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꿈은 우연이 아니다 - 뇌가 설계하고 기억이 써내려가는 꿈의 과학
안토니오 자드라.로버트 스틱골드 지음, 장혜인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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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은 시일까, 환상일까?

심리학일까, 뇌과학일까?

꿈은 삶의 부수적인 어떤 것일 터, 그 자체가 주인공일 리 없다.

그런데 나에게 꿈은 매우 중요하다. 어떨 땐 현실의 부족함, 아쉬움을 메워주고 어떨 땐 현실을 이겨내게 도와주기까지 한다. 모든 이에게 꿈이 이렇게까지 중요하지야 않겠지만 일반적인 사람들에게도 꿈은 각자의 주인공인 을 움직이는 에너지 같은 것일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어쩌면 꿈속에서 또 하나의 삶을 살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할 만큼 꿈이 잦다. 매일 나를 다른 세계로 이끄는 그 꿈들의 의미를 알고 싶다. 주술의 영역에서가 아니라 과학의 영역에서. 정신의학과 심리학에서 꿈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나의 얕은 독서로 알아낸 바, ‘꿈은 현실 혹은 너의 불안을 반영한다.’ 이상의 딱 부러지는 해석을 찾지 못했다. 그렇다면 뇌과학은 꿈을 무어라 해석할까? <당신의 꿈은 우연이 아니다>는 그렇게 내 손에 들어왔다.

 

우선, 이 책은 꿈에 대한 다양한 갈래의 연구 결과들을 소개하고 있기에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꿈이란 무엇이다, 정답을 알려준다기보다 연구의 현황에 대한 일반인 대상 브리핑 정도로 보인다. 그래도 이 책은 학부모들이 읽으면 좋을 책이라고 생각한다. 충분한 잠(그리고 꿈)이 감정 처리, 학습 능력이나 문제 해결력 향상을 위해 매우 중요하다고 여러 연구 결과를 통해 역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잠이 낮에 공부한 내용을 어떻게 갈무리하는지 과학적으로 설명해 준다. 풀리지 않던 문제, 고민, 계획들이 한숨 푹 자고 난 후 정리되는 경험은 누구나 해보았을 것이다.

 

잠의 기능

어린 시절 성장호르몬은 대부분 잠의 깊고 느린 뇌파 수면 중 분비됨.

인슐린을 조절하고 항체를 생성하는 것도 잠의 관리 기능 중 하나.

면역 반응을 끌어올려 항체를 최대한 생성하는 시간이기도 함.

잠은 뇌의 폐기물을 청소하는 기능도 함. 신경세포 사이 공간에 축적되어 알츠하이머 진전을 유발하는 단백질인 베타 아밀로이드는 잘 때 2배나 빨리 뇌에서 제거된다. 하룻밤만 못 자도 뇌 간질 공간에 축적되는 베타 아밀로이드가 5%나 늘어난다.

 

우리의 뇌는 깨어 있는 동안에는 주변 상황에 집중하고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여 저장해 두었다가, 잠이 들면 정보를 검토, 수정, 파악한다.

기억은 몇 시간 동안 연약한 형태로 남아 있다가 뇌에서 응고화 된다. (실제로 새로운 단백질이 합성되어 신경세포 네트워크를 견고하게 이어 붙인다)

 

쇼팽의 피아노 곡을 연습하던 학생이 도저히 칠 수 없었던 부분을 다음 날 갑자기 칠 수 있게 되는 경우가 있단다. ‘연습한 뒤 밤잠을 자면 완벽해 진다.’ 공감하는 바이다. 글이 안 풀릴 때, 뭔가 기획할 때, 공부할 때도 너무 지치면 놓아두고 다음 날 다시 보면 쉽게 풀리는 경험을 많이 했다. 그게 자는 동안 뇌가 했던 엄청난 일이었다니!

 

꿈은 개개인의 지적 생활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다양한 창의력의 에너지가 되어 인류 전체의 문화, 문명의 발달에도 영향을 끼친다. 종교의 탄생, 성스러운 신적 세계와 세속 세계가 만나는 방법, 우주에 대한 개념 구축에 꿈이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는 것이다. 꿈의 계시로 고안하고 창작하고 아이디어를 얻어 얼마나 많은 예술 작품, 과학적 논리, 노래와 그림 등이 탄생했는가. 내 협소한 인생에서도 꿈은 많은 창의적 에너지의 원동력이었다.그런 의미에서 잠과 꿈은 참으로 소중하다.

 

꿈의 심리학적 기능으로는 "꿈은 잠의 수호자" 라는 프로이트의 말을 인용하고 싶다.

저자는 내내 꿈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프로이트에 대해 비판적이라고 말하지만 프로이트의 꿈이 중요하다는 믿음의 내러티브는 인간이 깊이 알 수 없는 존재라는 자기애적 위안을 주었다.’는 말에 깊이 공감한다. 내가 모르는 나의 또 다른 세계가 있으리라는 막연한 상상. 꿈을 자주 꾸는 사람들은 꿈속 세상이 또 다른 나의 세계라 믿는다. 얼마나 좋은가. 단 한 번의 삶을 살지만 수많은 겹의 삶을 또 살 수 있다는 것이.

 

꿈은 수용되지 않는 무의식적 요소가 낮 동안 의식적 인식에 도달하지 않도록 막는 마음속 감시 메커니즘이다. 이 책의 연구자들은 이 이론이 근거 없다고 말하지만 꿈의 완충작용이 없었다면 사그라들지 않았을 분노, 우울, 슬픔 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생각한다면 이 기능은 분명 유효하다고 본다.

 

잠은 우리의 자아 감각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대개 삶에서 중요한 사건에 대한 자전적 기억에 의존하는데, 잠은 이 기억 형성을 돕는다. 몇몇 실험 결과 잠이 감정 기억을 먼저 응고화하고 덜 흥미로운 기억은 잊어버리게 한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 잠은 감정 기억을 선택적으로 유지하지만, 그 기억에 다시 노출되었을 때 감정 반응의 강도를 줄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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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요새 - 사유의 미로를 통과하는 읽기의 모험
고명섭 지음 / 교양인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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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철학책이다. 아니, 철학책들의 서평집이다. 요약서라고 해야 하나? 놀라운 건은 플라톤에서 불교, 도덕경, 페미니즘까지 아우르지만 내용을 왜곡하지 않으면서도(즉 저자의 의견을 별로 담지 않은 듯 보이면서도), 주요한 내용을 건너뛰지 않으면서도 아주 쉽게 읽힌다는 것. 이토록 방대한 양(100권이 넘는 책)을 다루고 있는데 이 엄청난 지식을 단 한 권에 담은 것을 보면 책으로 돈을 벌 생각은 없어 보인다. 그동안 어마무시한 양의 책을 읽고 쓴 저자는 이제 자신만의 무언가를 구축할 때가 되었다. 아직 그러지 않는 이유가 고명섭의 기질 때문인지, 겸손한 탓인 건지, 아님 정말 독서와 글쓰기, 딱 거기까지만으로 자족하는 건지 모르겠다. 애독자로서 나는 그만의 저서를 기다린다. 요약이나 정리, 해설이 아닌.

마키아벨리는 아직도 잘 모르겠는 사람이다. 그래도 <군주론>을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은 있다. 공감해서라기보다 문제적이라서. 이 책의 프롤로그에서는 사마천이나 플라톤, 단테와 같은 위대한 사람들이 역작을 남길 수 있었던 근거로 그들이 맞닥뜨렸던 고난과 시련을 꼽는다. 일개 범인인 나로서는 시련을 겪고 역작을 쓰기보다 사랑도 명예로 이름도 남기지 않더라도 평온하게 아무 일 없이, 남들만큼만 살았으면 하는 욕망이 강하다. 그래도 마키아벨리가 자신의 곤고한 생활을 고백하며 했던 다음 이야기는 깊은 감명을 준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체력을 넘는 직장생활과 육아, 살림, 고단함과 그리움을 다 이겨내고 내가 살아낼 수 있었던 힘 역시 모든 것을 마치고 침대에서 넘겼던 책장, 그 밤들의 독서였기 때문이다. 잠들기 전에 읽을 수 있었던 책 몇 줄, 일기 몇 줄이 나를 살게 했었다. 그것으로 무엇을 이루고 성공의 발판으로 삼지 못했다 해도 그저 나는 그것으로써 살아낼 수 있었다.

 

"저녁에 오면 문 앞에서 온통 흙먼지로 뒤덮인 일상의 옷을 벗고 궁중의 의상으로 갈아입지. 우아하게 성장을 하고는 나를 따뜻하게 반겨주는 고대인의 옛 궁전으로 들어가, 나를 이 세상에 나오게 한 이유이자 오직 나만을 위해 차려진 음식을 맛보면서 그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이야기하고 그 사람들이 왜 그렇게 행동했던가를 물어본다네.... 이 네 시간 동안만은 나에게 아무런 고민도 없다네... 쪼들리는 생활도, 나아가 죽음까지도 나를 두렵게 하지는 못하네.”

 

읽어본 적도 없고 다만 나치에 부역한 철학자라고만 알고 있는 이지만 하이데거가 그랬단다. "잠든 사람은 깨울 수 있어도, 잠든 척하는 사람은 깨울 수 없다." . 어떤 맥락에서 한 말인지 모르지만 무릎을 칠 만한 말이다. 자신이 잘못 알고 있는지 깨닫지 못하는 자만큼 무서운 사람이 없다. 내란의 시대를 살아내면서, 신념의 다름으로 가족 간의 거리마저 멀어지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보면서 수많은 잠든 척하는 사람들을 본다. 그들은 자신이 아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겠지. 나 역시 나 자신의 생각을 사상이고 철학이며 신념이라고 자신할 만한 통찰력은 없는 평범한 사람이지만 학습도 성찰도 없이 맹목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많은 위험한 인물들과 같은 시대에 살면서 어쩌면 정말 무서운 사람은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모르는 척하는 사람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러면 그런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나에겐 고명섭이 좋은 친구가 된다. 세상 모든 철학을 읽는다고 해서 올바른 통찰의 힘을 얻을 수 있으랴만 그래도 이렇게 쉽고도 재미있게 세상과 시대를 풍미했던 이들 이야기를 들려주는 글 친구가 있으니 아무 생각 없이 독선에 빠지진 않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고명섭은 말한다. ‘자기 내부가 한없이 가난하다고 느끼지 않고서는 자기를 둘러싼 시대의 가난을 볼 수 없고, 그 가난을 볼 수 없으면 가난을 이겨내려는 투지를 불러일으킬 수 없다(원효, 수운, 이런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이라 말하여)’. 나의 가난하고 핍진한 영혼은 낮은 곳에서 하염없이 스스로를 성찰한다, 나 자신의 부족함에 대하여. 주변에 널리고 널린 아픈 사람들에 대하여 고통스러울 만큼 많이 자주 생각한다. 답은 보이지 않더라도 좀 넓게 볼 줄 알았던 사람들의 말과 글을 읽으며 하염없이 생각한다. 조금이라도 덜 틀린 길로 가려고.

 

모르는 영역인데 관심 있게 읽은 이는 엘렌 식수다.

엘렌 식수는 여성적 글쓰기를 페미니즘의 실천 전략으로 제시했단다. 페미니즘 운동의 처음은 글쓰기였을지도 모른다. 작고 미약한 일처럼 보이지만 생존 그 자체가 투쟁에 가까웠던 시절, 여성 작가는 존재하기 힘들었던 시절부터 글쓰기 그 자체를 투쟁으로 해온 사람들이 있다. 내가 아는 작가는 리베카 솔닛이나 정희진 정도이지만, 그들이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글을 써왔는지 알고 있기에 고작 글쓰기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도 잘 안다.

 

엘렌 식수가 보기에 세익스피어,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같은 이들은 남성이지만 자기 안에서 타자, 곧 여성성을 발견해 회복한 사람들이란다. 여성적 글쓰기는 여성과 남성 모두를 인간으로 해방하는 실천적 행위라면서.

20대인 딸내미가 한국의 페미니즘 운동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처음엔 여성의 삶 때문에 관심을 가졌다고. 그런데 책을 읽다 보면 여성의 삶을 말하는 것은 기후 위기, 환경 문제, 약자 인권, 이주민 이슈, 심지어 동물권까지 연결되더란다. 부분만을 보지 않고 삶을 관통하는 하나의 태도가 될 때 그 사유를 우리는 성찰, 나아가 철학이라고 부른다. 글쓰기에서 시작한 페미니즘적 관점은 결국 인권에 대한 고뇌로 나아가고 권력에 대한 새로운 접근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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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모노
성해나 지음 / 창비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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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소설은 기억할 것도, 인상적인 것도 너무 많다. 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책에 나온 이야기는 아니고 인터넷에서 검색해서 본 이야기지만) <혼모노>를 여러 계간지에 보냈지만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는 이야기. 최근에 나도 청소년에게 읽힐 계엄 소설을 썼지만 몇몇 출판사에서 연락도 못 받고 조금은 의기소침해 있었기 때문이다. 출판 방향이 안 맞을 수도 있지 뭐, 싶다가도 정말 재미있었으면 출판사에서 먼저 놓치지 않으려 연락을 했겠지 싶어 마음이 섭섭한 와중에, , 성해나 소설처럼 이렇게 재미난 이야기도 퇴짜를 맞는다고? 하면서 조금은 위로를 받는다. 뛰어난 예술가들에게도 거절당한 기억들은 많고 많다. 유명한 연예인들에게도 바닥을 헤매던 시절들은 있다. 그러니 상처받을 일이 아니라 힘을 더 낼 일이다.

 

하지만 성해나의 소설은 그런 작은 에피소드가 아니라 소설 그 자체로서 오래 기억할 만한 작품이 많다. 90년대 소설 이후 한국 소설을 거의 읽지 않는 나로서(오해는 마시라, 직업적 이유로 청소년 소설은 거의 섭렵한다)는 넷플릭스보다 재미있다는 그의 소설이 좀 궁금하면서도 재미있어 봤자겠지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다. 아니었다. 소설을 이렇게도 쓸 수 있구나, 이런 이야기도 소설이 될 수 있구나 싶은 마음에 놀라고 있다. 아니, 소재야 세상 사는 모든 이야기가 소설이 될 수 있겠지만 이렇게 이야기를 전개할 수 있다는 데 놀란다.

 

한마디로 그의 소설은 독자에게 스며든다.’

특별히 뛰어난 문장이나 독특한 문체도 아니고 엄청나게 자극적인 사건이나 반전이 있는 것도 아니다. 제일 처음 읽은 길티 클럽의 경우 한 영화 감독에 대한 덕질에서 묘한 정서적 긴장을 느껴 계속 읽게 되었다. 뭐 엄청난 반전(가령 그 멋진 감독의 악인성이 드러난다든지 평범하게만 보였던 화자에게서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오류로 인한 범죄 같은 것이 벌어진다든지)같은 게 있으려나, 하는, 분위기의 미묘함. 그런데 딱히 그런 건 없었다. 오히려 독자들은 김곤 감독이 자신의 잘못을 사죄하는 모습에 배신감을 느끼는 서술자의 모습에서 기괴함을 느껴야 한다. 이건 뭐지? 우리가 흔히 아는 정치적 올바름’, ‘과정의 정당성’, ‘진실성을 대하는 태도와 사뭇 다르다. 진실이 중요한 게 아니라 위상이 중요한 걸까? 도덕성을 웃도는 예술가만의 태도와 아우라가 있어야 하는 것일까? 범죄나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그것을 서술자는, 그리고 작가는 이빨 빠진 호랑이에 비유한 것일까?

 

그러다가 <구의 집>을 읽으며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94년 생이란다, 작가 성해나는. 우리 세대(85학번이다)조차도 이제 시대의 끝물로 경험한 고문과 취조의 현장을 설계한 건축가 이야기이다. 고문의 생생한 현장을 그린 것도 아닌데 그 현장을 끌려가 본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한 소설. 한 평범한 건축학도가 악마로 변해가는 과정이 얼마나 자연스러운지 나도 모르게 스며든다’. 그러고 보니 다른 작품들도 이렇게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인물들에 스며들고 이야기에 젖어들게 된다. 그가 옳은 자인가 나쁜 놈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소설을 읽다가 문득 관찰자가 되어 주인공을 바라보다가, 그렇게 거리가 가깝다가 멀어졌다 한다. 어느 한 인물에 감정이입이 되거나, 내가 그인 듯 느껴지는 그런 소설은 없다. <혼모노>도 박수 문수가 주인공이고 서술자인 것 같지만 독자인 내가 그 맘 같지는 않았다.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등장인물들, 그렇다고 아주 생뚱맞기만 한 인물도 아닌 그들, 도대체 그들은 왜 그런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하는 걸까? 의아하다가 종내 이해가 된다. 그들이 추구한 진실 혹은 삶의 지향이 비록 일그러졌더라도 거기 있긴 했나 보다, 하고. 가령 <우호적 감정> 같은 소설은 누구나 저마다의 입장을 갖고 해내는 직장 생활 혹은 집단 생활에서 딱히 누구를 나쁘다고 말하기 뭐한 나쁨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서술자처럼 어리둥절하다저 사람 나쁜 사람이었네? 그럼 내가 베푼 호의는 뭐가 되지? 아닌가? 그는 또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어떤 입장이 있는 건가? 세상은 다 그런 건가? 그저 이것은 그저 갈등에 불과한 걸까? 하긴, 우리의 일상은 선과 악의 대결이라기보다 갈등의 연속이니까. 그리고 흔히 우유부단하거나 유연하거나 우호적이거나 다정한 사람들은 거기서 길을 잃고 어리둥절해지니까. 그 단계를 벗어나면 영악해지거나 강해지거나 악해지기도 하지만 또 그렇게 평생 살아가기도 하니까.

 

그리고 그의 소설을 통해 얻은 가장 큰 성과는 젊은 작가들의 소설을 열심히 읽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이제 나는 자아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90년대 자기 과잉의 한국 소설에 대한 약간의 경멸 때문에 떠났던 자리로 돌아가, 내가 모르는 세상을 접하는 또 하나의 대문으로서 젊은 작가들의 소설을 열심히 읽어보기로 결심한다. 나이 든 작가는 왜 아니냐고? 이전에 읽었던 세대를 벗어나 이제는 나의 자녀뻘인 젊은이들은 어떤 세상을 살고 있는지 들여다보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해나처럼 나이가 많지 않아도 그 이전 세상에 대해 작가의 눈으로 짚어낼 수 있는 작가들이 많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각성했기에 늬들이 80년대를 알아?’ 식의 꼰대 마인드를 버리기로 했다. 어차피 한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세상에는 한계가 있다. 그걸 뛰어넘는 것은 더 많은 경험이나 공부/ 독서 혹은 인터넷 검색이 아닌 것 같다. 감각과 통찰, 그리고 진부하지만 상상력, 그것이 없으면 문학은 안 된다. 지성이나 인식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어떤 세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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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지식 - 책의 바다를 항해하는 187편의 지식 오디세이
고명섭 지음 / 사계절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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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책장에는 힐링 코너가 따로 있다. 다시 읽을 필요는 없지만 가끔 뒤적이는 보물들.

 

어린 시절 나에게는 다락방에 올라가 읽곤 하던 힐링 책이 있었다. 제목도 기억나지 않지만 엄청나게 두꺼운 과학만화였다. 우울감과 공황에 시달렸던 열 살 무렵의 나는 정체를 알지 못하게 공허감이 밀려올 때면 다락방에 가서 그 과학만화를 읽었다. 태풍을 귀엽게 의인화하고 천체의 질서에 대해 알려주던 그 만화는 이 넓은 세상, 지구, 우주를 작고 귀엽고 다정하게 만들어 품게 해주었다. 삶의 끝에 죽음이 있다면 도대체 왜 태어나고 살아가야 하는 걸까, 허무한 질문이 내 안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던 열 몇 살 즈음의 나를 치유해 준 것은 책들이었다.

 

<즐거운 지식>은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라 소장용힐링책이 되진 못했지만 다른 책을 읽다가 틈틈이 읽으면서 기운을 얻곤 했다. 딱딱한 인문사회과학 서평집이 무슨 위로가 되냐고? 머리 아프지 않냐고? 일단 고명섭은 아무리 어려운 철학도 어렵지 않게 쓰는 재주가 있는 필자이다. 그리고 나는 이 두꺼운 책을 순서대로 공부하듯 읽지 않고 내가 아는 철학자, 내가 읽은 책, 관심 있는 영역을 그때그때 땡기는 대로골라 읽었다.

 

이 책은 오디세우스를 바로 그런 앎에 대한 모든 것, 열망과 용기를 지닌 사람으로 본다,

세이렌 이야기는 목숨을 걷어갈 만큼 강렬한 유혹, '앎의 유혹'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나는 이것을 저자인 고명섭의 자기고백이라고 보았다. 같은 인생을 사는데 그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책을 읽고, 그것을 바탕으로 또 얼마나 많은 책을 쓰고 있는가. 어쩌면 저자는 빨려드는 독서에 공포를 느끼면서, 거기에 난파하지 않으려 책을 쓰는 일로 몸부림을 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계몽의 변증법> 저자들은 앎과 삶 사이에서 난파당할 위험을 뚫고 '자아'가 등장한다고 말한다. 오디세우스는 그렇게 주체로서 자신을 일으켜 세운 사람(이 유혹을 겪은 주인공은 고통을 통해 성숙한다. 그가 견뎌내야 했던 다양한 죽음의 위기를 통해 자신의 '삶의 통일성', '인격의 동일성'이 확고해진다-계몽의 변증법 중에서)이라고 해석했단다. 오디세우스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삶이 풍요로워지지 않는다면 앎의 욕구는 자기 자신의 존재를 갉아먹는 탐욕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란다. 어린 시절 읽고 지나친 오디세우스 이야기를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니. 스스로 지적 바다에서 호흡곤란을 느낀 사람들의 시선이리라.

 

지젝을 다룬 부분은 흥미로웠다. 붙어 있는 제목이 지젝 - 혁명을 연기하는 배우. 한겨레에 가끔 기고되는 그의 글을 읽을 때마다 내가 느꼈던 바로 그것을 정확히 지적한 느낌이다. 이 사람은 어째서 이렇게 유명한 거지? 그런데 아무리 읽고 이해하려 애써도 뭔가 알맹이를 못 느끼겠는 이 느낌은 뭐지, 싶은...

지젝에 대한 책 <지젝>을 쓴 저자(영국 정신분석학자 이안 파커)가 보기엔 지젝은 세계를 해석하기만 할 뿐 세계를 바꾼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는, 실천적 무기력 증상을 내장한 자의 자기방어일 뿐이라는데 그 해석을 보니 그동안 내가 왜 그런 느낌을 받았었는지 알 것 같았다.

 

그 외에도 나에게 매우 특별했던 가라타니 고진, 랑시에르의 책들, 이름은 들어보았으나 원작을 읽지 못했던 알튀세르나 칸트에 대한 엿봄, 하도 많이 언급되어 읽은 적 없음에도 다 알고 있는 듯한 플라톤, 그 대신 열심히 탐구했던 아리스토텔레스, 말 그대로 문제적 인간들, 특히 철학자들, 철학적 인간들이 책으로 대거 등장한다. 한 편의 글들이 엄청 길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겉핥기라는 느낌이 들지도 않는다. 이 책을 읽고 나서 <계몽의 변증법>을 다음 독서 목표로 삼은 것은 또 하나의 성과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는 앞으로도 계속 고명섭의 책을 읽을 것이다. 이렇게 과제를 던져주는 책은 참으로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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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죽이지 말라고 말해줘! - 스페인·라틴아메리카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후안 룰포 외 지음, 김현균 엮고 옮김 / 창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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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어 공부를 하고 있다. 그저 재미로. 아니, 힐링용으로.

목표가 없는 공부는 느리다. 그래서 좋다. 잘하려 애쓰지 않아도 되니까. 재미있기만 하면 되니까. 물론 단점도 있다. 속도가 안 난다. 2년 가까이 되지만 별로 실력이 좋아지지 않았다.

목표가 없었지만 굳이 왜 공부를 하는가 자문하며, 언젠가 스페인어로 된 동화책 정도를 읽을 수 있게 된다면 그것도 좋겠다 싶어졌다. 첫 페이지를 읽다 말곤 했지만 스페인어 <모모>, <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준 고양이> 그리고 네루다의 시집도 사 놓았다.

 

최근에 꿈과 계엄에 대한 소설을 한 편 썼다. 처음부터 계엄 이야기를 쓸 생각은 없었다. 꿈이 잦은 내가, 꿈의 미스테리를 풀고 싶어 온갖 심리학, 뇌과학 책을 섭렵하던 내가 소설 속에 내 꿈들을 담으려다 문득 라틴 문학의 마술적 사실주의가 떠올랐다. 꿈은 비현실적이지만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니 그야말로 마술적 사실주의적 글쓰기 기법에 딱 적합한 소재 아닌가. 물론 21세기 대한민국 문학계에서 라틴식 마술적 사실주의는 너무나 걸맞지 않은 사조이다. 다만 판타지 문학이 판을 치는, 특히 청소년 소설계에서라면 마술적 사실주의에서 배울 점이 있지 않을까, 생각이 미친다.

 

그렇게 집어 든 라틴문학 단편집이 바로 이 <날 죽이지 말라고 말해줘> 이다. 어쩌다 보니 청소년 소설 외에는 한국 소설을 읽지 않은 세월이 길어진 내가 시대와 공간이 먼 라틴 문학을 읽는다는 괴리감이 있다. 유명 작품 위주로 읽다 보니 아주 가까운 현대 스페인어권 문학은 어떨까 궁금하긴 하다. 그래도 아주 좋은 충격이었다. 전혀 다른 구조와 발상의 향연이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전에 읽었던 보르헤스를 다시 집어든다. 이익과 목표와는 무관한 이런 독서, 진공 상태의 독서의 세계로 나는 서서히 접어들고 있다. 이러면서 늙어가겠지. 아직은 쓸모가 있는 회화, 쓸모가 있는 독서, 생산적인 글쓰기에 대한 욕구가 아주 다 사라진 건 아니지만 또 한 편 이렇게 서서히 가라앉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니, 아닌가? 한 열네 살부터 그런 알 수 없는 시공간/혹은 상태를 꿈꾸었던 것도 같은데?

 

사회적 사실주의 문학을 구현했다고 하는 이그나시오 알데꼬아 <영 산체스> 에서는 교과서에서 배운 1920년대 리얼리즘 문학이 떠오른다. 냄새로 그 현장을 느끼게 하는 솜씨를 보라.

 

오후에는 후텁지근하고 궂은 날씨였다. 들판에서 곡식 향기가 풍겨왔다. 하수도 냄새가 났다. 기관차의 증기 냄새가 났다. 길을 어슬렁거리는 사람들은 약간의 땀 냄새를 풍겼다. 또 식료품 창고처럼 어두침침하고 희게 색칠된 옷장 어딘가에서 무미건조한 석회 냄새를 먹은 옷 냄새가 났다. 나들이옷 차림으로 도시에 올라온 농사꾼 냄새가 났다. ...

 

알레호 까르뻰띠에르의 <씨앗으로 돌아가는 여행>은 한 남자의 죽음을 역순으로 거스르는 기법이 돋보인다. 이 책 속 작품의 공통점은 독특한 기법만이 아니라 섬세한 묘사와 시적인 표현이 감성을 사로잡는다는 것.

 

새들은 깃털의 회오리바람을 일으키고 알로 돌아갔다. 물고기들은 연못 바닥에 비늘의 강설을 남기로 알로 응결되었다. 야자나무는 부채를 접듯 갈라진 잎을 접고 땅속으로 사라졌다. 줄기들은 잎사귀들을 다시 빨아들였고, 대지는 자신에게 속한 모든 것을 회수했다.

 

훌리오 꼬르따사르 <드러누운 밤>은 오토바이 사고로 병원에 누운 주인공이 꿈속에서 스페인 정복 이전 시대의 원주민이 되어 정글에서 도망가는 자신과 뒤섞이는,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결국 병상과 아스테카 제단에서 이중으로 주인공이 죽게 되는 이야기인데 이 역시 문장이 예술이다, 자연스럽게 두 세계가 섞이는데 여기가 어디라, 설명이 없이 자연스럽게 공간이 바뀐다.

 

(병실에서) 손은 물병에 닿지 않았고 그의 손가락들은 다시 캄캄해진 텅 빈 공간을 움켜쥐었다. 통로는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바위가 한없이 계속되는 가운데 돌연 붉은 섬광이 번쩍이곤 했다.... 그는 하늘을 향해 누워서 힘없이 신음소리를 냈다. 천장이 끝나가고 있었고, 어둠의 문처럼 천장이 열리며 놓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종들은 몸을 똑바로 세웠고, 높이 떠 있는 하현달이 그의 얼굴에 떨어졌다. 그는 달을 보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눈을 감았고, 다른 쪽으로 옮겨가 다시 병실을 지키는 탁 트인 하늘을 보고자 눈을 떴다. 눈을 뜰 때마다 달이 뜬 밤이었다. 적들이 돌계단을 통해 그를 올리고 있었는데, 이제 그의 머리는 아래쪽으로 늘어뜨려져 있었다.

 

라틴 아메리카의 정치적 현실을 담는 이야기도 제법 있다. 루이사 발렌수엘라 <검열관>20세기 남미의 흔하디 흔한 독재정권하에 망가지는 나약한 인간성을 담는다. 해설에서는 자신의 피조물에 의해 삼켜진 작가의 개념은 현저히 보르헤스적이다.’라고 표현했다. 보르헤스는 그들 중 거두이기는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들 중 하나이다. 모든 작가들을 그 대표에 아랫단에 놓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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