족 기숙사라고 배정받은 아파트 문을 열었을 때 그 난감함이란...그냥 한숨 밖에 나오질 않았다. 그순간 전에 살던 곳에서 우리와 이웃으로 살다 이곳으로 몇년 전에 옮겨 왔던 한 언니 말이 떠올랐다. 새로 이사한 곳에 비하면 우리가 살던 있던 그 기숙사는 거의 궁궐(palace) 수준이라고 하던. 그 얘기를 들었을 때는 그냥 한 귀로 흘러들었을게다. 설마 우리가 이곳으로 올줄도 모르고. 이제 그 언니의 말이 새삼스레 떠오르면서 새삼 그동안 우리가 너무 좋은 기숙사에서 사치스럽게(?) 살았구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젠 눈만 돌리면 옥수수밭 투성이던 그 지루한 시골이 너무 그립다. 작긴 하지만 운전하다 딴 생각을 해서 엉뚱한 곳으로 들어서도 구석 구석 익숙해서 눈을 감고도 길을 찾아낼 수 있는....그리고 여전히 그곳에서 지내고 있는 좋은 사람들이 보고 싶다.

나도 그런데...그곳을 고향처럼 여기며 사랑하던 아들은 오죽하랴. 낯선 곳에서 이틀밤을 보내고 난 며칠전이었나..아들은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다며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학교를 다녀와서는 더 심해졌다. 예전에 살던 곳에서는 아주 다양한 피부색을 가진 친구들이 골고루 있어서 친구 사귀는데도 별 어려움이 없었는데.. 흑인이 많이 사는 동네다 보니 같은 반 친구들 대부분이 흑인들이라는 아주 낯선 환경에 아들은 아직도 적응이 안 되는가보다.  학교 가는 아침만 되면 아들은 배가 살살 아파온다고 하고 이제 가슴께가 아프다고 한다. 거짓말할리는 없고..신경성인게다. 맘이 예민해지니 몸에서 반응이 오는게다. 물론 아들을 힘들게 하는 건 그것만이 아닐게다. 살던 곳하고 너무 다른 낯선 환경도 그런데 그렇게 좋아하는 아빠도 함께 하지 않으니 우리 아들 맘이 더 안 좋을 수밖에. 남편은 여기 짐정리를 대충 도와주고 지난주에 다섯시간 차로 밟아 북쪽으로 올라갔다. 가을부터 강의를 시작하는 그곳에서도 많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는 탓에 아쉽더라도 더 머물 여유가 없어서 서둘러서 올라갔다.

새삼스런 두집 살림이라니...그건 늦은 나이에도 접지 못한 공부에 대한 내 미련때문이라 아들이랑 남편한테 더 미안할 뿐이다. 공부를 먼저 끝낸 남편이 자릴 잡으면 그땐 내 공부를 다시 시작하겠다고 지원했던 몇 학교들중에 이곳이 남편 학교랑 제일 가까운 곳이어서 당분간 떨어진 이곳에서 남편은 남편대로 그리고 난 나대로 제2의 미국생활을 시작하기로 맘 먹은게다. 누가 등 떠밀어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닌데도 정작 남편이 혼자 돌아가는 모습에 코끝이 찡해 왔다. 그러고보니 처음이다. 미국와서 한 일년쯤 지났을 때 한국서 챙겨온 알량한 유학총알(자금)이 바닥나자 여름방학동안 대도시에 가서 웨이터라도 해야겠다고 3개월동안 뉴욕에서 일하느라 떨어져 있었던 그때 이후로는. 아빠를 너무 좋아하는 아들한테는 모르긴 해도 아빠의 자리는 더 크게 느껴질게다. 아들이 나와 같이 지내기로 한 것은 남편이 살게 된 곳보다 내가 공부하게 된 이곳에 한국 친구들이 훨씬 많아서였는데 해서 좋은 한국친구들을 만나서 다행이다 하고 있는데..정작 학교엔 한국친구들이 별로 없고 흑인이 대부분이어서 적응하기가 쉽지 않은가보다. 그런 모습을 후회가 된다. 괜히 데리고 왔나 하는 생각에. 그리고 아들한테 미안하다. 아빠 엄마 공부하겠다고 남의 나라 땅에 와서 빠듯한 살림에 제대로 못 해주고 한국에 있었으면 듬뿍 받았을 할아버지 할머니등 친척들 사랑도 못 받고 늘 한국에 대한 그리움만 안고 살게 하고 있는게. 아빠가 떠나기 전날까지 아빠 안 가면 안되요...하고 어리광을 부리던 아들, 정작 아빠가 떠나시는 날 아침엔 의젓하게 나를 위로했었다. 엄마..괜찮지요..아빠 금방 또 오실꺼니까요..하면서.

이삿짐 푸는 걸 도와주겠다고 먼길을 같이 길동무해준 후배들중에 하나가 그랬다. 이젠 한숨 돌린거 아니냐고..누구말대로 남의 나라 땅에서 바닥은 치지 않냐고. 맨땅에 헤딩하면서 바닥을 쳐봤으니 이제부턴 처음 미국땅을 밟았을 때보다 이래 저래 형편이 훨씬 좋아진거라고...그러니 좀 여유있는 맘으로 공부하라고 말이다.  그래..그렇긴 하다. 8년전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으로도 씩씩하게 잘 살았는데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다소 부실하긴해도 헬멧(?)을 쓴 듯이 든든하긴 하니 조금은 여유로운 또 다른 시작이라고 할 수 있겠지.

그래도..이곳에서의 새로운 생활에 아들이나 나나 어느정도 시간이 필요하겠다 싶다. 시골쥐모자 낯선 도시에 왔으니 옛날 그곳을 잊고 이곳에 적응하려면...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지리라 믿는다. 아들도 나도. 조금은 삭막한 주변에도, 낯선 풍경들이랑 사람들도 그리고 살속으로 내리꽂히는 듯 강렬한 땡볕에도. 그런 햇볕을 올려다보면서도 이곳의 볕은 이 전에 살던 곳의 볕과는 강도부터가 다르다...싶은 걸보니 아직도 맘은 그 옛날 살던 시골에서 머뭇거리고 있나 보다. 어서 적응해야지...우선 저 땡볕부터.  

* 2007년 8월에 끄적였던 글을 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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