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과학>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1. <나는 가끔 속물일 때가 있다 - 두 남자의 고백>(악셀 하케 & 조반니 디 로렌초, 배명자 역, 푸른지식) 

 로쟈가 적확하게 지적한 대로, 이 책의 제목은 독자를 교란시킨다. "나는 가끔 성자일 때가 있다"가 더 겸손한 제목인데, 우리는 종종 그 반대로 착각한다. 그렇다고 할 때, 이 책이 강력하게 표방하는 '솔직담백한' 이야기를 이 두 아저씨의 대화로부터 기대하기란 힘든 일이 아닐까.(아저씨 두 분의 이야기를 참견 없이 장시간 듣는 건 원래 좀 험난한 일이지만...^^) 독일의 두 저명한 지식인 남성이 터놓고 이야기하는 자기 안의 모순, 지식과의 괴리 등에 대한 고백은 우리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 학생운동 이력에 대한 비판적 성찰, 사회적 책임, 정의와 같은 가치에 둔감해지며, 오직 쓰레기 분리수거를 통해서만 자기보존과 옹호의 길을 구하게 된 이들. 그런데 이들의 속물근성에 대한 고백이 오히려 여느 속물들에게 안정적인 자기위안의 내러티브를 마련해주는 것은 아닐지. 자폭할 줄 아는 속물이야말로 '고급속물'이기에. 자, 들어나 봅시다. 속물지배의 대한민국에서 '속물'에 대한 (자기)성찰은 일단 매우 드무니까.  

  

2. <자기만의 방 - 고시원으로 보는 청년 세대와 주거의 사회학>(정민우, 이매진)

 "석사 학위 논문이라는 종(種)의 지위에 관한 의문 또는 의구심"에 답하거나,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쓰여진 책이란다. '고시원', 과연 석사학위논문다운 주제다 (양자는 고학력,고성취를 위해 마련된 시공간이면서 동시에 과도기, 결여 ... 등의 용어와 잘 어울린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자기만의 집"이 아니라는 것에 주의할 것. 이 책은 부제가 잘 말하고 있는 것처럼, '고시원'을 통해 본 청년 세대의 현재와 미래에 관한 책이다. 마침, 저작의도를 아주 잘 말해주는 구절이 있다.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이 지적 자유를 얻으려면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했다. 달리 말하면 독립의 조건이다. (...) 이 시대의 ‘자기만의 방’이라 할 만한 고시원은 독립의 조건을 준비하는 자리인 동시에 그 조건의 불가능성을 폭로하는 자리다." 이 '집 아닌 집'에 사는 이들이 형성하는 '정서적 (비)공동체'의 사연을 담은 몇몇 이야기가 떠오른다. 김애란의 <노크하지 않는 집>, 일드 <라스트 프렌즈> 등등. 부동산 투기가 들끓는 한국에서 청년들의 '집 이야기'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슬프게도 흥미롭다.

 

3. <분노하라>(스테판 에셀, 임희근 역, 돌베개) 

'분노하라'. 미쳐라, 목숨 걸어라, 뭐해라... 등등 예전에 나온 그 어느 명령어보다도 따르고 싶어진다. 아니, 사실 그런 명령어투를 쓰지 않아도 절로 분노하게 되는 사회에 살고 있다. 한진중공업, 홍대, 강정 해군기지... 그 얼마나 많은가, 분노할 일들. 불과 30여 페이지 밖에 안 되는 이 작은 정치 팜플렛이 가져온 나라 안팎의 '사회적 분노'의 결과들을 볼 때, 우리는 놀란다. 그리고 곧 알게 된다. 그 분노 신드롬이 실은 이 책 한 권이 야기한 결과가 아니라, 그동안 우리가 냉소와 무관심으로 가장한 채 억압해왔던 '변혁'에 대한 열망들의 집합임을. 이 책에서 저자는 레지스탕스 정신의 핵심을 이루었던 '불의에 대한 불복종'을 호소한다. 93세 노장의 '분노론'은 이런 것이다. '분노'는 '격분'과 다르다는 것. 진정한 분노는 '비폭력', 즉 '자기 자신을 정복한 후, 타인의 폭력 성향을 정복하는 일'이라는 것. 그리하여 오직 '희망의 폭력'만이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그것의 실현태는 '투표'와 '참여'라는 것. 어떤가, 마음에 드시는지. 21세기 한국의 '다중'이 내린 결론과 견주어보고 싶어 진다.

 

  

4. <소금꽃나무>(김진숙, 후마니타스) 

 183일째다. 김진숙 지도위원이 85호 크레인에 올라간 지 말이다. 비도 엄청 오는데 그 검은 구름 아래서 끝내 버틴다. 폭력과 배신과 거짓말의 드라마, 직무유기를 밥먹듯 하는 한국 언론을 정면으로 내려다보며, 오직 심장처럼 깜박이는 트위터만을 등대 삼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2007년에 출간됐던 <소금꽃나무>의 한정판이  올해 6월에 다시 나온 건, 바로 그녀를 지지하고, 그녀와 연대하기 위해서다. 같은 책을 두 권 갖게 된 것, 처절한 불행이다. ... ... 그러나, 같은 책이지만 같지 않다! 희망버스는 연이어 내려간다. 그녀는 "강제로 끌려내려가지 않는다." 김진숙의 인생,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 어떻게 봐도 '소금꽃'투성이인 그 시간들에 대한 이야기. 다른 어떤 저명 인사의 추천사도 필요 없다. 그녀를 아는 사람들은 온 마음으로 이 책을 추천할 거다. 영웅도, 작가도 아닌 그녀는 내가 아는 그 어느 작가보다 글을 잘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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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자본주의 - 현대 세계의 거대한 전환과 사회적 삶의 재구성 아우또노미아총서 27
조정환 지음 / 갈무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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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70여 쪽에 이르는 대작이다. 자율주의-맑시스트로 알려진 저자 조정환이 1990년대부터 최근까지 지속적으로 개진해온 이론적 사유를 발전시켜 책으로 묶었다. 그 과정에서 2008년 한국의 촛불운동, 2011년 일본 대지진 및 북아프리카와 중동의 혁명운동이 그의 사유에 틈입하여 촉매제가 되었다. 저자는 흔히 신자유주의, 금융자본주의 혹은 소비자본주의로 일컬어진 제3기 자본주의를 ‘인지자본주의’로 정의하고, 이를 토대로 자본과 노동, 시간과 공간, 계급과 지성 등의 개념을 재구성했다. 이를 통해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주권의 형태와 혁명이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이론적으로 탐색하려 했다. 그리하여 이 책은 “권력, 사회, 예술의 인지적 전환에 관심을 기울인 이 연구들을 ‘정치경제학 비판’과 결합하고 그것들을 자본주의 분석과 비판의 전통 속에 자리 잡게 하면서 그것들이 놓일 새로운 지평을 열어줌과 동시에 좀 더 명확한 정치적 방향성을 부여하려는 시도”(23-24)의 산물이다. 내용이 방대하여, 이 리뷰에서 다 다루지 못한다. 흥미롭게 읽은 부분만을 소개해본다.


   이 책에서 제시하고 있는 “인지자본주의에서 공간의 재구성”에 있어 문제가 되는 것은 단연 ‘메트로폴리스’다. 벤야민, 아감벤 등의 사유를 비판적으로 계승하여 이 책은 메트로폴리스를 “일국적일 뿐만 아니라 전지구적인 삶의 배치이자, 자본의 장치”(223)로 정의한다. 그가 규정하는 메트로폴리스는 “노동의 실질적 포섭, 비물질노동, 그리고 다중”(227)이라는 세 개념의 축으로 이루어진다는 네그리의 분석에 따른 것이다. 이처럼 ‘다양한 생활양식, 집단적 소통수단’이라는 조건의 집합으로 이루어지는 메트로폴리스라는 공간은 ‘능동적 저항주체’가 형성 가능한 공간이 된다.

   2008년의 촛불운동은 이러한 다중적 네트워크 장치로서의 메트로폴리스에서 탄생한 능동적 저항주체로서의 시민이 가시화되어 혁명의 가능성을 예고한 사례로 읽힌다. 이는 인지자본주의가 희망적으로 기대하는 ‘지성’의 상을 설명하기 위한 좋은 단초가 된다. ‘지성’의 문제는 11장에서 다루어지는데, 그간 사회주의 운동이 “경제적 평등을 주장하고 실천하면서도 지성에 있어서는 평등보다 불평등을 옹호”해왔던 것이야말로 변화해야 한다는 것이 이 장의 핵심적 주장이다. 전위, 노드의 중요성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고, 사회주의 운동의 실패를 지도력 부족, 조직화의 실패 등으로 환원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오히려 저자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다중’ 개념에 근거한 “모든 사람들의 지도자화”(384)이다. 전문가들의 헤게모니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은닉되는 비밀이 있어야 하고, 이를 절대적인 전제로 받아들이는 사회구성체는 보수주의와 맞닿는다. 예컨대 2008년의 촛불을 우중의 출현으로 보는 ‘전-반’ 진보주의자들의 주장이 그 예이다. (이는 저자가 오랫동안 상호비평관계를 유지했던 서동진과 결정적으로 대립되는 부분이다. 최근 󰡔인지자본주의󰡕에 대해 서동진과 조정환이 제출한 비판과 반비판은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시작한다. 이는 결국 ‘맑스주의’의 정통성에 대한 이해와 오독 논쟁으로 치우쳐버렸다. 이런 이론투쟁은 두 논자의 인식론적 기반에 기인한 문제인 만큼 그로의 귀결은 자연스럽지만, 새삼 놀라운 것은 이 현학적인 논의가 인터넷 진보매체 <프레시안>을 통해 결코 적지 않은 분량으로 발표되었다는 점이다. 과연! cf. 서동진, 「마르크스주의, 미래학의 유혹에 빠지다?」, 󰡔프레시안󰡕, 2011. 5. 13; 조정환, 「마르크스주의 진화를 가로막는 진짜 ‘적’은?」, 󰡔프레시안󰡕, 2011. 6. 3)

   보다 흥미로운 것은 바로 이것이 인문학의 보수화 및 고전 붐 현상에 대한 분석으로 이어지는 대목이다. CEO를 위한 인문학, 노숙자를 위한 인문학 등 인문학의 범사회화 현상이 왜 대안이 아닌지를 밝히는 대목에 공감한다. 인문학의 위기가 찾은 출구가 기업과의 ‘제휴’라는 것은 곧, 인문학적 사유가 국가가 주도하는 “신자유주의적 발전전략의 일부로 배치”(394)되고 소비되는 것과 다름없음을 저자는 분명히 한다. 이명박 정부가 고전이 지닌 해석의 다양한 가능성을 선점함으로써 “고전이 해방과 자유를 찾는 다중의 공통어로 기능하지 못하도록 저지”하고 “오히려 고전으로부터 삶에 명령질서를 부과할 가능성을,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의 정당성을 찾아내려는 작전의 일부”로 활용하고 있다는 주장도 흥미롭다. 물론 작금의 고전 붐의 원인이 모두 이러한 분석으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고전’이라는 컨텐츠의 정력적인 개발을 통해 ‘인문학적 포즈’를 구성하고 있는 국가의 의도를 설명하기에는 유효하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노드나 전위의 절대성이 자명하지 않다는 것이 사실이라 해도, “모든 사람들의 지도자화”는 어떻게 가능한가. ‘다중’의 개념이 전제하는 ‘대중’에 대한 희망적인 믿음은 어떻게 실현가능한가. ‘다중’은 ‘다중’의 그야말로 ‘다층적인’ 면모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인문학의 신보수주의화가 아닌, 인문학의 미래, 인문학이 ‘다중지성’으로서 기능하는 것, 동시에 ‘다중지성’이 ‘인문화’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저자가 구성한 ‘다중’의 실체는 ‘인지자본주의에서 계급의 재구성’을 논한 9장에서 논의된다. 저자는 ‘프리터, 프리커, 비정규직, 불안정노동자’들을 ‘호모 사케르’(아감벤), ‘쓰레기’(바우만) 등 국가로부터 배제된 부정적 형상으로 제시하는 것과는 다른 길을 택한다. 그는 이들의 ‘버려짐’, ‘불안정’ 등이 아니라 이들의 ‘자유로움’, ‘유동성’과 같은 특성에 주목하여 프롤레타리아트의 개념을 재구성한다. 이 ‘불안정’과 ‘자유’라는 양극의 스펙트럼은 자본주의의의 질적 변형에 기인한 것이다. 실상 제3기 자본주의라고 일컬어지는 인지자본주의는 고용노동 뿐만 아니라 “‘고용되지 않은 거대한 노동들(여성, 아동, 노인, 청년, 죄수, 실업자, 예술가 등의 활동들)’에 의존”(314)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을 주체화하는 새로운 사유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고용’의 여부가 곧 삶의 안전을 좌우한다는 이 전제야말로 ‘정규직/비정규직’ 등 노동자 간의 위계와 분절을 촉발하여 혁명적 주체화를 저해한다. 그러므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만이 능사는 아니다. 그것은 여전히 고용이 곧 삶의 안보를 결정한다는 자본주의적 인식론에 포섭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요는 ‘다중’이다. 새로운 주체로서 ‘다중’의 신체는 마련되어야 한다. “자본주의적 지배를 지엽적인 것, 주변적인 것으로 만들”(507)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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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meral 2011-08-31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래 내용을 메일로도 보내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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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웹진 <자율평론>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정연이라고 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오해 님이 작성하신 <인지자본주의>에 대한 서평글을 오는 9월 초 발행 예정인 <자율평론> 36호 게재할 수 있을지 문의를 드립니다.

<자율평론>은 2002년부터 지금까지 총 35호의 웹진을 발행한 계간 정치철학 웹진이며, 누구나 인터넷을 통해 자유로이 접근할 수 있는 copyleft 웹진입니다. 그간 <자율평론>에 게재되었던 모든 원고들은 아래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waam.net/xe/autonomous_review

<자율평론>은 인문학 강좌 공간인 다중지성의 정원, 독립 출판 활동을 하는 갈무리 출판사, 세미나 공간 다중지성 연구정원의 마디 단위로, 위 공간들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지적 활동들의 성과들을 모아내고, 우리들의 생각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한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매체가 아니기 때문에 원고료를 드리기는 어렵지만, 게재를 허락해 주신다면 웹진이 발행되는 대로 PDF 파일을 보내드리겠습니다.

모쪼록 긍정적인 검토를 부탁드리며, 더 궁금하신 사항이 있으시다면 아래 연락처로 언제든지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자율평론> 편집위원회 김정연 드림
daziwon@waam.net / 02-325-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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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란 무엇인가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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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은 쉽게 읽혔는데, 서평은 쉽게 쓰지 못하겠다. 마찬가지로, 책은 빨리 읽혔지만, 뿌듯함은 없다. 국가란 무엇인가, 이런 책을 써야 했던 저자의 고민만큼 읽는 이의 번민 또한 크다. 서평을 쓰자니 정치평론을 해야 하겠고, 그걸 피해서야 좋은 서평은 아닐진대, 차마 감당할 역량과 의욕이 없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저자 유시민에 대해서만 쓴다고 해도, 그게 정치인 유시민과 무관하다고 곧이 읽을 이도 없을 것이다. 독자들의 그런 공통감각이야말로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자체보다도 유시민이 더욱 심각하게 의식했을 문제였을 테고 말이다.

  ‘국가주의적 국가관’, ‘자유주의적 국가관’, ‘계급주의적 국가관’을 각각 설명한 제1장부터 3장, 그리고 고전 철학자들의 ‘통치자론’의 내용을 개괄적으로 설명한 4장까지는 고등학교 때 배운 정치·사회 교과서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서술 방식도 대학 교양입문서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다. 다만, ‘애국심’, ‘혁명과 개량’의 내용을 다룬 5, 6장의 내용은 그 자체는 새롭지 않더라도 앞서 등장한 정치 입문서의 내용과 함께 나오는 법은 드물기에 흥미롭게 읽히는 부분이다. 1-4장까지의 객관적 지식을, 5, 6장에서 제기한 애국심에 대한 사유, 혁명과 개량의 논리적 구도에 적용 ·서술하는 부분에서 저자의 문제의식을 드러내고자 시도한 대목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여기서 대한민국의 보편적인 애국심의 개념은 피히테가 주장한 ‘배타적 사랑의 감정’이며, 또한 이 단어는 국가주의자들이 독점했다고 적확하게 지적한다. 그리하여 자유주의자와 진보주의자들이 ‘애국심’을 표 나게 내세우지 않는 것은 이해 못할 바 아니지만, 그가 보기에 그것은 현명한 커뮤니케이션 전략은 아니다. 이러한 전제 하에 그가 선택한 애국심의 정의는 르낭의 개념에 바탕을 둔 것으로, “국가라는 하나의 공동체에 함께 귀속되어 훌륭한 삶을 영위하고 공동의 선을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137)이다. 물론 유시민이 택한 ‘애국심’과, ‘사회변혁’, ‘진보’에 대한 정의는 단지 그가 그것을 선택했다고 해서 정치인으로서의 그의 이상과 성격을 담보해주는 것은 아니다. 이는 모든 저자의 경우에 다 해당되지만, 특히 정치인 유시민은 바로 그런 의심과의 정면대결을 피할 수 없고, 피해서도 안 될 것이다.

  다만, 그의 책 전반에 걸쳐 이러한 서술방식이 매우 정치적으로 활용되고 있음은 지적해두어야 하겠다. 그러니까 애국심을 ‘배타적 사랑’으로 개념화하여 전체주의적 국가관으로 나아가는 것이 정향되어 있었던 피히테의 주장, 애국심을 사악하고 위험한 감정으로 간주하여 홀로 성자처럼 살아간 톨스토이, 그리고 애국심을 주민들 자신의 의지에 의해 발생하는, 함께 귀속되어 살면서 실현하고자 하는 가치 또는 목적에 대한 사랑과 충성심이라고 주장하는 르낭으로 세 가지 선택지를 제시하고, 저자 그 자신의 견해를 그중 가장 온건하면서도 적극적인, 그러니까 이론과 현실 두 측면 모두에서 가장 변증법적으로 고양된 위치에 자리매김하는 이런 서술 방식 말이다. 이런 방식으로 합리성과 진정성을 보장받는 것은 가장 손쉽게 정치적 서사를 구성하는 전략이기에 예민하게 의식되어야 한다.

  7, 8, 9장은 ‘진보’와 ‘국가의 도덕’을 의제로 설정하여, 정치인 유시민 자신이 표방하는 ‘진보자유주의’의 논리적 근거를 설명하기 위해 마련된 장이다. 그는 라인홀트 니버를 논리적 스승으로 삼아 이렇게 주장한다. “나는 자유를 원하는 것과 똑같이 간절하게 정의를 소망한다. 그래서 자유주의 국가론이라는 땅을 딛고 정의를 실현하는 국가를 바라보며 나아간다. 이것이 내가 스스로를 진보자유주의자라고 말하는 의미이다. (...) 진보자유주의자는 민주주의를 통한 사회개량의 길을 선호한다.”(242-243) 그리고 이러한 철학을 실현한 현실모델로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이 소환된다. 저자가 베른슈타인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한 수사는 “졌지만 이긴 정치인”이다. 그 이름, 어딘지 익숙하다. 기시감을 탓할까.

  9장에서 저자는 베버의 책임윤리를 제시하며, 그것을 의식한 현실적 최선으로서 ‘연합정치’를 주장한다. 과연, 연합정치는 그의 ‘철학’의 산물(?)이었음을 새삼 확인하게 하는 대목이다. 그가 1987년부터 2007년까지 실시된 진보진영과 자유진영의 연합 사례와 그에 따른 승패 및 표차를 계산하며 주장하는 것은 일명 ‘섞임’의 정치다. “이념과 정치문화의 ‘섞임’을 통해 진보의 힘을 키우는 것이 연합정치이다. (...) 자유주의자와 진보주의자가 대중의 존경과 믿음을 받는 길이 바로 연합정치에 있다. 연합정치를 통하지 않고서는 훌륭한 국가를 만들 수 없다.”(282-283) “책을 쓰면서 정치인의 시각을 유지하려고 노력”(286)했다는 유시민의 책은 이같은 문장으로 끝난다.

  그는 책을 쓰면서 두 가지 소망을 가졌다고 한다. 서로 다른 국가관을 가진 사람들의 생각을 이해하는 것과, 정치인의 글쓰기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것. 어떤가. 전자는 유시민의 책이 한 것이 아니라, 정치철학 입문서의 양식 자체가 한 것이다. 그렇다면, 후자는? ‘정치인의 글쓰기’의 이상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 먼저 필요하겠다.

  아쉬움 아닌 아쉬움을 짚자. 유시민은 대한민국에서 정치인을 해야 되는 존재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던지면서, 정작 ‘국가 밖’에 대한 삶에 대해서는 아예 사유의 가능성을 차단해버렸다. 현실정치를 수행하는 정치인과, ‘탈국민, 탈국가’의 상상은 결코 만날 수 없고, 만날 필요도 없는 것일까. 국가의 독점적·배타적 폭력을 승인하는 것을 좁은 의미의 국가주의자 혹은 마키아벨리스트라고 할 수 있다면, 국가를 상대화하지 않는 것 역시 그러한 호명과 아주 잘 어울린다. 그런 의미에서 “휼륭한 국가 없이는 시민들의 훌륭한 삶도 있을 수 없다.”(7)라는 문장을 인용하는 사람은 언제나 ‘국가주의자’의 혐의에 노출되어 있다. 이제 참다가, 참다가 묻는다. 그렇다면 저자는 ‘국민’을 도대체 뭐라고 생각하는가. “국민이란 무엇인가” 말이다. 국민은 왜 국가 없이 못 살면서도, 국가에게 버려지는가. 한 인간이 시민이 되고, 국민이 되는 것은 어떤 문제인가. 저자 유시민이 답해도 되고, 정치인 유시민이 답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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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화는 정치다(장 미셸 지앙, 목수정 역, 동녘) 

"문화는 정치다". 온갖 질문들이 빗발치게 하는 제목이다. 이 책의 키워드는 '문화정치'로 설정되어 있으며, 이 책의 소개란에는 '문화'와 '정치'의 생소한 결합에 대해 말하는 것이 저술의도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문화'와 '정치'의 결합은 사실 하나도 안 생소하다. 아마 "정치는 문화다"라고 말해도 이의가 거의 없을 정도로, '문화'와 '정치'의 상호보족관계에 대해서는 익숙하다. 그렇다면, 이 책이 '문화정치'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부터 물어야겠다. '문화정치'란 말은 이미 '1910년대의 무단통치에 이어, 3.1운동의 영향으로 수행된 1920년대 일제의 통치양식'을 일컫는 말로 학술적 시민권을 얻었다. 그런가 하면, 최근에는 TV와 영화, 음악과 공연과 같은 대중미디어를 다룬 비평들 또한 '문화정치'를 화두로 삼고 있다. 과연 '문화정치'란 무엇인가. 이 책은 이 물음의 답을, 최근 정치적으로 가장 '뜨거운' 나라인 프랑스의 역사로부터 찾는다. 물론 역자는 아주 적실하게도 최근 가장 '선동적인' 여성 칼럼니스트 목수정이다. 

 

2. 다미가요 제창(정영혜, 후지이 다케시 역, 삼인) 

   이 책 제1장에는 저자의 에누리 없이 완벽한 논리가, 가장 아름다운 문장으로 번역되어 있다. "결국 피차별자가 그 차별을 고발하는 것은 단지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이기 때문이다. 차별을 방치하지 않기 위한, 스스로 내면화하지 않기 위한 의무 말이다. 결코 차별을 없앨 책임을 혼자 도맡아서가 아니다. 그런데 ‘다수자’들은 이러한 ‘소수자’의 고발을 <지원>한다는 형태로 반차별의 태도를 취하려고 한다. 그러나 차별과 싸우는 주체가 되고 차별을 없애는 데 사회적 의무와 책임을 다해야 하는 것은, 오히려 차별하는 사람들이지 피차별자가 아니다. 그런 것을 ‘다수자’가 ‘소수자’를 <지원>한다고 하는 순간, 그 책임은 교묘하게 ‘소수자’에게 전가되고 ‘해주기’, ‘받기’라는 상하관계가 생겨나 다시 ‘다수자’가 우위에 선다. 이러면 차별 구조를 똑같이 덧칠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최근 한국 독자들에게 널리 알려진 재일조선인의 문제의식이 강상중, 서경식과 같은 남성의 것이었다면, 이 책에서 2.5세 여성 재일조선인인 저자는 인종주의와 국가주의의 공모에 '젠더 정치'마저 가세한 차별의 구조를 사정 없이 파헤친다. 그리하여 "다미가요 제창", 기미(君, 군주)를 다미(民, 민, 백성)로 바꿔 국가로 정해진 기미가요 대신 다미가요를 부름으로써, 강요된 국민국가의 국민 위치를 넘어서자는 결의가 담겨 있는 제목을 달았다 한다. 너무 익숙한 결론인가? 그 아쉬움이 바로 '다문화주의'에 대한 우리 사회의 사유가 이제 막 시작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과 유관한 것이 아니겠는가. 

 

3. 느낌의 공동체(신형철, 문학동네) 

  기어코 '추천'을 하고야 말게 만드는 게 신형철의 힘이라면 힘이다. 신형철이라는 눈에 띠게 똑똑한 사람이 이 미치게 찌질한 시대에마저 그렇게 열심히 읽고 쓰지 않았다면 문학 따윈 옛날에 버렸을 거다, 라고 말하게 만든다. 내가 신형철에 대해 가지고 있는 믿음과 실망은, 그가 고백하는 문학에 대한 애증, 그것과 약간 닮았다. (물론 나는 그처럼 열렬하게 고백하지 않을 것이고, 최대한 계산하며, 끝내 숨길 것이지만) 아직 잊지 않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그가 쓴 문장들의 울림을. 그때 '다시' '미문'이 가진 위안을 힘을 믿기 시작했다. ('미문'에 대해 주관적으로 재정의하게 해줬다는 점에서 그에게 조금 감사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지혜와 성실에 대한 찬탄을 들을 때면 '나도 조금은 그렇게 느껴', 라고 동의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온갖 시와 소설집 머리말과 뒷표지에 예의 그 '미문'으로 된 주례사 멘트를 쏟아낼 때는 숱하게 실망도 해봤다. 이제부턴 미워하겠다고 '거의' 다짐도 해봤다. 내가 보기에 그는 '문학'에 대해서는 '급진적'이고, '정치'에 대해서는 '온건한' 듯 했다. 그런 이분법이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그런 걸 왜 싫어했는지 가끔은 나도 스스로에게 묻고 싶다.  그런 걸 다 걷어치우고, 위악과 교만, 과장과 허영 없이 마음을 건드리는 문장들이 요즘 내게 필요하다. 그가 적은 서문의 말대로 "느낌의 공동체", 그 소박한  공동체에 가끔은 귀속되고 싶단 말이다. 

 

4. 포 피시(폴 그린버그, 박산호 역, 시공사) 

 '올해의 가장 멋진 책표지' 같은 걸로 뽑아줘야 할 것만 같은 책(당연히 한국어판 말고 원서의 것) <포 피시>의 네 주인공은 연어, 농어, 대구, 참치다. 헛, 다 맛있는 것들!!! 생선 그림을 보고 거의 파블로프의 개처럼 반응하고 있을 뻔한 순간에 이런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영국 정부에서 권장하는 것처럼 일주일에 두세 번씩 생선을 먹어서 영양을 섭취해야 한다는 기준이 전 세계인에게 적용된다면 지금보다 바다가 서너 개는 더 있어야 한다" 아, 이 책은 강제 양식과 남획을 자행하는 인간의 탐욕에 의해 파괴되는 해양현실을 조명한 책인가보다. 그래서 이 책은 서두에서 '단 한 번이라도 물고기를 식품 아닌 생명으로 여긴 적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전에 나온 또 하나의 좋은 책, <헝그리 플래닛>(윌북, 2008)도 이 물음에 대해 생각해보라며 독자에게 '얼굴을 가진 동물들'을 보여줬었다. 또랑또랑한 눈을 가진 소와 돼지, 양들이 네모 반듯하게 잘라져 부위별로 포장되는 과정은, 적어도 그걸 보는 그 순간에는 '불편한 진실'로 다가왔었다. 그런데, '물고기'는 얼굴을 가졌나? 식물에게서 '얼굴'을 찾지 않듯, 물고기의 '통각(痛覺)'도 조금 상상하기 힘들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그 문제에 답하기 위해 '물고기의 생명'에 집중하기보다, '식량자원과 환경파괴'의 문제로 다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두렵도록 검푸른 바다와 물고기의 얼굴들을 떠올릴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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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고쿠 2011-06-08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문화는 정치다>를 갖고 있습니다. 아직 읽지 못했지만...
재일조선인이 쓴 <다미가요 제창>이 참 끌리네요.

윈터 2011-06-08 20:48   좋아요 0 | URL
앗, 교고쿠도 님 반갑습니다.
<문화는 정치다>는 순전히 '문화정치'에 대한 오랜 관심과, '목수정'에 대한 최근의 관심, 그리고 '프랑스'에 대한 일시적 관심에 의해 선택했습니다 ㅎㅎ 읽어보고 싶어요.
<다미가요 제창>은 저도 기대가 되는데요. '재일조선인'이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남성의 목소리들과 동질화되었던 '여성' 재일조선인 학자의 목소리를 들어볼 수 있을 거라 여겨집니다. 이미 일본에서는 많이 읽히고,여러 독자들에게 귀감이 된 책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역자의 성실성과 영민함에도 깊은 믿음을 가지고 있고요. ^^

교고쿠 2011-06-08 21:17   좋아요 0 | URL
사실 일본의 천황제 자체를 회의적으로 보고 있는 저로써는(저는 재일조선인들과 비슷한 정서를 갖고 있는듯 합니다), 저 책 반드시 읽어봐야겠어요. 서경식, 강상중, 이양지, 현월, 유미리, 양석일, 원수일, 이회성 등의 재일조선인이 쓴 책들을 서재에 한가득 꽂아두고 있습니다. ^^
(오죽했으면 도일해서 재일조선인 문학을 연구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습니다. 한국에서는 국문학을 전공했지만...)

윈터 2011-06-08 22:06   좋아요 0 | URL
네. 이 문제에 관심이 많으시군요. 교고쿠도 님과 앞으로 유익한 이야기를 많이 나눌 수 있을 것 같네요. ^^
 

<오늘의 교육> 2호(2011. 5)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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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여’들의 반란과 명륜동의 봄

-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 대학원생들이 보낸 ‘475시간’에 대한 기록


 

지난 겨울을 생각하니 벌써 온몸에 으슬으슬 한기가 느껴진다. 한결같은 찬바람을 맞아도 그게 결코 익숙해지지 않았던 겨울이었고, 나는 그때 기상예보를 유난히도 열심히 챙겨 봤다. 약한 바람, 센 바람, 더 센 바람, 비바람……. 나는 바람의 소리와 결, 그 속도와 세기를 열심히 관찰하게 됐고, 그에 따라 사람의 마음도 강해지거나 약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바람과 마음의 관계에 대한 이 이야기를 언젠가 꼭 글로 쓰고 싶었다.

   2011년 2~3월은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 대학원생들에게 아주 특별한 시간이었다. 뭐부터 써야 할까. 아와 피아彼我, 주관과 객관이 뒤섞인 시간. 먼저 우리의 ‘투쟁 아닌 투쟁’의 경위를 말해야겠다. ‘등록금 투쟁’, 약칭 ‘등투’, 속칭 ‘개나리 투쟁’. 아, 다 아는 얘기인가.

 

전야前夜, ‘마음이 소금밭’

 

   전쟁 같은 학기를 마친 후 겨우 만난 꿀 같은 방학이건만, ‘마음은 소금밭’이다. 휴가를 가거나 귀향한 사람은 없다. 세미나와 논문, 그리고 중단 없는 일, 일, 일……. 4,749,000원이라는 금액이 적힌 등록금 고지서를 받아 든 두 손은 떨렸고, 마음은 급했다. 작년에 비해 4.2% 인상된 금액이었고, 학부 인상률 3%를 훨씬 상회하는 수치였다. (그러고 보니 작년 이맘때도 학교 당국은 학부 등록금은 동결한 반면 대학원 등록금은 5.1%나 인상해 놓고, 등록금 동결을 통해 학생들의 고통을 분담했다며 대외홍보에 열을 올렸다.)

  

   그 숫자는 매우 비현실적으로 보였지만, 우리가 당면한 상황은 꽤 구체적이었다. 누군가는 대출 절차를 알아보느라 분주했고, 누군가는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이유로 세미나에 자주 결석했으며, 누군가는 소리도 없이 휴학했다. 그들이 지금까지 대학원에서 보낸 시간과 노력이 아까웠지만, 아무도 그들을 붙잡거나 나무라지 못했다. 교내 장학금은 등록금에 비해 턱없이 적고, 그나마 있던 인문학 장학금 제도도 폐지됐다. 학부 등록금 인상률은 정부 권고안에 따라 3% 미만으로 제한되어 있다지만, 대학원 등록금에 관해서는 아무런 규제도 없다. 그런 가운데 5년간 등록금이 무려 100만원이나 올랐다. 그런데도 달라진 건 없다. 학교 건물은 늘어만 가는데, 연구 공간은 여전히 부족하고, 개설된 수업 수는 적으며, 학생 복지는커녕 도서관에는 책도 없다.

 

   대학원생들이 등록금 투쟁을? 그런 말은 들어본 적 없다. 그나마 조금 불평이라도 할라치면, 곧바로 ‘대학까지는 국민 정서상 의무교육에 가깝다지만, 대학원? 니들이 선택한 거잖아!’라는 핀잔만 돌아올 뿐, 아무도 대학원생에게 관심 갖지 않는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안 움직이는 나약하고 안이한 부류들. 아무도 안 읽는 글을 읽거나 쓰는 데 홀로 만족하고, 교수의 심부름을 하느라 온 청춘을 다 보내도 끝내 저항하지 않을 자들. 시간강사들의 열악한 현실이 가까운 미래인 줄 알면서도 그저 참는 자들. 대학원에서 공부한다는 것이 꼭 죄짓는 것만 같다.

 

   언제까지 참아야 하나. 등록금을 대기 위해 일하다가 쓰러지거나, 대출 빚을 갚다 못해 자살하는 학생들이 많다는 보도 기사는 거짓이 아니다. 우리는 죽어 가고 있다. 그래서 어느 날 누군가가 “뭐라도 좀 해봅시다!”라고 말했을 때, 우리는 놀라거나 망설이지 않았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지금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다.

 

   가칭 ‘박카스 프로젝트’가 시작된 건 2월 10일 즈음이었다. 모두들 힘들겠지만, 박카스라도 마시고 힘내 보자며 서로를 격려했다. 우리는 대학원생들이 더 이상 학교 당국의 부당한 요구에 순순히 굴복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로 했다. 그간 읽었던 책에 적힌 혁명과 진보에 대한 앎을 총동원해 우리는 열띤 토론을 벌였다. 1980~1990년대에 격렬했던 투쟁 사례들이 떠올랐지만, 우리는 그 기억에 쉽게 몰입하지 못했다. 우리는 ‘싸움’ 또는 ‘투쟁’이라는 역사적 용어의 사용을 의도적으로 꺼렸고, 대신 우리의 움직임을 ‘운동’이라 부르며 ‘혁명’과 유비했다. ‘투쟁’이 정의에 대한 열정과 특유의 배타적 폭력을 동시에 상기시키는 말이었다면, ‘혁명’은 아직 한 번도 본 적 없는 미지의 것이었고, 그 내용은 우리가 채워 나갈 것이었다. 인문학을 공부하는 대학원생 정서에 걸맞은 변화의 움직임을 만들고 싶었다.

 

   우리는 비민주적이고 불합리하게 책정된 문과대 대학원 등록금액인 4,749,000원에 반대하는 의미로 2월 16일부터 3월 7일까지 ‘475시간’ 동안 릴레이 1인 시위를 하기로 했다. 장소는 학교 본부가 있는 곳이자, 이 학교에서 가장 비싸고 상징적인 건물인 600주년 기념관 앞으로 정했다. 20일간의 짧지 않은 여정이 될 터였지만, 한 명이 하면 475시간, 10명이 하면 47.5시간, 20명이 하면 24시간이다. 그래서 우리는 ‘475시간 릴레이 1인 시위 교대 시간표’라는, 세상에 없는 표를 만들었다. 각자의 시위 시간대가 적힌 네모 칸에 빼곡히 배치된 26명 동학들의 익숙한 이름들이 왠지 다르게 보였다. 그건 시각적으로 무척 아름다웠는데, 마치 세상에서 가장 뜨겁고, 가장 불온한 ‘성좌’처럼 보였다. 이제 준비는 끝났다. 목표는 2011년도 등록금 동결, 대학원 연구 환경 개선, 총학생회의 반성과 쇄신! “춥고, 따분하고, 불쌍해 보일 수도 있지만 ‘즐겁게’ 해보자!”

 

싸움 혹은 축제의 시간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 대학원생 일동’의 이름으로 총장 및 각 부서 처장에게 우리의 운동 취지와 요구 내용을 담은 길고도 열렬한 편지를 발송했다. 어떤 말이든 좋다. 일단 답하시라. 그러나 우리에게 돌아온 것은 “‘일동’이란 정확히 누구를 말하는 것이냐”라는 참으로 촌스러운 물음이었다. ‘주동자’, ‘배후’ 운운하는 걸 보니 근 십 년간, 이 학교의 일천한 운동 역사를 알겠다. 학교 당국이 이런 구닥다리 매뉴얼을 갱신할 수 있는 기회를 그동안 우리는 거의 주지 않았던 것이다. 반성하고 또 반성한다.

 

   2월 16일. 드디어 ‘등록금 인상 반대 475시간 릴레이 1인 시위’의 시작을 알리는 성명서가 교내 게시판에 나붙었다. 첫 타자가 별 어색함도 없이 거대한 건물 앞 벌판에 홀로 서 있고, 학우들이 “파이팅!”을 외치며 주먹을 불끈 쥐고 지나간다. 좋은 시작이다. 그런 격려가 ‘우리의 힘’이라는 걸 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등록금은 학생대표들이 위원으로 참여한 ‘등록금심의위원회’(이하 ‘등심위’)와 협의로 결정한 것이니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등심위 자료 공개는 대학원 총학생회의 소임이므로 학교는 그에 대한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것, 등심위 자료의 산출 근거를 학생들이 알아야 할 이유는 없다는 것, 신임 총장이 부임한 이 시기에 국문과 대학원생들의 움직임은 ‘분위기’를 해친다는 것, 등록금 동결이나 재협상은 절대 불가능하며, 대신 국문과가 원하는 것이 있으면 들어주겠다는 것이 학교 측의 주장이었다. 학교 측은 학생 대표가 제 목소리를 낼 수 없도록 구조화된 등심위 제도를 십분 활용했으며, 학생들의 소통 요청에 대해 고압적이고 불성실한 태도로 일관하거나, 국문과에 특혜를 주겠다는 식으로 우리를 교묘하게 회유하려 했다.

 

   그날 이후, 아침부터 저녁까지 시위하고 밤에 집으로 돌아와 온라인 선전을 하는 날들이 계속됐다. 나는 매일 시위 내용과 그에 대한 소회를 학과 게시판 및 각종 포털 사이트와 블로그, 트위터 등에 기록했다. ‘공감’과 ‘추천’, ‘좋아요’와 ‘리트윗’에 기댄 밤들이 외롭지 않았다.

 

   둘째 날. 영하 2도의 날씨에 시위 현장에 오롯이 서 있자니 어제에 이어 학교 측이 또 부른다. 어제와 똑같은 얘기를 하며 앉아서 커피 좀 마시란다. 하지만 이미 배부른 걸요. 밖에 서 있을 때, 학생들이 주고 간 캔커피를 너무 많이 마셔서요. 3일째 되는 날에는 대대적인 학회가 있었다. 여러 학교에서 오신 선생님들이 행사장으로 들어가며 우리를 본다. 웃으며 눈인사를 나눈다. 평소라면 우리도 학회장에 들어가 선생님들의 논문 발표를 열심히 들었겠지.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나. 아아, 만물이 흔들리는 금요일이다.

 

   시위가 계속되자, 현장에 놓아둔 서명철에 우리의 운동을 지지하는 이름들이 빈틈없이 적힌다. 낯모르는 학우들이 따뜻한 음료와 핫팩을 슬그머니 쥐어 주고, 홀로 선 내게 이런 저런 말을 건넨다. 그 감동을 전할 길이 없어, ‘1인 시위’ 말고 ‘프리 허그’를 할까 잠시 생각해 본다. 동아시아학과, 철학과, 사학과, 교육대학원 원우들이 앞 다투어 연대를 선언하며 지지성명서를 발표했다. “공부하고 싶다. 먹고는 살아야겠다. 이 어디쯤에 대학원생들의 현실이 있습니다.” ‘날 것’의 분노가 담긴 이 격문과 투서들이 교내 게시판을 사정없이 메웠다.

 

   6일째 되는 날에는 복잡다단한 절차를 거쳐 등심위 회의록을 ‘겨우’ 열람했다. 학교는 학부 3.1%, 대학원 4.1% / 학부 3.0%, 대학원 4.2%의 두 안을 등심위에 참여한 학부 총학생회장과 대학원 총학생회장에게 제시하며 선택을 요구했다. 이 안에 따르면 학부생과 대학원생은 마치 일종의 ‘부채 공동체’ 같다. 학교 측은 대학원 총학생회장에게 ‘선배로서 후배에게 양보할 것’을 제안하고, ‘의좋은 형제’는 그에 따르기로 한다. 뜨거운 모교애와 형제애가 흘러넘치는, 참으로 감동적인 텍스트다. 대학원 총학생회장은 학부 등록금을 3% 이상 올릴 경우, 우리 학교가 정부의 보조금을 받지 못하게 되며, 등심위를 통해 이 사안을 결정하지 못하면 등록금에 대한 의결권을 가진 총장이 더 높은 인상률로 등록금을 책정해버리기 때문에 불가피한 결정이었다고 해명했다.

 

   22일, 졸업식을 앞두고 학교 측은 또 한 번 우리를 부른다. “졸업식 날만이라도 시위를 중단해 달라. 너희가 외롭게 시위하는 모습이 학교의 대외 이미지를 해친다.” ‘브랜드 이미지’, ‘미래지향적 융복합 학문 지향’ 같은 학교의 과잉수사는 언제 들어도 허무개그 같아서 우리에게 아주 작은 충격도 주지 못하지만, 대신 역설적으로 큰 영감을 준다. 그렇다. 외로움은 우리의 무기다. 우리의 외로움이 부를 상식적인 동정과 행동이 학교는 많이 두렵다.

 

   27일에는 비가 많이 왔다. 텅 빈 교정에서 주룩주룩 쏟아지는 빗소리만을 벗 삼아 서 있자니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저절로 비장해진다. 과연 이 짓이 정말 ‘변혁의 무브먼트’인지 아니면 그냥 ‘개고생’인지를 진지하게 생각해 본다. 오들오들 떨며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답이 잘 안 나와서, 일단은 그냥 뜨거운 김이 훅훅 나는 엄마손 칼국수 같은 걸 생각하며 시간을 보내기로 한다. 내 앞 주자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릴레이가 끝나면 꼭 물어봐야지.

 

   3월 2일. 믿을 수 없지만 개강이다. ‘학생은 사실 개강을 위해 있는 건데, 난 왜 자꾸 학교가 답답하게 느껴질까. 나쁜 학생! 나쁜 학생!’ 하며 현장에 서 있자니, 신입생들이 와르르 와서 서명철에 꼬물거리는 글씨로 잘 못 알아보겠는 메시지를 써 놓고 간다. 무른 손가락을 가졌어도 실은 제법 단단한 이들이겠지. 한편, 우리의 면담 요청을 한사코 외면하던 신임 총장의 발언이 학교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려 우리의 전투력을 진작시킨다. ‘등록금 없으면 학자금 대출 받으라’(“비전을 통해 글로벌 리딩 대학으로 도약해야” <성대신문> 2011년 3월 2일)는 말씀. 대출 권하는 대학 총장이라니! ‘글로벌 리더’라서 그런지 과연 범인凡人들의 상식을 초월한다.

 

   드디어 3월 7일. ‘등록금 인상 반대 475시간 릴레이 1인 시위 종료 선언식’이 있는 날이다. 어젯밤에 게시해 둔 3차 성명서의 제목은 “끝나도 끝난 게 아니다!” 아침부터 집에서 각종 자료를 준비하고 여기 저기 연락하느라 출발이 늦었다. 급히 택시를 잡아타니, 즐겨 듣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내가 좋아하는 노래들이 끝도 없이 나온다. 아, 내리고 싶지 않다!

 

   우리의 운동을 지지해 준 모든 연대 단위들과 함께할 종료 선언식을 알리는 초대장에 나는 이렇게 썼다. “475시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을 만큼 상식적인 시간 감각을 교란시키는 참으로 신비롭고 이상한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또한 추위와 긴장, 침묵과 소란, 분노와 외로움 등 그 시간을 구성하는 그 모든 성분들이 우리 몸에 각인된, 가장 물리적이고 구체적인 시간이기도 합니다. (……) 비바람 몰아치고, 가끔은 엷은 햇볕에 서 있는 등이 따뜻하곤 했던 475시간 동안 우리가 나눈 이야기와 눈맞춤, 그리고 희망을 기념하려 합니다.”

 

   색색깔의 피켓을 들고 도열한 우리 모습은 흔히들 우려했던 것과 달리 전혀 무질서하지 않았고 질서와 조화 그 자체로 보였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뜨거운 박수를 보내줬는데, 그래도 그게 끝이라면 아마 울었을 게다. 하지만 우리의 움직임은 교내외에 널리 퍼졌고, ‘등록금 인상을 반대하는 학부생 모임’이 결성되어 우리의 시위를 잇겠다고 하니, 마냥 아쉽지만은 않았다. 내가 600주년 기념관 앞에 언제나 ‘홀로’ 서는 데도, 쉽게 내 자리를 알아보고 늘 같은 자리에 설 수 있었던 건, 그들이 항상 내 옆에 투명하게 함께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걸 이제야 알겠다.

 

끝나도 끝나지 않는

 

   “끝나도 끝난 게 아니다!”라고 외쳤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것만은 아니다. 열정은 더디게 자라고 냉정은 빠르게 온다. 이른 봄의 꽃샘추위도 늦겨울의 칼바람만큼 매서워서, 많은 이들이 지치고 상처받았다. 낯선 이들과의 연대에서 오는 긴장감, 점점 제도의 심층으로 육박해 가는 운동 방식, 학업과 생업, 그리고 운동의 병행으로 인한 부담은 누구에게나 버겁다. 누군가에게는 휴식이 필요하고,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필요하다.

 

   하지만 분명한 건, 국문과는 이제 더 이상 혼자 싸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우리의 운동을 지지해 준 여러 단위들과 함께 ‘성균관대 대학원 등록금 인상 반대 연대회의’를 출범했다. 이 기구는 등록금 최종 납부 기간인 3월 8일부터 11일까지 본부 앞에서 집회를 개최하는 등 2차 행동을 전개했고, 3월 22일에는 대학원 등록금 문제를 사회적으로 환기하기 위해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안을 접수했다. 이제 남은 일은 비민주적인 기존 질서와 깊이 밀착되어 개인주의가 극도로 만연한 대학원 사회를 바꾸는 일이다. 식물화된 총학생회에 우리의 권익을 전가하는 것이 아닌, 대학원생 누구나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진정한 학생 자치 기구를 만드는 일이 절실하다. 그리하여 학교와 사회가 조장하는 구조악에 맞서 학생들의 권익을 지키기 위한 움직임을 지속할 수 있어야 한다.

 

   이제 더 이상 각종 미디어가 보도하는 고학생 드라마는 안 봤으면 좋겠다. 대학의 윤리와 정치에 대해 치열하게 사유하고 행동하지 않는 한, 대학원생은 여전히 ‘잉여’의 존재이며 그것이야말로 책에 대한 배반이다. 이것은 역설이 아니라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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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교육 05+06월호 차례

 

 





 

여는 글 선의의 경쟁은 없다  | 박복선

 

이계삼 선생님께 - 창간호 특집 ‘오늘날 학교 현장의 교육 불가능’에 대한 사유‘를 읽고 | 안준철

안준철 선생님께 | 이계삼

바라보다 | 최승훈 기자

‘동시대인’의 죽음, 동시대인의 ‘죽음’ - 당대 정치공동체 구성의 위기로서의 대학의 위기 | 엄기호

 

특집   대학의 교육 불가능

2011년 한국 교육, 야만의 지형도를 그리다 2

 

● 학문하지 않는 대학 | 문수현

● 대학, 악마와 거래하다 | 노영수

● ‘잉여’들의 반란과 명륜동의 봄 | 오혜진

● 공부할수록 가난해지는, 가난할수록 공부할 수 없는 | 서유정

● 괜찮다, 안 괜찮아도 괜찮다 | 최은정 기자

● 기업화된 대학 : 잔인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야만 | 정용주

 

인터뷰  정광필 전 이우학교 교장

이우학교, 8년의 실험을 이야기하다| 박복선, 이진주, 최승훈 기자

진보 교육감 취임 1년, 교육은 진보 중인가- 진보 교육감 시대와 교육운동 | 한만중

 

기획 - ‘가르치는’ 인권을 넘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 인권 교육 |민진(한낱)

인권적인 학교를 향한 한 교사의 고군분투기 | 이재익

  어느 새내기 교사의 죽음 | 김요한

학교부터 비정규직 없애야죠? | 조영선

“우린 괜찮다. 괜찮다” | 조용진

필요하면 네 곁에 있어 줄게 | 김윤희

일만 킬로미터를 돌아서, 다시 여기로 | 김정현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따라 움직인다 | 장덕균

 

리뷰

교육의 역할을 고민하다 -《왜 잘사는 집 아이들이 공부를 더 잘하나?》| 석영

천국으로 가는 모든 길이 천국이다 -《환대하는 삶》| 전성원

교과서 ‘너머’를 위한 교과서 다시 읽기 - 《교과서를 믿지 마라!》| 박진환

‘다른 세상을 위한 수사학’ 사용 지침서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 박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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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04 2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윈터 2011-06-05 17:19   좋아요 0 | URL
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쓰신다는 책 기대됩니다. 꼭 써주세요! 요즘 불붙고 있는 등록금시위가 더 커져서 큰 횃불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뭘 더 할 수 있나 고민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