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 올 때 채 두 살도 안 되었던 아들이 커갈수록 남편과 나는 남의 나라에서 지내는 동안 아들을 어떻게 키워야 할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한다. 몇 년전에, 한인사회를 충격으로 몰아넣던 버지니아텍 총격사건의 조승휘군을 NBC에 그가 보냈다는 동영상을 통해 보면서 가슴 한구석이 먹먹해져오던 그 느낌을 아직도 기억한다. 대체 저 젊은 친구는 얼마나 힘들었으면 저런 선택을 했을까.. 설사 그게 그의 선택이 아니라고 해도..그를 그런 지경까지 몰고 간 그 뭔가를..그런 아들을 지켜보며 감내해야 했을 그의 부모 무너지는 맘이 어떨지..다는 모르더라도 조금은 알 듯해서.

그런 자식을 지켜봤을 부모의 고통을 어찌 헤아릴 수 있으랴. 그 분들처럼 공부가 아니라 살러 오신 분들한테 자식이 어떤 의민지 알기에 더더욱 그렇다. 어떤 이유에서건 생활터전을 미국으로 통째로 옮기신 교포분들은 삶의 목표가 자식을 성공시키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차있다. 세탁소를 하고, 야채가게를 하고, 구두 수선일을 하면서 그분들은 자식들이 당신보다는 훨씬 나은 삶을 살기를..소위 말하는 명문대를 나와 미국사회의 주류로 자리잡고 살게 되기를. 그게 사람들이 말하는 아메리카 드림, 지금은 옛말이 되었다고 해도, 그런 걸게다. 사람들은 이곳에 오면 가방끈이 길어 혹은 체면 때문에 한국에서 였다면 꿈도 못 꾸었을 일들을 하려고 남의 땅에 와서 소매를 걷는다. 고시에 계속 낙방한 남편이 선택한 미국이민길에 오른 지 20년이 지난 내 친구 역시 여기 온지 10년넘게 아침 6시에 일어나 가게 문을 열고 밤 12시에 닫고 들어오는 생활을 주일날도 쉬지 않고 일한 결과 지금은 경제적 여유를 맘껏 누리고 산다. 그런 모습에 가끔 궁금했었다. 만일 한국에서도 그렇게 열심히 살았다면 비슷한 정도로 결국엔 누리면서 살게 되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그런 면에서 미국이 기회의 나라긴 나라긴 하다..부분적이긴 하지만.  

그런 과정에서 자식들을 키우기가, 더군다나 소수인종으로 자긍심을 잃지 않고 키우기는 결코 쉽지 않다는 걸 순간 순간 깨달으면서 우린 머리를 맞대고 고민한다. 우리의 방향은 정해져있었지만 여기서 만난 허나 몇년전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두분과 그 자식들의 삶을 통해 그 방향은 좀 더 확고해졌다. 힘든 시절을 다 겪고 안정권에 접어들어서야 그분들은 깨달으셨다고 말씀하셨다. 어쩌면 당연한 것들을 남의 나라 세상살이에 너무 지쳐 간과하셨다고. 자식 키우는데 필요한 건 넉넉한 돈도 아니고 영어를 잘 하고 학점을 All A를 받아 학교에서 자랑스런 부모로 초청을 받았다고 해서 결코 자랑할 게 아니라는 것을. 당신들은 아침 부터 밤까지 일을 하시는 동안 그 자식들은 자신들이 한국사람이라는 것을 점점 잊어버리고 부모와 점점 멀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어느 순간부턴가 아이들은 영어로 얘기하고 아빠 엄마는 한국말로 대화하는 모습은 그분들뿐아니라 여기 한국가정들에서는 그리 낯설지 않은 그림이다. 오히려 집에서 철저하게 우리말을 시키는 우리같은 이들이 당연함에도 그리 많지 않은 셈이니까. 네살부터 매일저녁을 한글공부를 시킨 덕에 아들은 그런 대로 한국말을 무리없이 한다. 물론 어휘실력도 딸리고 어설프긴 해도. 허나 내가 만난 많은 교포분들은 당신의 아이들이 우리말을 잃어가는 걸 미국시민화되는 과정으로 간주하시는 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시는 듯하다.

한국말을 못하던 아이들은 한국 친구들과 어울리지도 못하고 대학을 갈 즈음엔 대부분이 고향을 떠나 큰 도시에 있는 좋은 학교로 떠났지만 그곳에서 그들이 만난 세계는 자신이 자랐던 예전 고향과는 많이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다고 한다. 어릴적부터 친구였던 그들한테 얼굴색이 뭔 상관이었겠는가. 허나 새로 만난 곳에서 알게 되었다고 한다. 대부분이 끼리 끼리 다닌다는 것을. 잠시 섞이긴 해도.. 결국 피부색이 같은 무리들이 서로 어울린다는 것을. 그제서야 자신이 한국사람도 아니고 미국사람도 아닌 바나나 (겉은 노란데 속은 하얀)라는 걸 뒤늦게 깨달은 그는 공부로 인한 스트레스까지 겹쳐 결국 자살을 시도해서 부모맘에 못을 박았다. 그렇게 이런 저런 일들을 겪고 나서야 깨달으셨지만 이미 머리가 다 큰 자식들을 잡고 앉혀서 우리말이랑 문화를 너는 한국사람이라고 가르치기엔 너무 늦었다고 하셨다.

그런 면에서 남편과 난 아들한테 참 많이 미안하다. 아빠 엄마때문에 차별같은 거 겪지 않고 주류로 살수 있는 우리나라를 떠나 이렇게 소수인종으로 살아가게 해서. 남의 나라에서 잘 키우고 싶다는 우리는 아들이 반듯하고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 하면 좋겠지만 적어도 최소한..어딜가서도 자기가 한국사람이라는 걸 잊지 않고 자긍심을 갖고 살아가길 바랄 뿐이다. 가끔 우리의 교육효과가 지나치게(?) 나타날 때가 있긴 하다. 7살 때였던가..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온 아들이 하는 말.."엄마 미국얘들은 쫌 실리(silly) 해요" '실리'라는 단어를 어리석다로 바꾸기엔 어휘수준이 딸린다는 걸 아는터라 그냥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걔들은 영어 밖에 못하잖아요.." 아들의 대답에 남편하고 얼마나 웃었는지. "엄마..ㅇㅇ는 자기가 미국사람이래요" 여기서 ㅇㅇ는 아들하고 단짝으로 붙어다니던 미국에서 태어난 친구다. 미국에서 태어나서 그렇게 생각하나보다..했더니 "태어났어도 블러드(blood)는 코리안이잖아요" 하며 힘주어 얘기한다. 또 한가지가 더 떠오른다. "엄마 제가 north korea에서 왔어요..south korea에서 왔어요?"하고 묻는다. 그건 왜냐고 물으니 같은 반 친구가 미국은 "north korea"를 싫어한다고 했다면서 그 이유를 묻는다. 잠시 난감했지만..아주 단순화시켜서 얘기해줬었다. 그건 "north Korea"가 뭘 잘못해서가 아니라 미국 말을 잘 안 들어서 그런거라고. 만일 어떤 힘쎈 친구가 자기보다 힘이 약한 다른 친구들은 다 말 잘 듣고 자기가 하자는 대로 하는데 보기엔 별로 힘도 안 쎈데 자기 말을 안 들으면 그 힘쎈 친구가 그 친구를 좋아할까..안 좋아할까..하고 물었더니 아들은 잘못한게 없는데 그러냐고 다시한번 묻고는 엄마의 설명만으로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갤 주억거렸던게 기억난다. 좀 더 크면 알게 될거라고..그때는 그냥 그렇게 넘어갔었다.

미국에서 자란 다른 친구들에 비해 우리아들은 지나치게 '한국적'인지도 모른다. 햄버거나 치즈대신 김치찌게랑 고추장을 좋아하고 학교에서 빵말고 밥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하니. 학교에서는 실수로라도 누가 먹던 컵도 안 만지고 섞지도 않으려는 녀석이 집에 오면 엄마 아빠랑 먹는거니 괜찮다며 가끔은 슬쩍 우리컵에 물을 따라 마시기도 하고 가운데 놓인 된장찌게를 같이 떠먹는다. 아이들끼리는 영어로 놀다가다 한국 어른들께는 우리말로 존대하면서 대답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렇게 학교에선 미국식이고 집이나 한국이웃들을 만나면 한국식으로 완전 적응이 된 우리아들..지금까지는 남의 나라땅에서 참 잘 자라주어 남편과 나는 많이 고맙다. 

작년 여름, 미국온 지 처음으로 그러니까 9년만에 아들은 남편과 한국에 다녀왔다. 그동안 당신 손자가 코쟁이들처럼 한국말도 못해 버벅대고 매운 한국 음식도 잘 못 먹을거라고 예상하셨던 할아버지 할머니랑 친척들은 우리아들의 너무나 한국적인 모습에 놀라워하시며 칭찬해 주셨단. 남편이 아들덕에 기분이 좋았다며 칭찬들은 얘기들은 전해줬다. 한국을 다녀온 후 놀라운 건 겨우 한달 남짓 있었는데도 아들의 한국어 어휘실력이 놀라울 만큼 유창해졌다. 예를 들어 "오히려" "아마도" "당연하지" "역시" 같이 쉽지 않은 부사들을 어찌 그리 적절하게 잘 넣어 구사하는지. 그런 아들의 유창한 우리말 실력에 적응이 덜 된 난 연신 감탄을 해댔다. 물론 그 유창함에 큰 발전은 없었다..그 이후로. 그로부터 일년이 지난 지금 아들의 한국말 실력은 아직도 갈길이 멀다. 그때 물었다. 한국에서 가 본 곳 중에서 어디가 제일 재밌고 좋았냐고 물었더니..아들은 뜻밖에도 목욕탕이랑 찜질방이 너무 재밌었단다. 처음엔 이상했는데..다음에 또 가보고 싶을만큼. 엄마도 꼭 같이 찜찔방을 가보잔다. 
 
남편과 나는 안다. 아직 한국은 아들한테 낯설거라는 걸. 물론 오랫동안 아빠 엄마한테 들은 것들로 어색한 정도는 벗어났을지 모른다. 귀로 들어 마치 잘 알고 있는 듯한 느낌으로 막연하게 코리안 드림을 꿈꿨던 이전이랑 한달 밖에 안되지만 그래도 직접 보고 느낀 한국은 우리아들이 기대했던 이상일 수도 이하일 수도 있을게다. 낯선 곳이어서 오는 불편함도 있었을테고. 그럼에도 다행스러운 건 우리 아들은 모르지 않는다. 할아버지 할머니랑 친척들이 살고 있는 그 곳이 종국엔 우리 가족 모두가 돌아갈 곳이라는 것을. 해서 열에 여섯번은 마지 못해 하는 한글공부지만 매일 매일 시키지 않아도 저녁 시간이 되면 자기가 한글공부책을 핀다. 만일 한국이 아닌 여기서 계속 살게 된다면 우리아들이 부딪혀야 할 것들이 많을게다. 이제 조금 더 크면 지금보다 힘들어 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대신 해줄 수 없는. 해서 소망한다. 그렇게 힘들어서 부대낄 때 아빠 엄마가 아들한테 이제껏 심어 준 것들이 든든하게 우리아들을 잡아주고 버틸 수 있는 힘이 되기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남의 나라에서 십년넘게 살다 보니 자주 혼잣말로 나오는 푸념이 있다. '이건 영어도 안 되는데 한국말도 안 된다'는. 얼핏 들으면 이해가 안 가는 아니 오해받기 딱 좋은 대목이라 그냥 혼잣말로 혹은 동변상련인 이들끼리 농담삼아 하는 푸념이다. 허긴 나도 여기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누군가의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영어가 안 되는거야 그렇다치고 아무리..한국말이 안 될라고.대체 한국에서 살아온 세월이 몇년인데 여기서 고작 몇년을 살았다고 한국말을 버벅거리게 된다는게 이해가 되지 않지 않았으니까. 같은 한국사람인 줄 알면서 영어로 얘기하는 사람들에 대해 심한 거부증세를 보였으니까. 헌데 여기 살아온 햇수가 늘어나면서 그런 엄격했던 잣대의 눈금은 점점 헐거워져갔다.  

영어를 잘 하고 싶은 맘에 의식적으로 삼사년동안 영어만 쓴다면 한국사람들하고 섞이지 않고 지내는 이들한테서 흔히 보여지는 모습인 우리말 할 때 엄..엄..할 수 있겠구나...하는 정도까지 이해하게 된 건 학교가는 시간에만 영어에 노출되어있는, 집에 돌아오면 가족들이랑 늘 한국말을 하는 나 자신조차도 언제부턴가 한국에 있는 가족들이나 친구들이랑 통활할 때 적당한 우리말 표현이 생각나지 않아 더듬거나 그게 뭐지..그거 있잖아...로 상대방의 도움을 받는 증세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에 대해 짜증날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특히 영어를 전혀 모르는 팔순넘으신 나의 오마니랑 통화할 때 전처럼 주고 받던 표현들로 얘기하려고 할 때 마땅한 어휘가 생각나지 않는다. 나이탓인가...여기 산 짠밥탓인가..하다가 나 역시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영어와 우리 말을 적당히 버무려 쓰는데 많이 길들여져있구나. 한국에서 삼십년넘게 살았고 여기선 겨우 10년 살았는데 이런 증세가 나타나는 걸 보니 이젠 남한테 뭐라고 할 주제가 아니다 싶어진다.  

기실 미국에서 오래 된 사람들은 대화에 영어단어를 섞어 쓰는 것에 대한 거부감은 없다. 아니 오히려 그렇게 의식적을 하는 이들이 더 많은 지도 모른다. 기억나는 그림이 몇개 있다. 미국 온 첫해였나. 그때 살던 가족 기숙사 빨래방에서 들었던 한 한국 아주머니가 아이들한테 하던 말씀을 아직도 기억한다. "얘들아..too late이야.. hurry up해야지.." 그때 한국에서 갓 온 내 반응은 도대체 영어야 우리 말이야...였다. 제대로 된 영어도 아닌 것이 그렇다고 우리말도 아닌 표현들은 여기선 많이 들을 수 있다. 어떤 분들은 한문장을 말씀하실 때 조사를 빼고 다 영어단어로 채우시기도 한다. 그런 모습들이 그닥 좋아보이지 않았던 탓도 있고 무엇보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입장에서 우리 (남편과 나)는 의식적으로 그러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다. 집에서 우리말만 쓰게 하는 아들내미한테도 제대로 된 한글을 가르쳐주고 싶은 맘에서다. 그럼에도 가끔 서로에게 그런 증상이 보이면 넘어가지 않고 서로 지적해준다. 그런 증세는 부끄럽게도 남편보다는 내가 더한 듯 싶다. 무심결에 우리 말을 찾기 보다는 그냥 영어단어를 집어 넣어 얘기하는. 아들한테 그러지 말라고 해놓고 어느새 내가 그러고 있는게다. 그럴 때마다 반성하게 된다. 그래도 나도 모르게 물건이 떨어지면 '에구머니" "어머나"가 아니라 "읍쓰"라는 말이 튀어나오는 걸 보면 나도 어쩔 수 없다 싶다.  

영어와 한글을 적당히 버무려 쓰는 것에는 나보다 여기서 자라고 공부하는 아들이 몇수 위다. 처음 학교보낼 때 (여기의 유치원 전 과정, pre-school) 알파벳도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고 그냥 학교에 보냈는데도 영어에 노출되는 시간이 많은 탓인지 영어로 말하는게 훨씬 편한 아들과 친구들이 말하는 걸 들으면 알게 된다. 심할 때는 가령 "game에서 attack했는데.. win했어요" 라던가 "thirsty한테 water drink되요?"라는 식으로 조사만 빼놓고 영어단어로 문장을 채우던 어느 교포분의 화법과 다르지 않다. 물론 그럴 때마다 우린.. 아들의 표현을 제대로 된 표현으로 바꿔서 얘기해주고.. 고쳐서 다시 말하도록 한다. 아들과의 대화에서 그런 교정(?) 절차는 아주 일상적인 것인 우리집 그림이다. 허나 맘 한편으로 이렇게 자꾸 고쳐주는게 오히려 우리말에 대한 흥미를 떨어뜨리는게 아닌가 은근 걱정을 하기도 했었지만 그렇게 하길 한글공부를 시작한 4살 이후부터여서 그런지 아들은 바로 잡아 주면 고쳐서 얘기하곤 한다. 물론 한번에 고쳐지지는 않는다.  

기실 재밌는 건 그런 교정을 아들만 받는 건 아니라는 거다. 아들도 엄마의 잘못된 언어 습관을 얘기해주곤 하기에 하는 말이다. 언젠가 신호등을 보며 얘기하는데 듣고 있던 아들이 하는 말, "엄마..저건 초록색인데.. 왜 맨날 파란색이라고 하세요?" 그러고보니 내 아주 오래된 습관중에 하나다. 모르긴 해도 나만이 아니라 많은 이들이 특히 사십이 넘어가는 나이의 사람들은 같은 증세가 아닐까 싶다. 아들의 지적에 그래..맞어..왜 신호등 색은 초록이 아니라 파란색이라고 하게 되었는지 스스로 의아했던 적이 있었다. 또 한번은 바깥에서 논다고 나가는 아들한테 문 닫고 나가라고 하니까 신발을 신던 아들이 날 쳐다본다. 알고 보니 도대체.. 문닫고 어떻게 나가라는 거냐는 게다. 그렇게 한 두번 지적하던 아들, 엄마의 그런 표현들이 쉽게 고쳐질 증세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는지, 아니면 자기도 익숙해졌는지..요즘은 별로 토를 안 단다. 혹 나중에..우리 아들도 누군가에게.. 문닫고 나가라는 앞 뒤 바뀐 말을 엄마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생각하면 이 또한 스스로 자꾸 경계해야 하는 말 습관중에 하나다.  

남의 나라에서 살면서 우리 말을 제대로 쓰는 것에 대해 좀더 철저하게 의식적일 필요가 있음을 자주 깨닫는다. 더우기 아이를 키우는 부모 입장이라면...더 더욱. 영어와 한글을 그렇게 섞어서 쓰곤 하는 우리들의 무의식적인 표현들이...아이들로 하여금 영어보다 우리 말에 대해 둔감해지게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기실 여기서 생활하는 아이들한테는 우리말보다 영어가 편한 건 당연할게다. 아들이 또래 친구들하고 놀 때 보면 알 수 있다. 어릴적엔 그렇게 익숙해진 뒷끝에 집에 돌아와서도 자기도 모르게 아빠, 엄마한테도 영어로 얘길 할 때도 있으니까. 그럴 때마다 그냥 넘어가지 않고 다시 우리 말로 얘기하도록 지적하곤 했다. "아들, 아빠 엄마가 미국사람으로 보이냐??"..며 장난을 섞어 유도하기도 하고. 그럴라치면 그제서야 아차하는 얼굴로 씩 웃고는... 우리말로 다시 얘기하곤 했다. 물론 요즘은 그런 과도기가 지났으니 집에서는 확실하게 우리말로 얘기하고 있다. 그래도 한국에서 사는 친구들에 비하면 아직은 많이 서툴다. '요'자를 빠뜨린다거나..했을 때도.."어른하고 얘기할 때 붙이는 거는 존댓말써야지" 하고 지적해 주면 아들은 잊어 버렸던 '요'자를 끝에다 붙여 다시 얘기 한다. 가끔은 어미를 바꾸지 않은채로...그냥 끝에다 '요'만 달랑 붙인 덜된 말로. 예를 들어 "엄마..가자요" 라던가.."모모 했다요"처럼 말이다.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12살인데도. 아들..뭐뭐했다요..는 언제 졸업할래..하고 물으면 그냥 씩 웃는다. 우리말이 많이 어렵다면서. 매일 매일 저녁시간에 하는 30분 한글 공부 때마다 아들은 어려워요..를 입에 달고 한다.  

그래도 기특한 것은 어려워도 하기 싫어도 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는 게다. 그렇게 하기 싫으면 좀 쉬자고 해도 아들은 그냥 하겠단다. 그 이유는 자기가 '한국사람'이니까..한글을 모르면 안 된다는게다. 내 아들이지만 참으로 기특하다. 주변 사람들중에 우리가 너무 엄하다고 하지만...말하는 습관에 대해서 만큼은 우리 자신한테나.. 아이한테나.. 좀더 엄격해질 필요가 있다 싶다. 그런 아이들의 모습이나 우리 모습에 관대하게 넘어 간다면 먼후일 아이들은 영어로 얘기하고 아빠 엄마는 우리말로 얘기하다가 결국 최소한의 대화만 나누게 되는 '의사소통 불능'의 지경에 이를 수도 있다는 걸 알기에. 그게 흔하게 보아온 남의 일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모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사소한 것에서부터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닌게다. 더군다나 그 나라의 말을 능숙하게 잘 한다고 해서 그 나라 사람이 될 수는 없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가끔 여기서 지내다보면 영어를 잘 한다는 이유로 마치 미국사람이라도 된양 처신하는 이들이 있다. 물론 영어를 배우기 위해서, 혹은 공부를 하기 위해서 온 유학생들에겐 '영어'가 목적일게다. 허나 영어가 다가 아닌 것을, 모르고 있는 듯 해 안타까울 때가 많다.  

우린 그렇게라도 일상적으로 '길들여 질수 있는' 말들에 민감해지고 익숙해 지지 않으려고 경계하는 것이 남의 나라 땅에 살면서 우리의 아이한테..그리고 우리 자신한테 뿌리가 '한국인'임을 잊지 않게 해주기 위해서다. 우리 자식을 영어만 잘 하고 자기가 어느 나라 사람인가를 모르는 속칭 겉은 노랗고 속은 하얀 '바나나'로 키우지 않기 위해 부모로서 포기하지 말아야 할 최소한의 것이라는 생각에서 일상적이고 사소한 것이라도 그 경계의 끈을 놓치 않으려 하는 게다. 그래야...우리아들이 남의 나라땅에서 소수인종으로 살게 되더라도 주류와의 '다름'에 대해 움추리기 보다는 그 '다름'을 자부심을 갖고 장점으로 받아들일 줄 알길 소망하면서 말이다. 그건 남의 나라땅에서 자식을 키우는 부모들이 자식들한테 심어줘야 하는 자존감의 뿌리이기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새삼스러울게 없는 말이지만 여기서 산 짠밥이 한해 한해 보태어질 수록 절감하는 건
언어는 단순한 기호가 아니라는 거다.

다른 나랏말을 배우는데 있어 일상생활의 기본적인 수준의 표현들은 반복적인 'practice'로 익혀질 수 있지만
그게 어느 정도의 수준에 달하게 되면 누구나 부딪히는 벽이 바로 '문화차이'일게다.

물론 우리같이 머리가 다 굳은 후에..쉽게 말해..늙어서 남의 나라에 온 이들한테는
그나마 연습만으로 해결 될 초급표현들도 조차도 쉽지 않을 때가 많지만..

미국대학은 외국학생들의 영어실력을 평가하는 잣대로 TOEFL 점수를 요구한다.
이 시험이 수업을 따라 갈 수 있느냐 없느냐를 가름하는 듣고, 말하고, 쓰기를 평가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허나 몇년 전까지만 해도 이 시험은  'listen and comprehension', 'written expression', 'reading'이었는데
최근 시험의 형식이 Internet으로 바뀌면서 본래의 의도대로
흔히 우리가 말하는 문법(writeen expression)이 빠지고 'writing'이랑 'speaking'으로 바뀌었다.

평소 나 역시 ETS의 독점과 횡포에 침을 튀기는 이들 중에 하나지만  이전 시험형식의 문제점에 대한 지적과
시험형식의 변화엔 긍정적이다.  그건 과연 이전의 시험형식으로 그 사람의 영어실력을 제대로 평가하기엔
문제가 많다데 생각이 같기 때문이다. 그건 여기서 토플은 고득점이라는데 일상생활에 필요한 표현조차
쉽지 않아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나 역시 크게 다르지 않기에 하는 얘기다.
그에 비해 점수가 낮아도.. 별 무리없이 대화할 수 있는 친구들을 주변에서 많이 봤기에..

허니 학생을 뽑는 학교 입장에서 보면 높은 토플점수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게 된거고 
그런 학교의 요구에 따라 ETS는 아시아 권 국가들의 점수밭인 문법을 빼고
취약지구라고 할 수 있는 '말하기'를 필수로 집어넣은게다.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 얘기하자면 
듣고 쓰고 읽기의 경우...기실 어느정도 짠밥이 되면 저절로 귀가 뚫리게 마련이다.
처음엔 연음(slur)때문에 안 들리던 말들이 들리게 되고 그러기 위해 제일 좋은 교재가 바로 TV다.
나같이 TV랑 안 친한 사람도 온 신경을 집중시켜가며 봤으니까..결국 그 버릇 남 못 줘서 오래 못 간 나에 비해
TV랑 상당히 많이 친한 남편의 경우 지금은 나보다 훨씬 잘 듣게 된 게 TV 교재(?)덕이라는 건 인정한다.
읽고 쓰기의 경우도 학생이라면 질리도록 읽게 되는 페이퍼나 교재들덕에  
점점 더 매끄럽고 다양한 표현들로  페이퍼를 쓸 수 있게 될게다.

물론 writing 역시 speaking만큼이나 쉽지 않지만.
그러나 말하기의 경우... 
더군다나 쉬운 일상의 표현들이 발목을 잡는 경우가 허다하다.
성문종합영어 세대인 나는 여전히 문법이나 '쓰기영어'에 익숙해있어서 그런지
처음 여기 왔을 때.. 제일 어려웠던게..presentation할 때였다.
 

그때 긴장한 나는 페이퍼에다 썼던 표현들을 그대로 읽다시피 했었다. 그때 듣던 친구들의 반응은
대체...제가 무슨 얘기를 하는 건가..하는 그런 얼굴들을 쳐다보면서 목까지 빨갛게 달아올랐었다.
그 다음부터는 문어체들을 구어체로 옮겨 발표도 가능한  일상적인 쉬운 표현으로 하려고 했었다. 
제일 어려운 건 토론(discussion)이다. 특히 미국 젊은 친구들이랑 토론할라치면...
그네들의 입에서 쏟아지는 그 암호같은 slangs을 이해하기가 정말 힘들었다.

물론 얼굴의 두께가 만만찮은터라... 겉으론 전혀 동요하지 않은 척...
니들 하는 말.. 다 이해한다는 느긋한 표정의 포카 페이스를 하고 앉아 있긴 했지만...
머릿속은 그네들의 속사포같은 영어가 엉켜....토론의 갈피를 잡는데.. 진땀을 빼기 일쑤였으니까.

그런 우리 노땅들에 비해...아이들의 영어 익히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다..
누구말대로 그네들은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그대로..따라하고...더듬거리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고
아무한테나.. 어설픈 영어를 주절대기 일쑤인.. 아이들을 보면... 어떻게 해야 하는 지...
그 '자세'들을 알 수 있다.

우선... 아이들은 영어에 대해 '무식'하다면
무엇보다 '용감'해질 필요가 있다는 새삼스런 진리(!)를 환기시켜준다.
여기서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은 한번쯤은 겪어보았을게다.  
자기 아이가 또래 미국얘나 미국 사람들한테 보란듯이 덜된 영어를 떠들어대는 것을
그때.. 무슨 얘긴지 도통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미국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괜히 그네들의 부모들 얼굴이 더 화끈거릴데다. 나 역시 예외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이런 그림은 제대로 된 영어를 구사하기 이전에 아이들이 거치는 필수과정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시행착오를 통해 아이들은 또래얘들과 어울리는데 필요한 표현들을 익히게 되고
아주 짧은 시일안에 미국 친구들과의 의사소통에 전혀 문제가 없을 정도가 된다.
시행착오를 쪽 팔려하지 않는 이 배짱... 부럽기 짝이 없는 덕목아닌가...
지금이 만으로 12살인 아들이 어렸을 때 친구나 어린 또래얘들이랑 놀 때
녀석들이 쏟아내는 엉터리 영어를 듣고 있다보면  웃지 않을 수 없다.

그네들은 자기네들이 문법적으로 옳은 표현을 써야 한다는 거나
자기의사를 표현하는데 사용되는 모든 단어를 다 알아야 한다는 식의
어른스런 강박관념 같은건 별로 키우지 않는듯이 잘 모르는 표현들은 거침없이 우리말로 대신 쓴다.
그리고 재밌는 것은 그 말을 들은 미국얘들은 그런 broken 표현들을 알아 듣는다. 별 무리없이.. 
 

몇가지 예로...단어가 딸리는 한국 꼬마들은
Can you 묶어 this?,
where is my 신발?,
Are you going to 산책?,
I'm gona 달려...
등과 같은 되도 않는.. 웃지 못할 표현들을 거침없이 내뱉는다.
그럼에도 미국얘들은 이를 별개 단어가 아니라 상황에 따라 하나의 context속에서 이해하기 때문인지..
그네들의 질문과 요구를 다 이해하고..끈을 묶어주고..신발을 찾아주고.. 고개를 끄떡인다. 
 

그래서..우린 짠밥영어를 무시할 수 없는거다.
이곳에서 짠밥이 오래되다 보면.. 하나하나.. 그 낱낱의 표현들이 다 들린다기 보다는
맥락속에서 주고 받을 수 있는 대화를 짐작하게 되는 능력이 쉽게 눈치밥에 관한한
고수가 되기 때문일게다.

남편의 지론...
영어를 포기하니 들리더라는 얼핏 듣기엔 '선문답'같은 말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 싶다.

왜냐하면 우린 모든 표현들을 다 들으려고 개개의 단어들에 집착하다  
결국 그 말의 흐름을 놓치는 경우가 많은데....그의 말대로 디테일을 적당히 포기하고 들으면...
오히려 굵은 줄기들을 잡을 수 있다는 그의 말은 얼핏듣기엔 잘난 척한다는 비난을 면키 어려울 듯 싶지만
한편으로는 공감가는 대목이다. 나 역시 소소한 표현에 대한 집착을 놓아버리고
한 발자욱 물러나 전체 맥락을 이해하면 진짜 잘 들린 적이 있기에 하는 얘기다.

허나 우리처럼 머리굳은 어른들의 말하기는 어찌되었건간에 쉽지 않다.
아이들처럼 적극적인 자세로.. 틀려도... second language니까 그럴 수 있다는
느긋함을 갖고 열심히 떠들어 대다보면...언젠가는 삼박자가 골고루 갖추어진 제대로 된 영어를
구사할 수 있지 않을까 ...(I hope so..)

이제 우리 아들내미는 영어에 제법 익숙해져서인지
가끔 우리의 한국 본토배기 발음을 교정해주기에 이르른다.
요즘들어 조예준은 엄마의 r과 l 발음이 틀리다며 엄마의 구박에도 굴하지 않고 열심히 교정해준다.
내 귀엔 별 차이가 없구만... 구신같이 잡아내는 녀석이 처음엔 신통하다
요즘은 귀찮아 지기에 이르렀다.
아마.. 이 녀석도 적어도 영어 '발음하기'에 관한 한... 엄마보다 자기가 한수 위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듯하다.

그러나.. 난 아이들은 점차.. 그 수준이 높아질수록 문화적 코드의 차이를 느낄 거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십년을 살았다고 해도 native를 따라가지 못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그런 문화적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일게다.

그럼에도 그런 차이만 어려울 정도의 '경지'에 이르려면... 얼마나??
아마도 내 수준을 볼 때 여길 뜨는 그 순간까지도 제대로 된 '영어'를 구사하는게 쉽지 않을거라는 걸 안다.
물론 글쓰기의 경우.. 자꾸 읽고 쓰니까.. 조금씩 나아지는 걸 느끼겠지만
더더욱 집으로 돌아가면 한국말만 써야 하는 결혼한 사람의 경우...
영어를 잘 하게 되는 건.. 요원한 '희망사항'으로만 남을 듯 싶다.

그럼에도...가끔 내가 영어를 못 하지 않는다는(?) 착각이 드는 건......
이건 순전히 짠밥탓이고.. 적당히 두꺼운 내 얼굴탓일게다...
말그대로 착각임에도 불구하고...영어 표현 공부를 접은 게 얼마나 오래되엇던가.
해서 매번 방학 계획에 난 새삼스럽게.. 영어 말하는 연습을 집어넣었다.
그러나 난 안다. 그게 단순한 표현부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얘네들이 쓰는 표현들과는 다른 어딘가 어색하다는 걸....그리고 그게 서로 다른 문화에서 살아왔다는게
가장 큰 이유라는 걸...그걸... 깨기는 쉽지 않다는 걸...여길 뜰 때까지...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그러게..돈도 없이 유학은 왜 왔데?"

누구는 그렇게 얘기했었다. 우리가 아는 누군가가 돈 없어서 고생한다는 식의 뒷담화가 오가다 보면 으례 누군가의 입에서 툭 하니 던져지는 저 말을 들으면 우리가 바로 그 돈도 없으면서 더군다나 장학금받을만큼 똑똑하지도 않으면서 유학이런 걸 온 주제들이라서 그런가..입맛이 쓰다. 허나..현실적으로 보면 전혀 틀린 말은 아니다. 돈도 없는데 누가 억지로 공부하라고 등떠밀어서 온 유학이 아닌바에야 그만한 고생할 각오는 하고 와야 하는거니까. 우리도 그랬으니까. 자기가 하고 싶어서 왔으니까 그 정도의 고생은 감내해야지..그렇게 고생할 지 예상 못했냐는 식의 그런 말들의 이면엔 유학이란건 주머니가 넉넉한 자들만이 꿈꿀 수 있고 해낼 수 있다는 다는 식 편견이 보인다. 적어도 내눈엔. 허나 그렇다고 가진 돈도 없고 장학금을 받을 만큼 똑똑하지도 않은 우리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유학이란 걸 꿈꿔보지도..시도해보지도 못한다는 건가..하는 맘이 불끈한다. 기실 그런 편견을 깨주는 가난하지만 성실하게 유학생활을 버쳐나가는 청춘들이 주변에 많다. 가진 것 없고 학교에서 돈 받아서 올 만큼은 안 되었지만 그래도 하고 싶다는 그 맘 하나만 갖고 버티는. 그 맘이 진짜 공부하고 싶은 열정이건.. 남들이 하니까 나도 해보고 싶다는 바람이건 간에 일단 안되는 형편에도 불구하고 저지를 수 있는 용기..그리고 무엇보다 저지르고는 감당못해 우왕좌왕하거나 공부하고 싶은 맘보다 바람이 더 많다보니 결국은 공부를 접고 불법체류자 신세로 사는 이들도 있긴 하지만 꾸준하게 자기 자리를 지키면서 결국은 졸업하고 좋은 직장을 잡거나 공부를 계속하는 이들이 적쟎다. 물론 워낙 없이 저지른 일들이니까 초반 고생은 피할 수 없지만 그래도 그렇게 어느 정도 힘든 시간을 겪고 나면 다 길은 있게 마련이다. "다 길은 있다"...남들은 똥배짱이라고 부르지만 밖에서는 안보이지만 그 안에 들어서면 길이 있고 방법은 다 있다는게 내 세상사는 믿음들 중에 하나다. 실제로 처음엔 자기돈으로 학비를 대야 했지만 나중에 좋은 성적으로 장학금을 받거나 학교에서 일할 기회가 생겨 조금씩 나은 조건에서 공부할 수 있다. 시간이 좀 걸리긴 하지만...그래도 내돈 들이지 않고 부모님한테 더 이상 손 벌리지 않고..남의 나라 돈으로 공부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예들이 우리주변에 많으니 혹 형편이 안되서 유학을 접는 누군가가 있다면 난 꼭 그 얘길 해주고 싶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허나 현실적으로 그런 이들이 많진 않다. 물론 지극히 내 개인적인 경험에서 하는 얘기다. 중서부 한 주립대학에서 공부하면서 생활하고 겪은...그리고 이 남부로 내려와서 아직도 공부라는 하면서 보고 듣고 겪은..어찌보면 지극히 제한적인 경험이긴 하지만. 우리 주변엔 그렇게 고생스럽게 공부를 하는 한인유학생들 보다 여유있는 학생들이 더 많았으니까. 그런 이들의 눈엔 학비를 벌기위해 여름방학동안 뉴욕에서 웨이터를 하고 동네 야채가게에서 점원일을 하고 졸업할 때까지 학교 조교일을 하고 근로학생(student worker)으로 학교에서 청소일(janitor)을 하고 가죽옷 가게에서 아르바이를 했던 우리 부부의 유학생활이 유난스러워 보였는지...어떤 이는 우리한테 '수기'를 쓰라고 권하기도 한다. 한국에서 보내주는 돈으로 혹은 이미 갖고 있는 돈으로 넉넉하게 혹은 불편하지 않을 만큼 남의 나라에서 공부를 하는 그네들 눈엔 우리의 유학생활이 퍽이나 남달라 보였던게다. 허나 그렇게 살았던건..주머니가 넉넉하지 못해서도 있었지만.. 이 나이에..연로하신 부모님들한테 용돈도 보태드리지 못하는 데..우리가 자급자족해야 해야 한다게 우리의 생각이었다. 물론 장담할 수는 없다. 시댁이나 친정이 넉넉하셨다면..정말 힘들었을 때 금전적인 도움을 요청했을 수도 있을테지만 어느 정도 다 지나온 요즘에 와서는 힘들긴 했지만 그렇게 도움받지 않고 우리끼리 해낼 수 있었던 게 더 값진 경험이었다는데 남편도 나도 공감한다.  

허긴 유학생들 대부분이 상당히..좀..그럭 저럭 '있는 집' 자손들인 건 분명했다. 특히 장학금없이 등록금이나 생활비를 다 부모님들의 원조에 의존했던 학부생들 대부분은 다들 여유있어보였다. 그래도 우리랑 가까이 지냈던 젊은 친구들중엔 그런 부모님들이 보내주신 돈을 헛되게 쓰지 않으려고 낭비하지 않고 알뜰하게 지내는 친구들도 있지만 많은 친구들은 그런 여유를 즐기면서 지낸다. 새차를 뽑고 방학마다 미국 여기 저기 놀러다니고 때론 가까운 카지노에 가서 게임을 즐기면서. 누군가 그랬다. 학교 타운에서 차장사(car dealer)하는 이들사이엔 학기초가 되면 새로 정착하는 한국사람들이 최고의 고객으로 친단다. 이유인즉은 방금 시장에 나온 새모델을 그것도 신용카드가 아닌 뭉텅이 현금을 내고 구입하는 대부분이 외지에 자녀들만 두고 가는 한국부모님들이라니 그네들한테야 봉이나 다름없는게다. 소비가 미덕인 자본주의 나라에와서 자기 돈으로 그렇게 누리고 산다는 데 누가 뭐라 하겠는가. 그건 가타부타 할 얘기는 전혀 아니다. 허나 그런 여유로운 경제적 뒷받침이 자식의 유학생활에 그리 긍정적인 도움을 주는 것 같진 않다. 그건 공부보다는 놀꺼리..술문화나 밤문화 혹은 도박문화랑 더 친근한 유학생활을 보내게 하는 원동력(?)중에 하나가 바로 그런 금전적인 여유로움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오히려 다큰 자식이니 이제 혼자 힘으로 해보라고 절제된 생활을 가르치려고 하시는 멋진 부모님들도 계시다.  

물론 그런 부럽쟎은 환경속에서도 세상경험을 한다는 차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제법 철이 든 젊은이들도 있다. 한 처자는 집 형편이 그렇게 힘들지도 않건만 자기힘으로 해보고 싶다며 졸업할 때까지 아르바이트를 쉬지 않고 했다. 물론 우수한 성적과 함께. 허나 남의 나라에서 공부를 하면서 아르바이트까지 해내려면 그것도 한두달이 아니라 끈질기게 해내려면 왠만한 절박함갖고는 쉽지 않다. 남편이 여름방학 3개월동안 뉴욕에서 웨이터를 하면서 학비를 벌었다는 말에 관광도 할겸 경험삼아 자기들도 한번 해보겠다며 남편의 조언을 받고 뉴욕을 떠났던 청춘들중 실제로 일해서 학비를 벌었던 이들은 한명도 없었다. 오히려 돌아오는 그네들 손엔 뉴욕 명품가게에서 구입했음직한 물건들이랑 그곳에서의 여행했던 뒷얘기들뿐이었다. 남편말대로 절박하지 않은 이들이 버티기엔 쉽지 않은게 유학생활중의 아르바이트일게다. 더군다나 그런 놀거리가 많은 대도시에서는 더더욱.

이에 비해 결혼을 해서 가정을 갖고 있는 대학원생들은 생활력이 강하다. 거의 대개가 입학할 때부터 학비를 면제받고 일주일 20시간씩 조교일을 하면서 공부를 한다. 지역마다 다르겠지만 적게는 한달에 800불에서부터 많게는 이천불넘게까지 받는 그 조교월급으로 생활을 한다. 남편이 학생이었던 시절 우린 한달에 평균 천오백정도 되는 돈으로 한달을 살았다. 한국돈으로 백오십만원정도되는 돈으로. 그 금액엔 내가 아르바이트를 해서 보탠 삼백불정도의 돈이 포함되었다. 그 돈에서 생활비랑 공과금을 빼고 나면 남는 돈은 한 사오백불정도. 한국돈으로 환산하면 오십만원남짓한 돈으로 한달 생활비를 해야 하니 식비빼고 나면 남는 돈으로 한달을 살기란 참으로 빠듯함에도 한국집에서 보조없이 우리처럼 자력으로 살아야하는 유학생들은 특히 그 안사람들은 그런 빠듯한 가계를 꾸려가느라 알뜰하기 그지없다. 같이 모여앉아 얘기하다보면 어디서 세일을 싸게 하고 어느 가게가 물건을 더 싸게 파는지를 알려주는 알뜰주부들이 늘 있었으니까. 아마도 대부분 주립대학에서 공부하는 대학원생들의 대부분은 다들 비슷한 형편들이었을게다. 

그런가 하면 혼자 몸도 아닌 온 가족을 데리고 온 대학원생인데도 조교자리없이도 한국 집에서 보내주는 돈으로 학비와 생활비를 하며 여유있게 살다가 졸업하는 있는 집 이들도 많았다. 그런 집들은 경제적인 여유로 인해 한국에서 처럼 온갖 과외를 다 가르친다. 재즈댄스에다 바이올린 피아노 등등 해서 많게는 여덟까지 종목(?)까지 과외를 시킨다는 집도 있었으니까. 특히 그런 집에선 자기 아이들한테는 세일하는 옷은 절대 안 사입고 방학때 되면 여기 저기 놀러다니는. 해서 주변 다른 가족들이 참으로 많이 부러워했었다. 물론 그네들도 그 나이에 더군다나 혼잣몸도 아닌 온 가족들이 지내기 위한 생활비에다 한학기 생활비를 다 보조받으면서 살아야 하는 속내도 나름 안 편했을게다. 그렇게 시부모님들의 지원을 받아가며 살던 한 친구의 속앓이를 들어본 적이 있던터라 어찌보면 한국 부모나 형제한테 손 안 벌리고 자력으로 살아내는게 몸은 고되더라도 맘은 편하겠다 싶었으니까.

그렇게 여유로운 유학생활이 아니라 고생을 할 각오로 오는 누군가 있다면 고생할 맘의 각오 말고 반드시 필요한 마음 가짐이 있다. '절대로 딴길로 새지말기. 잠시 샛길로 새더라도 제자리로 돌아오기.' 그런 다짐이 필요한 건 공부를 하겠다고 남의 나라를 밟은 적쟎은 젊은이들이 이런 저런 이유로 샛길로 새서는 원래 자리로 돌아오지 않는다데 있다. 아니 한번 새면 돌아오지 못한다는게 더 맞는 말일게다 . 그 한 예로 뉴욕에서 아르바이를 했던 남편을 통해 들은 바에 의하면 대도시인 그 곳에서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한인 젊은이들 많다고 한다. 대부분이 한국가게에 사업체에서 일하는데 불업취업인 셈이다. 원래 그들이 미국땅을 밟은 목적은 공부다. 영어공부를 포함해서. 헌데 그들의 하루 일과 대부분은 공부대신 아르바이트에 쓰인다고 한다. 어떤 이는 아예 공부를 접은 채로. 특히 그렇게 하루 일하고 나서 손에 현금 쥐는 맛을 들린 청춘들은 일이 끝나면 돈을 쓰러 나간단다. 놀거리가 많으니 유혹이 그만큼 많은게다. 그런 모습을 보고 온 남편...주변 청춘들한테 그런다. 차라리 도시보다 이런 공부밖에 할게 없는 시골에서 하는 유학생활이 더 낫다고. 그건 너무나 많은 청춘들이 왜 자기가 여기에 왔는지 원래 이유를 잊어버리고 하루살이같이 살고 있다고 한다. 불법체류신세를 감당하면서말이다.

허니 유학을 막연하게 꿈꾸고 있는 누군가에게...기꺼이 고생할 맘이 있다면..딴길로 새지 않을 각오만 있다면.. 더군다가 젋다면 저질러보라고 권하고 싶다. 물론 일장일단은 있다. 벌어서 해야 하므로 돌아가다 보면 남들보다 시간이 더 걸릴 수도 있고..그 과정에서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힘들 수도 있다. 여기까지 와서 배운 영어가 남의 나라 땅 하나도 밟아보지 않고도 훨씬 잘 하는 이들에 밀릴 수도 있다. 그렇게 힘든 과정에서 얻는 경험이라는게 과연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지는 각자 판단의 몫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한국을 떠나오기 전에 먼저 와서 공부하고 있던 대학원 동기한테 물은 적 있다. 거긴 평균 한달 생활비가 어느정도 드냐고. 그때 동기녀석의 대답은... 수준(?)에 따라 많이 차이가 난다..였다. 그땐 그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씀씀이에 따라 줄일 수 있는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감이 안 왔다. 허나 막상 살면서 드는 생각은 내가 했던 그 질문이 참 대답하기 뭐했던 막연한 질문이었겠다는거다. 왜냐하면 그 녀석말 그대로 우리의 눈높이에 따라 생활비가 많이 절약될 수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좀 더 나은 품질의 먹거리를 생각할 주머니의 여유가 있다면 우리가 살던 동네에서 흔히 말하는 '돈 좀 있는' 사람들이 간다는 유기농(organic)가게에서 계란한줄에 월마트보다 세배가 넘는 돈을 주고 사먹으면서 살수 있는 반면 우리처럼 주머니 사정이 빠듯한 헝그리(hungry) 유학생들은 그저 만만한게 월마트(WalMart)이다. 가격이 싼 것도 이유가 되지만 또 다른 이유는 그 안에서 필요한 대부분의 것을 해결할 수 있는 말 그대로 원스톱(one-stop) 쇼핑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차가 없는 경우엔 그런 월마트은 더 없이 유용하다. 여기 저기 안 들리고 한 걸음에 일주일치 장을 다 볼 수 있으니까. 헌데 그런 한번에 해결할 수 있다는 잇점만 아니라면 기실 월마트보다 더 싸게 파는 곳들이 참 많다. 그 대부분은 월마트같은 대형 체인점이 아니라 동네(local) 가게들이다. 우리가 살던 그 동네에서는 먹거리를 주로 팔던 알디(ALD)라는 가게나, 동네 야채가게, 일반 공산품은 Dollar Tree, Dollar General (우리로 치면 천냥하우스)에 가면 아주 착한 가격의 물건들을 구입할 수 있다. 물론 품질에 대해 그닥 기대를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허나 그런 가게들이 몰려있는 것도 아니어서 싸는 이유로 그 가게들을 일일이 찾아다니기가 가난한 유학생들에겐 결코 쉽지 않다. 길에다 쓰는 시간이랑 기름값등을 따진다면 그닥 효율적인 장보기가 아닌 셈이다. 허니 한곳에서 대부분의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월마트이 우리처럼 가난한 유학생들한테는 제일로 만만한 장터다. 지금도 우리는 월마트가 제일 편하다.  

어느 동네든지 싱싱한 야채나 과일을 아주 싼값에 파는 동네(local)가게는 다 있게 마련이다. 한국에서 챙겨온 총알이 다 떨어져서 남편이 일년동안 아르바이트 했던 곳도 그동네 자그마한 야채 과일가게였다. 거기서 알게 되었다. 좀 상한 야채나 채소를 한묶음으로 모아서 1불에 내다놓으면 가난해뵈는 흑인들이나 중국학생들이 거의 다 사간다는 것을. 그 가게는 학교랑 가까이 있는데다 2불이나 3불어치만 사도 싱싱한 야채나 과일을 제법 한봉지 사갈 수 있어 차없는 가난한 외국학생들이 자전거를 타고 와서 자주 애용하곤 했었다. 짐작컨대 부자들이 잘 간다는 유기농가게의 가격과 비교해 보면 이런 작은 동네 가게를 이용하는 것도 생활비를 크게 절약하는 한 방법이다. 허니 동기녀석의 말대로 아주 저렴하게 살려고 작정만 한다면 크지 않은 금액이라도 식품비에서도 허리띠를 졸라매고 살 수 있다.

기실 가장 많은 돈을 절약할 수 있는 건 '집세'에서다. 남편과 나는 아들내미가 없고 우리둘만 있었다면 트레일러하우스(trailer house: 자동차모양의 이동식 주택)에서 살았을게다.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춥다지만 한달 집세가 삼백불정도라니 몫돈을 절약할 수 있었을테니. 허나 정작 거기서 살아본 이들에 따르면 전기세가 장난이 아니어서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는 얘기도 들었고 아이들을 키우기에 주변환경이 그닥 좋지 않다 싶어..가끔은 우리 수준엔 좀 과하다 싶었던 학교 아파트에서 쭈욱 살았었다. 학교 아파트 (on-campus)는 외부 아파트에 비해 안전하고 무엇보다 학교 전기시설을 이용하기 때문에 전기세같은 공과금(utiliity)이 아주 쌌다. 그때 우리가 살던 곳은 방 두 개짜리의 30 평 정도되는 평수였는데 집세는 작년에 550불 정도였고 여름에 트는 에어컨이랑 겨울에 히터등을 포함한 공과금은 전기세랑 전화세 인터넷과 케이블등을 포함해 150불정도였으니까 집세랑 공과금으로 한달에 최소 800불정도가 나갔다. 헌데 그 가족 아파트가 얼마나 널찍하고 무엇보다 아이들 키우기에 좋은 환경이었는지 다른 학교로 전학(?)을 와서야 알았다. 그러기 전까지 우린 학교 가족 아파트라면 다 그렇게 왠만하게 살만한 곳인 줄 알았으니까. 허나 지금 살고 있는 아랫동네로 이사와서야 알았다. 우리가 살았던 그 학교 아파트가 아이들이 뛰어놀기에 부족함이 없는 풀밭과 놀이터 그리고 안전한 동네였는지를.

그렇다고 지금 살고 있는 학교 아파트가 그리 형편없는 건 아니다. 경제적인 면으로 치면 아주 저렴하니까. 건물이 워낙 오래되어 낡고 넓은 놀이터나 같은 쉼터가 없어 좀 삭막해 보이는 주변환경에 적응하는데 좀 오래 걸리긴 했지만 한달 집세(550불)에 전기세뿐만 아니라 전화세, 인터넷이랑 케이블 비용까지 다 포함되어 있으니 너무 착한거다. 그거 하나보고 참는다..아침에 일어났을 때 어디선가 출몰한 바퀴벌레들의 흔적도.. 오래되고 낡은 문들도...처음엔 영 적응이 안 되더니 점점 익숙해져서 그냥 저냥 저렴한 맛에 살아지는 기숙사다. 만일 전화세, 인터넷, 케이블등 공과금을 있는 그대로 다 내야한다면 당분간 내 공부때문에 윗동네에서 따로 떨어져 살고 있는 남편이랑 나랑 사는 데 드는 한달 생활비에 허리가 휘청했을게다.

이런 가난한 우리보다 더 심한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중국학생들이다. 그전에 살던 가족 아파트 기숙사는 평수도 제법 넉넉한 덕에 중국학생들은 그 한 집에서 두세가구가 모여 살면서 생활비를 절약한다고 했다. 물론 걸리면 쫓겨날 감인데 일단 입주를 하고 나면 그런 호구 조사는 안 하는 동네였으니 다들 눈감아 주는게다. 중국학생들 대부분은  학부생이 아니라 학교로부터 장학금을 받는 대학원생들이 많았는데...그럼에도 몸에 배인 절약정신에 집세랑 먹거리에서 절약한 돈을 중국 본토에 남아있는 가족들의 생활비로 보낸다는 말에 우리는 외쳤다. 졌다 (you win)라고. 그런 중국학생들의 무서운 헝그리 정신은 잘 살고 넉넉한 이들한테는 찌질한 모습이었겠지만 늘 주머니가 가벼웠던 우리한테는 적잖은 위로가 되었던게 사실이다. 우린 적어도 저 정도는 아니잖냐..는 그 어줍잖은 안심같은거 말이다..

옷사는 데 드는 돈도 여기선 눈높이에 따라 충분히 절약할 수 있다.  여기서 정상가를 주고 물건을 사는 사람들은 적어도 유학생들중엔 드물다. 태어날 때 은수저물고 나온 있는 집 자제들이야 논외로 치고... 대부분이 거침없이 싸게 파는 세일을 기다린다. 남편과 나는 한국에서 가져온 옷들을 십년이 다 되어가는 데도 아직도 입고 있으니 그 상태가 좋을리가 없지만 일단 편안한게 제일인고로. 그리고 여기서 산 대부분의 옷들은 한 시즌 끝무렵 거하게 하는 할인세일에서 장만하거나 그도 아니면 중고품을 파는 굿윌(goodwill)에서 대충 사서 입곤 했다. 우린 굿윌의 꾸준한 단골이었다. 더군다나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아들내미 옷들은 세일을 할 때 다음 해에 맞을 만한 칫수의 옷을 미리 사두었다가 입히곤 한다. 여기서 세일이란 그냥 50% 세일 정도가 아니라 얘네들 표현으로 clearance or crazy sale을 할 때를 말한다. 정상가로 40불넘게 했던 겨울 점퍼를 7불에, 한 여름에 20,30불하던 여름 샌달이 겨울 초입게 가면 5불도 안 되는 가격으로 살 수 있다는 걸 아는데 누가 정상가를 주고 사겠는가. 그런 겁나게 착한 수준의 할인들은 우리같은 가난한 유학생들한테 아주 요긴함은 물론이다. 헌데 그런 세일을 수시로 광고도 없이 하는 경우가 많아 쇼핑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나도 가끔 백화점(mall)을 한번 돌아보곤 했었다. 혹시 아이들 옷파는 가게들이 그런 세일을 하지 않나 해서.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는 아이들의 경우에 또래 아이들이 있는 가까운 한국이웃들끼리 서로 입던 옷들을 물려주는게 유학생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따뜻한 모습이다. 우리아들내미도 자기가 입던 옷을 누군가에게 물려주고 자기도 이웃 한국형이 입던 옷을 물려받으면서 자랐으니까. 해서 가끔 아들 옷을 입은 동네 꼬마가 아들인 줄 알고 연신 불러댄 적이 한두번이랴. 그렇게 서로 물려주고 물려받으면서 아이들의 옷문제를 해결하는게 유학생 가족 사이에서는 아주 일상적인 일이었다.

우리의 단골 가게는 앞에서 잠깐 얘기했던 굿윌(Goodwill)이었다. 굿윌은 주민들이 기부(donation)한 옷이나 물건들을 받아서 파는 중고품가게다. 여러 주에 지점들이 있긴 하지만 그 상태가 다 좋은 것은 아니라는 걸 여기 남부에 내려와서 찾았던 굿윌가게에서 알게 되었다. 여기에 비하면 중서부 우리가 살던 동네의 그 굿윌가게 물건들은 여기에 비해 훨씬 깨끗하고 가격 또한 저렴했다. 그곳은 옷들뿐만 아니라 그릇이나 생활용품들도 판다. 만일 우리도 처음부터 여길 알아서 정착할 때 필요한 물건들을 굿윌에서 샀다면 좋은 물건들을 훨씬 싼 가격에 살 수 있었을게다. 해서 처음 온 유학생들한테 굿윌을 추천한다. 좋아하는 친구들도 있지만 중고품에 대한 한국사람들의 인식이 그리 긍정적이지 않아서 그런가 그리 즐기지 않는 친구들도 많았다. 그럼에도 이래 저래 우린 굿윌 덕을 많이 봤다. 특히 아들이 책을 한창 읽을 무렵..도서관과 함께 굿윌에서 많은 책들을 샀다. 정상가로는 5불 넘는 책들을 깨끗한 상태로 1불도 안되는 60전에 살 수 있었으니까. 그곳에서 아들의 장난감도 솔찮이 많이 샀다. 대신 굿윌역시 필요한 물건을 찾기 위해서는 수시로 방문을 해줘야 한다.  

해서 우리는 월마트에 장보러 가는 길목에 있는 그곳을 장보러 갈 때마다 수시로 들려 둘러보면서 아들의 책들이랑 장난감들, 아들의 옷들이랑 우리의 옷등을 비롯 여러가지 생활용품을 해결 할 수 있었다. 우리의 굿윌 사랑에 주위 친구들은 고개를 젓는다. 자기네도 한두번 둘러봤는데 우리처럼 재미를 못 봤다면서. 그때마다 우리가 해주는 얘기는..우리처럼 수시로 일상적으로 둘러봐야지 좋은 물건을 살 수 있다고. 해서 우리가 이사올 때 아들이 커서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책이나 옷, 장난감같은 물건들을 모은 서너 박스를 굿윌에 기부하고 왔다. 기부할 때 알았다. 기부한다고 해서 굿윌이 어떤 영수증을 주는 것도 아니고 그냥 박스만 건네주면 그만이라는 것을. 그것을 받은 그곳 직원들이 옷을 세탁하고 정리한 깨끗한 상태로 매장에다 내다 놓는다. 지금도 기억난다. 굿윌에 들어서면 맡을 수 있는 굿윌 특유의 냄새를. 그건 아주 특유의 상쾌한 세제 냄새였는데 언젠가 굿윌에서 산 옷을 입던 아들이 옷에서 맡아지는 냄새만으로 "엄마..굿윌에서 산 옷이지요..."해서 웃었던 기억이 난다. 허나 지금 사는 동네의 굿윌은 거의 찾지 않고 있다. 굿윌 물건의 수준은 그 동네의 사는 수준과 비례한다 싶다. 왜나하면 이전의 그 잘 사는 동네의 굿윌과 너무 다른 이동네의 이곳 굿윌을 처음 한두번 걸음해본 우리는 그 이후로 거의 찾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주민들의 기부로 운영되는 시스템이니 당연한 지도 모른다.

그렇다..우린 그렇게 눈높이를 내려서...물론 그전에도 그리 높은 수준은 아니긴 했지만..아주 저렴하게...알뜰하게 공부하는 사오년 길게는 육칠년 동안을 그런대로 해낼 수 있다는게 내 생각이다. 물론 학비는 제외하고 말이다. 학교에서 주는 장학금 내지는 조교일자리를 받기만 한다면 여기서 생활하는데 드는 생활비는 어떻게든 절약할 수 있다. 우리가 그렇게 했듯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