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분기 단평을 쓰면서 우려했던대로 2/4분기 단평을 쓰지도 않은 시점에서 어느새 10월, 4/4분기다. 마음의 부담으로 살며시 남아 있었던 차에 조금 여유가 생겨서 미루어 둔 숙제를 하는 기분으로 3/4분기까지 빠른 시일내에 올려봐야 겠다는 결심을 해 본다. 그대신 편수를 대폭 줄여서. 아하하.

<유다의 창>
내가 미스터리 소설을 읽는 가장 큰 이유는 당연히 재미있기 때문이다. 장르 소설이나 대중 소설로 폄하하기도 하지만, 미스터리 안에는 온갖 다양한 시각과 관점, 문학성, 인간에 대한 탐구 그리고 빠뜨릴 수 없는 지적 쾌감이 들어 있다. 본격 미스터리 안에서 맛 볼 수 있는 불가해한 상황과 놀라운 진상에 도달했을 때의 그 짜릿함은 다른 분야의 독서에서 결코 쉽게 느낄 수 없는 부분이다. 딕슨 카의 대표작으로 회자되었지만 우리 글로는 접할 수 없었던 전설의 명작 <유다의 창>은 명불허전, 짜릿함을 넘어선 황홀한 걸작이었다. 밀실 트릭만으로는 걸작의 반열에 오르기 힘들었겠지만,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법정 공방과 이야기를 풀어가는 작가의 탁월한 능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런던의 모든 방문에는 '유다의 창'이 존재한다!
1년동안 이만큼 흥미진진하고 짜릿한 소설을 한 권 이상 읽는 일은 흔치 않을 것이다. 발표연도가 1938년, 시대를 초월한 걸작이란 바로 이런 작품이 아니겠는가.


<로마서브로사 2 - 네메시스의 팔>
1권에 이어 8년이라는 세월을 훌쩍 건너 뛰었다.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이 한창이던 BC72년. 당대 최고의 재력가이자 권력자인 크라수스의 사건 의뢰를 받은 고르디아누스의 활약이 펼쳐진다. 2000년 전의 사립 탐정이지만 고르디아누스는 필립 말로와 루 아처의 혈통을 이어 받고 있다. 로마의 시민이고, 남들에게 존경 받는 직업을 가진것도 아니지만 그에게는 인간미가 넘쳐 흐른다. 잔혹한 사건들과 추악한 권력 사이를 헤집고 다니지만, 소설의 끝은 언제나 묵직한 감동을 전해 준다. 고르디아누스는 시대의 진정한 휴머니스트다.


<죽은 자의 몸값>
1년에 1~3권 씩 잊혀질 만 하면 빼드는 캐드펠 시리즈.
8월에 읽은 <고행의 순례자>까지 어느덧 10권째에 도달했다. 20권 시리즈의 반환점을 돈 것.
엘리스 피터스의 캐드펠 수사 시리즈는 크리스티의 소설들에 비견할 수 있는데, 트릭이나 본격의 맛은 좀 더 적고, 로맨스가 더 부각되는 편이다. 젊은 연인들의 격정적인 사랑과 그에 얽힌 살인, 그리고 캐드펠의 지혜로운 해결. - 이는 사건의 해결 뿐 아니라 그에 얽힌 인간사의 해결을 포함한다. 이 자그마한 노수사는 중세의 중매장이라 불리워도 될 것 같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구입해 놓고 차일 피일 미루며 자그마치 5년을 묵혀 두었던 책을 비로소 읽었다.
르 카레의 소설은 '스파이 소설'로 분류되지만 그의 스파이 소설에는 박력 있는 액션도, 손에 땀을 쥐는 추격전도 없다. 오직 고뇌하는 정보원들과 그들의 내적 암투, 누구도 믿을 수 없는 불신의 세계가 있을 뿐이다. 스마일리는 그의 개인사가 얽혀 있어 더욱 우울함의 포스를 발산하고 있어서 사실 쉬이 읽히는 책은 아니었다.
르 카레는 놀랍도록 실감나게 영국의 정보부를 소설 속으로 옮겨 오는데, 더욱 놀라운 것은 상당수의 스파이 용어와 은어들이 그의 창작품이라는 것이다. 공히 '르 카레 월드'라 불러도 좋겠다.


<명탐정의 규칙>
장르 매니아를 위한 장르적 클리셰에 대한 통렬한 자아 비판.
이런 작품이 나오고, 독자의 반향을 일으킬 만한 일본의 풍성한 저변이 부럽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히가시노 게이고의 팬층이 적지 않기 때문에, 제법 많은 판매고를 기록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이런 내용을 키득거리면서 즐길 수 있는 독자층이 오히려 책의 판매량 보다도 적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밀레니엄 1 -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마르틴 벡 시리즈, 쿠르트 발란더 시리즈, 밀레니엄 시리즈. 모두 스웨덴의 추리 소설들이다.
인접 지역인 북유럽, 스칸디나비아의 미스터리도 나라마다 미묘하게 다른 색채를 띄는 것 같다. 스웨덴은 아무래도 가장 인구도 많고, 그에 따라 범죄의 발생 건수도 절대적으로 많을 것이기에, 노르웨이나 아이슬란드를 배경으로 한 소설들보다 더 잔혹하고 선정적이다. 그렇다고 또 미국의 최신 크라임 소설에서 흔히 다루어지는 비정상적인 섬뜩한 연쇄 살인마가 등장하는 현란한 미스터리 스릴러도 아니다.
밀레니엄은 충격적이고 센셰이셔널한 내용을 다루고 있지만, 그에 반해 대단히 건조한 문체로 소설이 선정적으로 흐르는 것을 막고 있다. 작가의 급작스러운 사망으로 3부에서 멈춰버리고 말았지만, 아직 내게는 두 편이 남아 있다는 사실에 만족감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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