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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수업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 외 지음, 류시화 옮김 / 이레 / 2006년 6월
평점 :
일시품절
보옴, 이다. 단비가 지난 자리엔 4월 초, 눈이 상할 만큼 곱던 백목련의 흰빛도 벚꽃의 잦은 파닥임도 간데없다. 나는, 부스스 일어나 연이은 휴일에도 청강을 종용당한 수업을 들으러 간다. 수업명은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데이비스 케슬러 교수의 '인생수업.'
삶의 요소들은 아침에 개키다만 이불, 정리 안 된 화장대, 앞서 걷는 사내의 닳은 구두에도 있다. 이렇듯 산재하고 존재를 구차하게 치대는 반복적인 일상에서 그네들은, '인생'이란 거창한 수업을 어떻게 살펴줄 것인가. 나는 졸음을 비비며 잠시 궁리한다.
교수는 '자신으로 존재하기'란 대 주제를 칠판에 적고 호스피스 활동을 통해 만난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전하는, 사랑과 관계, 상실과 이별, 용서와 치유에 관한 경험들을 풀어간다. 이는 '죽음'으로 선서한 '산' 사람들의 유언이었으므로 진정했다. 그들은 거듭 경고한다, 자신을 방어하고 역할을 연기하면서 본래의 '자아'를 외면하고 자신의 진심을 숨기기에, 우리가 사는 삶이 얼마나 위태로운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짧은지를. 그리고 묻는다.
"당신은 지금 누구입니까?"
어제 나는 사회의 기대에 맞춰, 생존을 위해 그리고 자신의 재능에 대한 불신으로 진정 하고 싶었던 것들을 주저했고 포기했다. 이제와 같은 현실에서 이상과 현실의 간극은 도전을 격려하기에는 무리라고. 더욱이 자아를 구현하기 위한 길이, '가지 않은 길'이라면 더 절실하게 노력함에도 내세울만한 수치를 산출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또 어제 나는, 외롭다고 툴툴거리면서 친구의 약속을 피하고 전화를 꺼뒀다. 용서를 구할 일에 자존심 운운하며 버텼으며 소중한 사람들에게 '고맙다.'는 말도 하지 못했다. fear, 실제처럼 보이는 가짜 증거(False Evidence Appearing Real)들에 압도되어 내 자신의 의견을 분명하게 내보이지 못한 것이다.
매 순간 'yes or no'의 선택 상황에서 1%의 중요성을 생각한다. 그 1%가 49:51의 판단을 확정하고 행동의 근거가 된다. 우리는 아니 나는, '기회' 앞에서조차 그 1%를 두려움으로 채우고 상실을 염려하며 성장을 유보했던 것은 아닌가. 그런 방어로 나는 아무것도 잃지 않았으며 이름 석 자를 또박또박 쓸 수 있는 진정한 '나'로 남았는가. 내가 꺼려하던 두려움의 실체는 무엇이었던가.
책 속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은 아직은 '살아가는' 내게 말한다. 생의 모든 시기는 불완전하다. 이는 인간이 결코 완전한 존재일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을 인정할 수 있다면 용서는 훨씬 가벼운 단어가 될 것이고 관계로 점철된 삶을 '그렇게 심각하게 살지' 않아도 될 것이다. 너 자신을 인정하고 용서하는 것부터 시작해라. 부딪혀 보는 편이 낫다.'상실은 무엇이 소중한지 보여 주며, 사랑은 우리의 진정한 모습을 가르쳐 준다. 관계는 자신을 일깨워주고 성장의 기회를 가져다준다.' 그러니 '살고 사랑하고 웃으라.' 너를 규정하는 것은 현재의 직업, 재산, 명예가 아닌 자아가 가진 내면의 힘, 그 찬란한 빛이다. 그러니, 두려워말고 '생의 마지막 순간에 원하게 될 것, 그것을 지금 하라.'
전화벨이 울린다. 친구는 6월, 직장을 그만두고 인도로 떠난다 한다. 한참을 부러워하는 내게 대뜸 "너도 다 알지? 내가 더 무슨 말을 하겠니." 우리는 그렇게 웃었다. 그래, 실상 우리는 다 알고 있는 것을 부러워하는지도 모르겠다.
다시 봄이다. 5월, 목련과 벚꽃은 지는 게 옳다. 한 시절이 가면 다른 시절이 오는 게 맞다. '화양연화(花樣年華)'가 순간으로 지고 만대도 겪어낸 의미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몸에 새겨질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살기보다 '아무것이라도 하고' 살 일이다. 오늘밤, 그대가 잠든 사이에 받지 못한 전화가 있다면 그건 나의 사랑인 줄로 알아다오. 이 끔찍한 생이여, 벗트(Bu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