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딕슨 카를 꽤 좋아합니다. 추리소설 취향이 상당히 잡식성인 저로서는 특별히 열광하는 작가나, 작품을 꼭 집어 내기 어렵지만 다른 사람들의 "제일 좋아하는 작가가 누구죠?"라는 질문에는 "엘러리 퀸과 존 딕슨 카" 두 사람을 꼽게 됩니다.
딕슨 카는 불과 2년 전까지만 해도 추리 애호가 사이에서는 작품을 구하기도 어렵고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애타게 작품을 찾아 헤매던, 또 간절히 출판을 바라던 대표적인 작가 중의 한 명이 아니었나 싶군요. 많은 작품을 발표했으나 국내에 소개된 작품은 몇 개 되지 않고, 그나마 대부분 절판된 상태였으니까요. 그나마 국내에서 구하기 쉬웠던 <황제의 코담배 케이스>는 많은 사람들에게 대단한 기대감을 갖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오랜 세월 추리소설을 즐겨온 몇몇 고수분들이나 헌책방에서 부지런히 발품을 파는 매니아들만이 접할수 있었던 - 저를 포함한 대부분의 일반인들에게는 전설처럼 전해지던 - 딕슨 카의 작품들이 대충 <화형 법정>, <모자 수집광 사건>, <연속 살인 사건>, <흑사장 살인 사건> 등이 아니었나 싶군요. 국내 번역된 적이 없었던 <세개의 관>, <유다의 창>은 그야말로 신화적인 존재였죠.
일단 제목만 봐도 엄청 재미있을것 같지 않습니까! 딕슨 카를 극찬했던 애도가와 란포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본격 추리소설을 좋아 하는 추리 애호가들의 구미를 당기기에 부족함이 없었던 리스트가 아니었나 합니다.
그리고, 동서 추리문고가 다시 재발간 되면서 딕슨카는 우리 일반 추리 독자에게 돌아 옵니다. 정말 감격적이었죠. 흑흑흑.
그런데, 딕슨 카의 작품들이 구하기 쉬워지면서, 반응이 조금 바뀐것 같습니다.
"기대만큼 미치지 못한다. 다음 작품을 보고 다시 평가해 봐야겠다."가 동서의 1차 리스트에 있었던 <화형 법정>과 <모자 수집광 사건>을 보고 난 많은 독자들이 내린 평가였습니다. (이렇게 쓰고 보니 아닐지도 모르겠군요. 제가 주로 접한 반응은 저런 것이었죠)
<세개의 관>까지 출판 되고 나서도 압도적인 뜨거운 반응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많은 독자들이 <유다의 창>이나 <아라비안 나이트 살인>을 목빠지게 기다리고는 있지만요.
왜 이런 현상이 벌어졌을까요? 애당초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이었을까요. 그 탓도 크겠지만, 딕슨 카의 소설들이 극단적인 "트릭 위주"의 "퍼즐형 수수께끼 풀이" 들이라는데 또 다른 원인이 있다고 봅니다.
<황제의 코담배 케이스>에 감탄했던 많은 독자들이 딕슨 카의 소설을 애타게 기다리면서 그 사이에 보고 접한 많은 추리 소설들과, 쏟아지는 김전일, 코난 류의 트릭 위주의 추리 만화들로 이미 닳고 닳아 버려서, 정작 기다렸던 "원조"를 만나는 순간 이미 더이상 "원조"의 신선함을 맛보지 못하는 상태가 되 버리지 않았나 하는게 제 생각입니다. "원조"로선 억울한 상황인거죠. 거기다가 기다린 세월에 비례한 "너무 큰 기대"도 한 몫 했겠지요.
사실 저는 <연속 살인사건>으로 딕슨 카에 입문 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의 아동판 이었지만요. 그리고 "딕슨 카는 트릭 뿐이야!"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이 작품을 권해 주고 싶습니다. 제가 딕슨 카를 좋아하는 이유는 화려한 트릭(이제는 낡아 버렸을지라도)과 현란한 오컬티즘보다는 <연속 살인사건>에서 보여주는 경쾌함입니다. <죽은자는 다시 깨어난다>에서도 그 경쾌함은 빛을 발하지요. 밀실 트릭의 원조이면서, 또 한 유머 미스테리의 원조라고나 할까요.
딕슨 카 그 역시 아주 재미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딕슨 카가 쓴 홈즈 패러디 희곡 <파라돌의 비밀 주머니 사건>은 엄청나게 웃깁니다. 선배 작가인 코난 도일에 대한 존경과 풍자가 유감없이 드러나 있지요. 1949년 에드가상 시상식장 축하 공연에서 클레이튼 로슨과 함께 배우로도 출연을 했다고 하니, 참 다재 다능하고 사교성 있는 성격이 아니었나 예상해 봅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챈들러와 딕슨 카는 추리 소설에 대한 각자의 이견으로 인해 지면을 통해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고 하는데요, 사교성도 없었고, 고독을 즐겼던 챈들러와 딕슨 카의 정반대에 가까운 성격도 한 몫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챈들러와는 상호 비방에 가까운 논쟁을 벌였지만, 딕슨 카는 선배 작가들에 대한 존경심을 많이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추리 소설을 개척한 대선배들에 대한 딕슨 카의 예우는 그가 뽑은 걸작 베스트 10 리스트를 봐도 잘 드러납니다. 오늘날의 관점에선 크게 평가 받지 못 하는 작품들이지만, 카는 역사적 의의로서 높이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특히 애드가 앨런 포에 대한 존경심은 대단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포는 추리 작가들로서는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이겠지요)
<모자 수집광 사건>의 중요 모티브가 "포의 미발견 원고" 였지요. 또한 딕슨 카의 단편 <파리에서 온 사나이>는 포에 대한 최고의 헌정입니다. 엘러리 퀸이 "정말 뛰어난 단편"이라고 극찬했던 이 작품은 딕슨 카와 포를 아주 좋아하는 저로서는 정말 감동의 도가니탕이었답니다. 두 작가를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꼭 보시길. (예전 한길사에서 발행했던 걸작 미스테리 단편집 앤솔로지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딕슨 카에 대한 헌정 단편인 <존 딕슨 카를 읽은 사나이>도 빼놓을 수 없군요.
딕슨 카의 이야기를 한다고 했는데 두서없이 횡설 수설한 것 같습니다. (대체 주제가 뭔지.. -_-;) 단지 딕슨 카에게서 "밀실 트릭과 오컬티즘"을 빼면 남는게 없다라고 생각 하시는 분들이 또 다른 면모의 딕슨 카를 만나 보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