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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돌리노 - 상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현경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4월
평점 :
나는 천재들을 시기한다. 그래서 그들을 모함하고 헐뜯는 걸 낙으로 삼는 편이다. -_-b 그런 내가 처음부터 '포기'한 인물이 있으니 바로 움베르토 에코 선생님이시다. 혹자는 그의 소설을 두고 지적 헤게모니를 쥔 자 특유의 횡포라 하기도 하나, 나로선 횡포고 자시고, 타고난 이야기꾼으로서의 그 재능과 치열한 공부, 오랜 연습을 통한 간명한 글쓰기- 이 모든 게 부러울 따름이다. 연구도 하고 아이들도 가르치고 소설도 쓰고 평론이며 에세이, 도대체 그 많은 걸 어떻게 다 해낸담?
바우돌리노는 이탈리아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난 중세 인물로, 거짓말에 관한 한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다. (실제 바우돌리노 성인은 알렉산드리아의 수호성인이기도 하다. 여기서부터 거짓말과 진실의 혼돈은 시작된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에게 그럴듯한 거짓말을 해서 양자로 입적되고 위기에 봉착할 때마다 그 천부적인 재능을 이용해 살아남고 입신양명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모든 거짓말쟁이들이 그렇듯, 바우돌리노와 그의 친구들은 자기들이 지어낸 거짓말을(세계의 동쪽 어딘가에 엄청나게 부유하고 강한 왕이자 사제인 요한의 왕국이 있을 거라는) 스스로 믿기에 이른다. 거짓말로 남들을 설득하려다 자기 자신이 그 덫에 말려든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거짓말 왕국을 향해 모험을 떠나고, 그 모험 속에서 많은 것을 잃고 많은 것을 경험한다.
바우돌리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관 니케타스는 그의 이야기를 역사에 기록할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하다가 결국은 그의 황당한 모험 이야기를 역사에서 누락시키기로 결정한다. 어차피 기록되는 역사도 잘 정리된 어떤 한 사람의 거짓말에 불과할지도 모르는 것을. 바우돌리노는 처음부터 거짓말쟁이였으니, 그의 거짓말은 영원히 거짓말로 남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우돌리노 이야기는 말 그대로 '야사'가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신화나 전설처럼 떠받을여지고 후세 사람들은 그 이야기에 현혹되어 다시 성배를 찾으러 떠난다.
이 그럴싸한 이야기마저도 모두 거짓말. 거짓말이 설득력을 갖기 위해 한겹 두겹 옷을 덧입을수록 거짓말은 본래의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워진다. 가만 생각해보면 우리가 진실이라 믿는 것들도 실체가 밝혀지지 않은 거짓말에 불과할지 모른다. 거짓말로 둘러싸인 세계, 거짓말로 유지되는 관계, 거짓 고백, 거짓 증언들- 가짜가 더 진짜 대접을 받는 세상, 이런 세상에서 진실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이야기의 재미도 재미지만, 이 시뮬라크르의 시대를 예리하게 통찰해낸 작가의 안목과 공부의 깊이에 다시금 탄복하며, 사람이 어떤 한 분야에 통달하게 되면 면벽이나 입산수도하지 않아도 입신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음을 알겠다. 뭔갈 쓰려면 이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날마다 어깨가 무거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