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고 보니 나온 지 제법 오래된 영화다. 1988년에 개봉되었으니까. 이 영화를 보려고 맘 먹었던 건 밀란 쿤데라 (Milan Kundera)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Unbearable lightness of being)'을 원작으로 했다는 것과  '나의 왼발 (My left foot)'이나 '아버지의 이름으로 (In the Name of the Father)'에서 봤던 다니엘 데이 루이스(Daniel Day-Lewis)가 전혀 다른 이미지로 나온다니 궁금했다. 한국에서는 '프라하의 봄'이라는 다소 생뚱맞은(?) 제목으로 개봉되었던 걸로 기억난다.

체코 망명작가인 Milan Kundera의 작품에는 그만의 독특한 정서가 있다. 그걸 잘 드러내주는 작품이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농담(The joke)'일게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무심코 뱉은 농담 한마디로 인해 그때까지 누려왔던 것과는 너무 다른 나락의 삶으로 떨어진다는 한마디로 참 재수없는(!) 한 남자의 삶을 그리고 있다. 이 영화가 원작으로 삼았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Unbearable lightness of being)'도 크게 다르지 않다. 국내 의학계 뇌수술의 최고 권위자였던 한 의사(Thomas)가 친구들과의 토론끝에 가벼운 맘으로 신문에 기고했던 글이 그의 인생에 발목을 잡는다. 병원에서 쫓겨난 그는 청소부로 살아간다는 대략의 줄거리를 가진 이 이야기는 한 나라의 정치적 ism이 그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한 개인의 삶에 어느 정도까지 개입할 수 있는 가를 보여준다. 기실 그런 류의 이야기는 우리한테는 그리 낯설지 않긴 하다.

정작 Milan Kundera 본인은 자기 작품엔 어떤 정치적 동기도 없다고 했다지만 내가 읽었던 그의 몇 작품들만으로도 그는 조국 체코의 공산주의라는 체제가 평범한 이들의 삶을 어떻게 좌지우지하고 하루 아침에 밑바닥으로 떨어진 사람들은 그런 체제의 칼날에 어떻게 반응하는 가에..그리고 어쩔수 없이 지배체제의 꽉 막힌 사회의 메카니즘과 그 사회에 팽배한 이데올로기를 그리고 있다는 걸 그의 작품에서 읽어내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특히 그의 소설이 관심을 끄는 이유는 그렇게 한 개인의 삶들을 짓누르고 있을 정치 이데올로기라는 주제들의 무거움을 특유의 희화적이고 풍자섞인 표현들로 거둬내...가벼워 보이지만 결코 가볍지만은 않은 그의 특유한 입담에 있다. 그건 진지한 주제를 바윗덩이만한 무게로 다루는 것보다 그런 진지함을 가벼움으로 더 진지하게 만드는 쪽을 더 좋아하는 개인적 취향탓이다.   

해서 이 영화를 보기전에 궁금했었다.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이 누군지. 그런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의 독특한 정서들을 영화라는 그릇에 잘 담아냈을까...하는 궁금증으로 이 해묵은 영화를 찾아 봤다. 책을 먼저 읽은 터라 잘못(?) 찍으면 영락없는 포르노일 수도 있고 아주 잘 찍으면 제법 쓸만한 예술영화겠다...며 어줍잖은 기대로 말이다. 보고 난 후엔...소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긴 하지만 무엇이든 가벼움으로 일관하는 Tomas를 연기했던 Daniel Day-Lewis와 답답하리만치 진지하기만 한 Teresa를 맡았던 Juliette Binoche의 연기가 이 영화의 맛을 최대치로 끌어낼 수 있었다 싶다.

영화 끄트머리에 가면 알 게 된다. Thomas의 가벼움은 결코 단순한 가벼움이 아니며,  Teresa의 진지함 역시 순전하게 진지할 수 만은 없다는 것을. 처음엔 그 둘의 가벼움과 진지함은 다소 어긋난 것 처럼 보이나 결국엔 자신에게 던져진 피할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그 둘한테서 그런 가벼움과 진지함은 동전의 양면이 아니라 종내엔 서로 마주 하고 있는 통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여자관계에서만은 참을 수 없이 가벼운 Thomas는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번복하겠다는 말 한마디로 이전의 풍요로운 세월로 돌아갈 수 있다는 유혹에도 불구하고 차라리 물걸레를 들고 유리창을 청소하는 그 자리에 남기로 한 Tomas한테도 그의 삶에서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Thomas의 가벼움으로 상처를 받았던 Teresa 역시 한 정치집회에서 찍었던 자신의 사진들이 반정부적 인물을 색출해내는 정부에 의해 이용되었다는 사실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돌아가는 세상일에 그런 그녀의 진지함도 결국 흔들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허긴 굳이 그런 영화적인 상황이 아니라고 해도 삶이라는 게 우리로 하여금 줄곧 가벼울 수 있게..시종 진지할 수 있게..내버려 두질 않다는 것을 우리도 잘 알잖는가... 영화속 이야기이긴 하지만 자신의 가벼움과 진지함이 세상에서 전혀 다르게 받아들여 지고 심지어 악용될 수 있다는 것을..이 두 사람은 아주 비싼 댓가를 치루며 배우고 있다.  Milan Kundera는 그의 소설 초반에서 이렇게 묻는다. "What then shall we choose?,"  "Weight or lightness?"  내 기억으론 그에 대한 해답은 소설의 마지막부분에 있다. .이 영화 역시 그 해답을 후반..Thomas와 Teresa의 삶에서 보여주지만 원작의 맛을 충분히 살리기엔 미진한 감이 있다.

알고 보니 Philip Kaufman은 북회귀선(Henry&Jane)이랑 퀼스(Quills)를 만든 감독이었다. 포스터에는 'A lovers Story'라는 부제가 붙었건만 내 눈엔 그냥 단순한 '남녀상열지사' 라기 보다는 시대와 사회를 잘못 타고 난 두 사람이 각자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사람사는 이야기다. 해서 좋았나 보다. 이 영화처럼 드라마틱한 상황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는 일상에서 부딪히는 수많은 경우들 역시 우리에게 가벼울 것인가..진지할 것인가..중 선택을 요구하고 있긴 별 다르지 않기에. 그네들의 살아내는 모습이 우리네 하고 그닥 달라 보이지 않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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