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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파울로 코엘료 지음, 이상해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얼마전, 친구가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라는 독특한 제목의 책을 읽어본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친구는 그 소설을 읽는 동안 계속해서 내가 떠올랐다고 했다. 소설 속의 주인공이 나와 닮은 것 같다면서.
이야기는 베로니카라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스물네 살 아가씨의 자살 기도로 시작되었다.인생에서 무언가 특별한 게 없다면 이쯤에서 끝을 내어도 좋겠다는 생각, 삶에서 권태를 느껴본 사람이면 누구나 한번쯤 해보았음직한 생각이다. 베로니카는 이 생각을 실천에 옮기기로 마음먹고 수면제 네 병을 삼킨다.
그러나 그녀가 깨어난 곳은 다른 차원의 세상이 아니라 정신병원 ‘빌레트’. 깜짝 놀란 그녀에게 의사는 그녀가 되살아난 것이 아니라 심장 쇼크로 일주일 남짓한 죽음의 유예기간을 얻은 것뿐이라고 말한다. 어차피 죽기로 결심한 이상, 일주일의 기간도 베로니카에겐 무의미한 날들이었다. 그녀는 서서히 자신에게 다가올 죽음에 대해 마음의 준비를 하기로 하고 빌레트라는 작은 세상 속을 무의미하게 관조하기 시작한다.
베로니카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담장 빌레트 안에서 마음껏 평화를 누리고 사는 여러 환자들을 만나보게 된다. 그들은 모두 세상에서 세상의 잣대로 자기 자신을 평가하기에 지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우울증, 강박증, 히스테리, 정신분열을 가장하여 모든 것이 허용되고 인정되는 그들만의 작은 세상 빌레트에 안착한 것이다. 그들은 빌레트 안에서의 안락한 생활에 대해 스스로 만족하는 듯이 보였고, 자기네 영토에 불온한 바람을 몰고 올 베로니카를 경계하고 있었다.
아직 젊고, 자기 의지를 실천할 힘을 가지고 있는 베로니카는 점점 의도치 않게 빌레트 안에서 절대적인 평화를 누리고 있는 환자들에게 자기네가 누리는 평화와 만족에 대해 의심하도록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의심을 행동으로 옮겨내가는 환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베로니카가 실천하고자 하는 죽음에의 의지는 삶에의 의지와 맞닿아있는 것임을 베로니카 본인만 빼고 모든 환자들이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더구나 관습, 금기, 거세된 욕망으로 스스로를 묶어오던 베로니카는 자신을 가두고 삶을 거두어가고 있던 것이 외부가 아니라 바로 자기 내부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죽음이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은 아니라는 것도 깊이 새기게 되었다.
친구는 과연 베로니카와 나의 어떤 구석이 닮았다고 여겼던 것일까. 나는 책을 덮자마자 책상에서 안보이는 곳으로 멀리 치웠다. 책장을 다시 펼치면 베로니카는 마치 거울처럼 물끄러미 서서 너도 어서 자신을 들여다보라고 말하고 있을 것만 같았다. 겁이 났다. 그리고 읽은 내용, 느낀 것들을 생각할수록 불편해지고 두려워져서 하루빨리 이것들을 잊었으면 싶었다. 그러고보니 나는 바로 빌레트의 환자에 다름 아니었던 모양이다.
나는 어쩜 젊기도 전에 이미 늙어버린 것이 아닐까. 젊음이란 이름에 주어진 모든 것들이 내게는 과하고 버겁게만 느껴진다. 나에게 다가오는 모험, 열정, 사랑, 꿈 따위, 내가 피튀기며 남의 가슴에 못까지 박아가며 어렵게 얻어낸 일상의 사소한 안정과 평화를 흩뜨릴 순간의 광기같은 것들. 이제 이런 것들은 내 인생에서 저 멀리 떠내려 보내버리고 나는 이제 끝을 기다리는 사람이고 싶었다. 그러나 문득 내가 이 모든 것들을 두려워하는 이유가 사실은 아직 내 속에 이것들이 잠재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어쩌면 나는 이것들을 사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과연 내가 정말 원하는 건 무얼까. 나는 질풍들이 나를 피해가 주기를 바라고만 있나. 그 바람이 나를 새로운 곳으로 데려다 주기를 진심으로 원하는 것은 아닐까. 새로운 곳엔 새로운 삶이 새로운 죽음과 함께 있지 않을까. 내가 정작 두려워하는 것은 죽을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열정과 모험과 도전정신이 사라지는 것, 젊음이 사그라드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언제부터가 중요한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언제부터가 아니라 이제부터일테니까. 베로니카가 내 가슴속에서 조용하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고 있던 말은 바로, 이 말이었던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