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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 장영희 에세이
장영희 지음, 정일 그림 / 샘터사 / 200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하루에도 몇번씩 내 자리, 내 직함이 타인의 것인양 헐거워서 시선을 놓치다가, 감정을 헝크리다가, 나를 놓았다가 그래도 어쩔 수 없어 '나'라는 자리를 서성였었다. 더욱이, 조립된 기계 인간처럼 아무런 감동도 의미도 없이 푸석거리는 시간들이 못내 지루했다. 혀 끝을 맴도는 많은 말들이 있었지만, 그들 역시 허세에 부풀고 너무 격식을 차린 것 뿐, 내게 와서 등 토닥여 줄 소박함과 정겨움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다, 이 책을 만났다.
장영희. 장영희라는 이름은 전에 화가 김점선의 책, 『점선뎐』을 읽다가 처음 알았다. 홍길동뎐, 춘향뎐처럼 김점선 본인이 자신의 이야기를 자서전 형식으로 쓴『점선뎐』을 읽고, 나는 '김점선'이란 인물과 그녀의 삶에 상당한 흥미를 갖고 있었으므로 포털사이트의 연관 검색어처럼 장영희란 이름 역시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11월, 도서관 열람대에 누군가 펴놓고 간 책의 프롤로그, '나, 비가 되고 싶어'라는 글이 눈에 들어왔다. '나비'와 '나, 비'. 쉼표 하나로 나뉘는 의미 차이가 나비처럼 팔랑, 나, 비처럼 춉춉 내 안의 호기심을 두드렸다.
사실 나는, 지난 3월 김점선 화가에 이어 5월 장영희 교수도 암 투병 중 별세했다는 기사를 읽었으므로 이 책이 일종의 투병기인 줄로만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서명을 저리 정하게 된 사연부터 사람을 크크, 거리게 만들더니 그녀는, 너무도 평범한 일상으로 무던한 언어로 사람을 어루고 다독이고 있었다.
그녀가 영작문을 가르칠 때 인용한다던, 미국의 유명한 수필가 E.B. 화이트의 글 잘 쓰는 비결에 관한 말-인류나 인간(Man)에 대해 쓰지 말고 한 사람(man)에 대해 쓰는 것-처럼 장영희의 글은 관념적인 인간(Man)에 관해 말하지 않는다. 그녀의 글은 그대로 장영희, 자신이었다. 서툴고, 게으르고, 잘 속고, 어리숙하지만 어떻게든 삶의 질척하고 무거운 엉덩이를 채근해서 자신의 방향으로 끌고가는 그녀의 걸음들. '나쁜 운명을 깨울까 봐 무서워 살금살금' 걷는 그가 아니라 철커덩, 쩔룩이며 삶을 목발질하는 그녀가 보였다. 교수라는 직위가 주는 권위보다, 장애인이라는 타인의 시선보다, 암 투병이라는 삼키기 어려운 쓴물보다 그녀의 글은 죄다 더 다정하고 더 당당하고 더 달달하였다.
사람을 움직이는 글은, 사람을 감동시키는 삶은 거창하고 위대한 것만이 아님을 알았다. 유명인을 따르는 '모방'보다 나 자신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성실'이 결국엔 스스로를 행복하게 만들 것이라는 것도 알겠다. 내 주변을, 사람들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내가 그간 놓쳤던 많은 것들이 어쩌면 새로운 의미로, 감동으로 다가올 지 모른다. 천천히 그리고 담담하게, 나를 그리고 주위를 돌아보는 연습을 해야겠다.
그렇다 - 의미는, 감동은, 자신이 만들어가는 것이다!
61.
그래서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살면 헛되지 않으리라는 믿음을 갖고 늘 반반의 가능성으로 다가오는 오늘이라는 시간을 열심히 살아간다.
67.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루카 7장 47절)
120.
내가 살아 보니 남들의 가치 기준에 따라 내 목표를 세우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나를 남과 비교하는 것이 얼마나 시간 낭비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내 가치를 깎아 내리는 것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 줄 알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결국 중요하지 않은 것을 위해 진짜 중요한 것을 희생하고, 내 인생을 잘게 조각내어 조금씩 도랑에 집어넣는 일이기 때문이다.
137.
'너만이 너다' ― 이보다 더 의미 있고 풍요로운 말은 없다. (셰익스피어)
156.
영작문을 가르칠 때 나는 미국의 유명한 수필가인 E.B. 화이트의 말을 인용한다.
그는 글을 잘 쓰는 비결에 대해 '인류나 인간(Man)에 대해 쓰지 말고 한 사람(man)에 대해 쓰는 것'이라고 했다. 즉 거창하고 추상적인 이론이나 일반론은 설득력이 없고, 각 개인이 삶에서 겪는 드라마나 애환에 대해 쓸 때에만 독자들의 동감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181.
'어린 시절 난 심술꾸러기였고, 내 청소년기는 힘들었는지 모르지만 이제 이렇게 사랑하는 당신이 거기에 서 있으니, 내가 과거에 그 무언가 좋은 일을 했음에 틀림없어요.' <사운드 오브 뮤직Sound of Music> (그 무언가 좋은 일 Something Good)
197.
토마스 머튼이라는 신학자는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의 참된 기쁨은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고 '자기'라는 감옥에서 빠져 나오는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