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 올 때 채 두 살도 안 되었던 아들이 커갈수록 남편과 나는 남의 나라에서 지내는 동안 아들을 어떻게 키워야 할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한다. 몇 년전에, 한인사회를 충격으로 몰아넣던 버지니아텍 총격사건의 조승휘군을 NBC에 그가 보냈다는 동영상을 통해 보면서 가슴 한구석이 먹먹해져오던 그 느낌을 아직도 기억한다. 대체 저 젊은 친구는 얼마나 힘들었으면 저런 선택을 했을까.. 설사 그게 그의 선택이 아니라고 해도..그를 그런 지경까지 몰고 간 그 뭔가를..그런 아들을 지켜보며 감내해야 했을 그의 부모 무너지는 맘이 어떨지..다는 모르더라도 조금은 알 듯해서.

그런 자식을 지켜봤을 부모의 고통을 어찌 헤아릴 수 있으랴. 그 분들처럼 공부가 아니라 살러 오신 분들한테 자식이 어떤 의민지 알기에 더더욱 그렇다. 어떤 이유에서건 생활터전을 미국으로 통째로 옮기신 교포분들은 삶의 목표가 자식을 성공시키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차있다. 세탁소를 하고, 야채가게를 하고, 구두 수선일을 하면서 그분들은 자식들이 당신보다는 훨씬 나은 삶을 살기를..소위 말하는 명문대를 나와 미국사회의 주류로 자리잡고 살게 되기를. 그게 사람들이 말하는 아메리카 드림, 지금은 옛말이 되었다고 해도, 그런 걸게다. 사람들은 이곳에 오면 가방끈이 길어 혹은 체면 때문에 한국에서 였다면 꿈도 못 꾸었을 일들을 하려고 남의 땅에 와서 소매를 걷는다. 고시에 계속 낙방한 남편이 선택한 미국이민길에 오른 지 20년이 지난 내 친구 역시 여기 온지 10년넘게 아침 6시에 일어나 가게 문을 열고 밤 12시에 닫고 들어오는 생활을 주일날도 쉬지 않고 일한 결과 지금은 경제적 여유를 맘껏 누리고 산다. 그런 모습에 가끔 궁금했었다. 만일 한국에서도 그렇게 열심히 살았다면 비슷한 정도로 결국엔 누리면서 살게 되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그런 면에서 미국이 기회의 나라긴 나라긴 하다..부분적이긴 하지만.  

그런 과정에서 자식들을 키우기가, 더군다나 소수인종으로 자긍심을 잃지 않고 키우기는 결코 쉽지 않다는 걸 순간 순간 깨달으면서 우린 머리를 맞대고 고민한다. 우리의 방향은 정해져있었지만 여기서 만난 허나 몇년전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두분과 그 자식들의 삶을 통해 그 방향은 좀 더 확고해졌다. 힘든 시절을 다 겪고 안정권에 접어들어서야 그분들은 깨달으셨다고 말씀하셨다. 어쩌면 당연한 것들을 남의 나라 세상살이에 너무 지쳐 간과하셨다고. 자식 키우는데 필요한 건 넉넉한 돈도 아니고 영어를 잘 하고 학점을 All A를 받아 학교에서 자랑스런 부모로 초청을 받았다고 해서 결코 자랑할 게 아니라는 것을. 당신들은 아침 부터 밤까지 일을 하시는 동안 그 자식들은 자신들이 한국사람이라는 것을 점점 잊어버리고 부모와 점점 멀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어느 순간부턴가 아이들은 영어로 얘기하고 아빠 엄마는 한국말로 대화하는 모습은 그분들뿐아니라 여기 한국가정들에서는 그리 낯설지 않은 그림이다. 오히려 집에서 철저하게 우리말을 시키는 우리같은 이들이 당연함에도 그리 많지 않은 셈이니까. 네살부터 매일저녁을 한글공부를 시킨 덕에 아들은 그런 대로 한국말을 무리없이 한다. 물론 어휘실력도 딸리고 어설프긴 해도. 허나 내가 만난 많은 교포분들은 당신의 아이들이 우리말을 잃어가는 걸 미국시민화되는 과정으로 간주하시는 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시는 듯하다.

한국말을 못하던 아이들은 한국 친구들과 어울리지도 못하고 대학을 갈 즈음엔 대부분이 고향을 떠나 큰 도시에 있는 좋은 학교로 떠났지만 그곳에서 그들이 만난 세계는 자신이 자랐던 예전 고향과는 많이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다고 한다. 어릴적부터 친구였던 그들한테 얼굴색이 뭔 상관이었겠는가. 허나 새로 만난 곳에서 알게 되었다고 한다. 대부분이 끼리 끼리 다닌다는 것을. 잠시 섞이긴 해도.. 결국 피부색이 같은 무리들이 서로 어울린다는 것을. 그제서야 자신이 한국사람도 아니고 미국사람도 아닌 바나나 (겉은 노란데 속은 하얀)라는 걸 뒤늦게 깨달은 그는 공부로 인한 스트레스까지 겹쳐 결국 자살을 시도해서 부모맘에 못을 박았다. 그렇게 이런 저런 일들을 겪고 나서야 깨달으셨지만 이미 머리가 다 큰 자식들을 잡고 앉혀서 우리말이랑 문화를 너는 한국사람이라고 가르치기엔 너무 늦었다고 하셨다.

그런 면에서 남편과 난 아들한테 참 많이 미안하다. 아빠 엄마때문에 차별같은 거 겪지 않고 주류로 살수 있는 우리나라를 떠나 이렇게 소수인종으로 살아가게 해서. 남의 나라에서 잘 키우고 싶다는 우리는 아들이 반듯하고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 하면 좋겠지만 적어도 최소한..어딜가서도 자기가 한국사람이라는 걸 잊지 않고 자긍심을 갖고 살아가길 바랄 뿐이다. 가끔 우리의 교육효과가 지나치게(?) 나타날 때가 있긴 하다. 7살 때였던가..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온 아들이 하는 말.."엄마 미국얘들은 쫌 실리(silly) 해요" '실리'라는 단어를 어리석다로 바꾸기엔 어휘수준이 딸린다는 걸 아는터라 그냥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걔들은 영어 밖에 못하잖아요.." 아들의 대답에 남편하고 얼마나 웃었는지. "엄마..ㅇㅇ는 자기가 미국사람이래요" 여기서 ㅇㅇ는 아들하고 단짝으로 붙어다니던 미국에서 태어난 친구다. 미국에서 태어나서 그렇게 생각하나보다..했더니 "태어났어도 블러드(blood)는 코리안이잖아요" 하며 힘주어 얘기한다. 또 한가지가 더 떠오른다. "엄마 제가 north korea에서 왔어요..south korea에서 왔어요?"하고 묻는다. 그건 왜냐고 물으니 같은 반 친구가 미국은 "north korea"를 싫어한다고 했다면서 그 이유를 묻는다. 잠시 난감했지만..아주 단순화시켜서 얘기해줬었다. 그건 "north Korea"가 뭘 잘못해서가 아니라 미국 말을 잘 안 들어서 그런거라고. 만일 어떤 힘쎈 친구가 자기보다 힘이 약한 다른 친구들은 다 말 잘 듣고 자기가 하자는 대로 하는데 보기엔 별로 힘도 안 쎈데 자기 말을 안 들으면 그 힘쎈 친구가 그 친구를 좋아할까..안 좋아할까..하고 물었더니 아들은 잘못한게 없는데 그러냐고 다시한번 묻고는 엄마의 설명만으로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갤 주억거렸던게 기억난다. 좀 더 크면 알게 될거라고..그때는 그냥 그렇게 넘어갔었다.

미국에서 자란 다른 친구들에 비해 우리아들은 지나치게 '한국적'인지도 모른다. 햄버거나 치즈대신 김치찌게랑 고추장을 좋아하고 학교에서 빵말고 밥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하니. 학교에서는 실수로라도 누가 먹던 컵도 안 만지고 섞지도 않으려는 녀석이 집에 오면 엄마 아빠랑 먹는거니 괜찮다며 가끔은 슬쩍 우리컵에 물을 따라 마시기도 하고 가운데 놓인 된장찌게를 같이 떠먹는다. 아이들끼리는 영어로 놀다가다 한국 어른들께는 우리말로 존대하면서 대답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렇게 학교에선 미국식이고 집이나 한국이웃들을 만나면 한국식으로 완전 적응이 된 우리아들..지금까지는 남의 나라땅에서 참 잘 자라주어 남편과 나는 많이 고맙다. 

작년 여름, 미국온 지 처음으로 그러니까 9년만에 아들은 남편과 한국에 다녀왔다. 그동안 당신 손자가 코쟁이들처럼 한국말도 못해 버벅대고 매운 한국 음식도 잘 못 먹을거라고 예상하셨던 할아버지 할머니랑 친척들은 우리아들의 너무나 한국적인 모습에 놀라워하시며 칭찬해 주셨단. 남편이 아들덕에 기분이 좋았다며 칭찬들은 얘기들은 전해줬다. 한국을 다녀온 후 놀라운 건 겨우 한달 남짓 있었는데도 아들의 한국어 어휘실력이 놀라울 만큼 유창해졌다. 예를 들어 "오히려" "아마도" "당연하지" "역시" 같이 쉽지 않은 부사들을 어찌 그리 적절하게 잘 넣어 구사하는지. 그런 아들의 유창한 우리말 실력에 적응이 덜 된 난 연신 감탄을 해댔다. 물론 그 유창함에 큰 발전은 없었다..그 이후로. 그로부터 일년이 지난 지금 아들의 한국말 실력은 아직도 갈길이 멀다. 그때 물었다. 한국에서 가 본 곳 중에서 어디가 제일 재밌고 좋았냐고 물었더니..아들은 뜻밖에도 목욕탕이랑 찜질방이 너무 재밌었단다. 처음엔 이상했는데..다음에 또 가보고 싶을만큼. 엄마도 꼭 같이 찜찔방을 가보잔다. 
 
남편과 나는 안다. 아직 한국은 아들한테 낯설거라는 걸. 물론 오랫동안 아빠 엄마한테 들은 것들로 어색한 정도는 벗어났을지 모른다. 귀로 들어 마치 잘 알고 있는 듯한 느낌으로 막연하게 코리안 드림을 꿈꿨던 이전이랑 한달 밖에 안되지만 그래도 직접 보고 느낀 한국은 우리아들이 기대했던 이상일 수도 이하일 수도 있을게다. 낯선 곳이어서 오는 불편함도 있었을테고. 그럼에도 다행스러운 건 우리 아들은 모르지 않는다. 할아버지 할머니랑 친척들이 살고 있는 그 곳이 종국엔 우리 가족 모두가 돌아갈 곳이라는 것을. 해서 열에 여섯번은 마지 못해 하는 한글공부지만 매일 매일 시키지 않아도 저녁 시간이 되면 자기가 한글공부책을 핀다. 만일 한국이 아닌 여기서 계속 살게 된다면 우리아들이 부딪혀야 할 것들이 많을게다. 이제 조금 더 크면 지금보다 힘들어 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대신 해줄 수 없는. 해서 소망한다. 그렇게 힘들어서 부대낄 때 아빠 엄마가 아들한테 이제껏 심어 준 것들이 든든하게 우리아들을 잡아주고 버틸 수 있는 힘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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