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한 스승 - 지적 해방에 대한 다섯 가지 교훈, 개정판
자크 랑시에르 지음, 양창렬 옮김 / 궁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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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한 스승

 

손으로 익히는 일이든 글자를 익히는 일이든, 진정한 공부는 본인의 열망에서 비롯될 때 가장 빛을 발한다. <무지한 스승>에 보면 서로의 말을 알지 못하는 프랑스의 교사 자코토와 프랑스어를 알지 못하는 네덜란드의 학생들이 만난다. 학생들은 결국 대역판을 놓고 스스로 프랑스어를 깨우쳐 간다. 이 책을 보면서 <더 리더>를 사전을 놓고 읽어가던 내 모습이 떠오르긴 했지만, 우리 아이들에게 과연 저런 과정이 가능할까, 에는 회의가 들었다. 그들에게는 그렇게 공부를 해야 하는 동기가 없는 것이다.

 

딸 아이 이야기를 하자. 6학년 때부터 날라리 경계선에서 자그마치 4, 5년을 놀기만 하다가 급기야 고2 , 자퇴를 할까까지 고민을 하던 아이가 여름방학부터 공부를 하기 시작한다. 대학을 꼭 가고 싶다고 한다. 아이는 강남 아이들이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쌓아 올린 과정을 따라잡기 위해 맨땅에 헤딩을 했다. 전자사전에서 영어발음을 찾아듣는 과정은 느리고 답답했다. 저렇게 공부를 하다간 재수하기 딱 좋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저것이야말로 진정한 공부라는 생각이 들었다. 목표가 왜곡되었든 어쨌든, 저렇게 머릿속에 넣는 지식들이 아무 쓸모도 없는 것이든 어떻든. 그리고 아이는 자기 몸으로 스스로 깨치고 나온 알껍질의 아픔을 생생히 기억하여, 정말 하고 싶은 공부가 생겼을 때 그렇게 부딪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딸아이가 자랑스럽다.

 

다시 <무지한 스승>으로 가면 이런 구절이 있다.

 

만일 사람들에게 감동을 받고 서로 측은히 여기는 평등한 능력이 없다면, 사람들은 곧 서로에게 낯선 존재가 될 것이다. ...이 역량을 발휘하는 것은 우리가 누리는 모든 쾌락 중 가장 달콤하여 무리의 모든 욕구 중 가장 절박한 것이다.

 

평등한 자들의 공동체에 대한 존중과 이해가 전제되고, 거기서 자기가 진정 원하는 것을 위해 노력하는 자들이 존중받는 세상이 아닌 머리와 글로 하는 공부만을 성공의 열쇠로 삼는 세상에서는 진정한 공부가 가능하지 않다.

 

 

너무나 많이 인용되는 이야기 중에 인디언의 공부방식이라는 게 있다고 한다. 미국 사회에 겨우 편입이 된 체로키 족 아이들이, 시험을 본다 하니 자기들끼리 책상을 붙여 앉더라는 것이다. 그들에게 문제를 해결하라할 때는 항상 함께 힘을 합쳐해왔다는 것이다. 평가의 개념 자체가 다르다.

국어 수행평가는 대개 뭔가를 해내야 하는 것인데 그때 능력보다는 해내는 과정, 과정에서의 성취, 그리고 성실성을 본다. 그러니 수행평가 아닌가? 이미 많은 것을 습득한 아이들은 그 수행평가도 대체로 잘하긴 한다. 그러나 의외의 능력을 발휘하는 아이들이 있어 이 수행평가는 의미가 있다. 독해능력은 떨어지지만 토론을 잘 하는 아이, 토론을 주도하지는 않지만 중재하는 능력이 뛰어난 아이, 지필고사 점수는 낮지만 글은 잘 쓰는 아이, 책자를 디자인하고 만드는 일을 잘하는 아이...

 

그러나 공부 좀 하는 아이들은 모둠활동을 싫어한다. 특히 수행평가를 두레로 하면 많은 손해를 본다고 생각한다. 모둠이 공동 점수를 받으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아이가 누구냐에 따라 점수 편차가 심하다.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폭탄인 아이가 자기 모둠에 들아오지 않게 하려고 애쓰는 경우도 많다. 그 아이들에게 먼저 이 과정 자체가 진정한 공부임을 설득시키는 일에 주력한다. 공동으로 행하는 수행의 과정이 능력 있는 아이들에게 고되게 보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리더십을 고양시키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그들이 진정 이 사회의 리더가 될 만한 아이들이라면 열심히 하지 않으려는 친구, 능력이 부치는 친구를 만나더라도 그들에게 맞는 역할을 해낼 수 있도록 독려할 수 있어야 한다. 사실 진정한 능력은 뭔가를 잘 만들고 발표를 잘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사람들 사이의 이견을 조정하는 능력일 것이다.

 

고속도로 하이패스가 도입되면서 일자리를 잃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반면 독일에서는 일부러 지하철 등에 매표창구를 자동화하지 않는다고 한단다. 일정 수준 인간이 일을 해야 할 자리를 남겨두도록 하는 법안을 마련한단다. 일자리 창출은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가짐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리라. 랑시에르는 평등한 공동체라는 게 과연 가당키나 하냐는 주장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실 우리는 인간이 평등하다는 것을 모른다. 우리는 인간이 어쩌면평등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우리의 의견이다. 그리고 우리처럼 그 의견을 믿는 자들과 함께 우리는 그것을 입증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어쩌면덕분에 인간 사회가 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끊임없이 위와 같은 문제제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식채널의 <공부 못하는 나라> 독일은 공부 좀 못하면 어떤가, 묻는다. 학업성적이 높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잘사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그럼 잘 사는 나라를 왜 만들어야 하는가? 행복하려고? 그래서 대학진학률이 높고 아이들 학업성적이 높은 우리나라는 행복한가? 아니, 잘 살기는 하는가 말이다. 결국은 몇몇 소수의 잘사는 사람들이 더 잘살기 위한 이데올로기에 우리 모두 놀아나는 것이다. 아무도 행복하지 않은 나라. 공부 잘하는 아이도, 중간인 아이도, 못하는 아이도 모두 불행한 나라. 여기서 대입시를 위해 매진하라 가르치는 것이 과연 올바른 교육인지 스스로 물어야 한다. 엄마들이 이건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아이들이 지쳐 쓰러지지 않도록 막아줘야 하고, 적어도 엄마가 스스로 아이가 지치도록 채찍질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거기 있다.

 

사실 좋은 세상이라면 엄마들이 자기 자식들만 잘 갈무리하면 사회의 평화가 유지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이 막 돌아가고 있다면 내 자식만 잘 자라도록 바라는 모성이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 권력이나 힘이란 게 진짜 그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휘둘러지기도 하지만, 스스로를 권력이 없다고 업신여기는 자들이 권력을 지녔다고 믿어지는 자에 대한 두려움과 부러움을 가질 때, 즉 환상 속에서 극대화되기도 한다. 우리 사회는 말하자면 교육과 권력의 상관관계가 그런 환상 속의 두려움으로 극대화되고 있는 사회이다. 여기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끼는 열패감은 경쟁을 더욱 치열하게 만든다. 하지만 가만히 따지고 보면 그 근원에는 가진 자들이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 퍼트린 잘못된 이데올로기가 있고 그 공포에 우리 모두 놀아나고 있었던 것이다.

 

모성은 힘이 세다고 하지만, 자기 자식을 살리기 위해 진정 수퍼맨의 파워를 발산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진 모성이라면 그 힘을, 자기 자식을 채찍질하고 다른 자식들을 밀어내는 데 써서는 안 된다. 우리 머리 위를 뒤덮은 거짓 이데롤로기를 걷어내는 데에 그 모성파워를 써야 할 것이다. 평등의 공동체, 나눔으로써 배우는 세상, 무지해서 부끄러운 게 아니라 지식을 잘못 써먹어서 부끄러운 세상을 인식하는 그런 올바른 배움의 세상으로 나아가는 데에 써야 그것이 진정한 모성애인 것이다.

 

문제는 식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스스로 지능에서 열등하다고 믿는 자들을 일으켜 세우고, 그들을 그들이 빠져 있던 늪에서 빼내는 것이다. 무지의 늪이 아니라 자기 무시의 늪, 이성적 피조물로서의 자기에 대한 즉자적 무시의 늪에서 말이다. 문제는 해방된 인간들과 해방하는 인간들을 만들어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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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미와 늘메 이야기
허수경 지음 / 난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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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이들이 이런 소설을 좋아할까. 허수경의 어린 시절, 1960년대 시골 분위기 물씬한. 소설의 99%가 순우리말로 쓰인. 헤어진 누이가 산을 지키는 영험한 매의 가족과 함께 자라나고 매가 사람이 되었다가 매가 되었다가 하는 이야기. 소설의 서사보다 아름다운 문장들이 시처럼 펼쳐지는 이런 책을 1분도 안 되는 숏폼 영상에 익숙한 우리 아이들이 읽을 수 있을까.

 

요즘 아이들 이야기를 좀 해보련다. 교사들이 글자로 읽는 교재보다 영상으로 수업 구성을 한 지는 꽤 되었다. 화면으로 보고 공부하는 데 익숙해진 어린 학생들을 위한 흐름이다. 최근엔 그 영상조차 너무 길면 집중하지 못하는 걸 발견한다. 2시간 정도의 영화를 보게 된다면 중간에 지루한 장면에서 엎드려 자는 학생이 생길 정도라 이젠 교사들 사이에서 긴 영화를 참고 보는 것도 좋은 학습이 되겠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한 학기 한 권 읽기가 아예 수업 시간에 들어와 있지만 약 세 시간 이상 읽어야 한 권을 읽는 독서수업에서도 이 책 저 책 만지작거리기만 할 뿐 아무리 쉽고 재미난 책을 가져와도 진득하게 앉아 읽어내지 못하는 학생들이 꽤 많다. 그런 시대에 제목 <가로미와 늘메>부터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이런 책, 우리 학생들이 읽을 수 있을까?

이 책을 내게 권한 사서 선생님은 어렵겠지만 꼭 읽히고 싶은 책’, 이라고 말했다. 그 오래된 정서와 말맛을 우리 아이들에게 읽히고 싶어 하는 사서 선생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

 

<레 미제라블>을 고전이라고 읽지만 우리는 영원히 19세기 프랑스의 뒷골목을 이해할 수 없다. 문학은 지금 현재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모르는 시공간을 넘나들며 현재와 잇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청소년 소설이 꼭 21세기 학교와 학원, 거리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만 담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나는 새 학기의 한 권 읽기 책 목록에 이 책을 넣었다, 그리고 아름답게 이 책을 소개하여 읽고 싶게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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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욱의 과학공부 - 철학하는 과학자, 시를 품은 물리학
김상욱 지음 / 동아시아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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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물리학은커녕 그냥 물리학도 아는 바 별로 없는 상태에서 <김상욱의 과학공부>를 읽었는데 물리학은 몰라도 저자가 잘 버무려 들려주는 인문학적 관점의 과학 이야기가 좋았다. 나처럼 중고등학교 수준의 과학지식만으로도 사는 데 별 지장 없는 사람에게는 단지 과학이론이 아니라 철학적이고 미학적이며 성찰적인 과학 이야기가 필요한 것이다. 칼 세이건에게 매료되었던 것은 그가 뛰어난 과학자가 아니라 뛰어난 문필가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에게도 그렇게 이야기를 잘 들려주는, 우주와 인간과 인생과 과학을 잘 이어주는 이야기꾼들이 있다. 최재천, 이은희, 정재승, 그리고 김상욱. 특히 김상욱 교수는 음악과 미술, 문학에 조예가 깊다. 과학 이야기를 하면서 종종 언급하는 예술작품들 덕에 과학은 조금 말랑해지고 더욱 아름다워진다.

 

책 속에서 김상욱은 언어와 통신에서의 잉여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 DNA는 완벽을 위해 스스로 엄청난 잉여를 창출한다. 자연에서 잉여는 그 자체로 필수불가결한 것. 우리가 추구하는 복지사회란 잉여를 누리는 사회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이런 게 성찰이라는 거다. DNA 10% 정도만이 우리가 유전자라고 부르는 유의미한 존재일 뿐 나머지 어마어마한 부분이 잉여적 존재라는 건데 그 부분이 없으면 완벽DNA는 불가능하다지 않나. 객관적 사실을 놓고 우리 사회에 남는 부분이 갖는 존재가치를 성찰하는 자세는 얼마나 중요한가. 경제도 과학도 정치도 다 사람이 잘 살자고 하는 학문인 것을...

 

열역학 제2법칙도 그렇다. 엔트로피는 우주물리학의 운동량을 논하는 개념이지만 극히 유한한 인간이라는 존재론을 생각하게 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김상욱은 그것을 어차피 어질러지는 방구석에 비유하기도 했다. 움직임이 없으면 엔트로피가 작은 것이고 엔트로피가 극대화되어 움직임이 없게 되는 것이 곧 죽음의 상태이다. 그렇게 우리의 목숨은 물리학적 원칙에 따라 생성되고 사라진다.

 

이 서평을 쓰는 지금은 이 책을 읽은 지 꽤 시간이 지난 시점이다(대부분의 독후감을 오래 지나 쓰는 편이다). 지금은 나탈리 앤지어의 <원더풀 사이언스>를 읽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오래 전에 정리해놓은 내용들이 복습을 하듯 익숙하게 읽힌다. 그래, 여러 번 읽은 내용은 아무래도 머리에 남겠지... 유시민 작가 덕에 과학 공부 좀 해보련다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무엇으로 시작할지 고민이 된다면 김상욱의 작은 책들이 좋다. 좀 더 미학적인 <울림과 떨림>도 좋다. 그렇다고 이 책들이 쉽게 읽히는 책이란 뜻은 아니다. 이해가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그런가보다, 하고 읽는 거다. 특히 양자역학 이야기는 그 어느 책을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저자들도 입을 모아 이것은 이해할 영역이 아니라지 않는가. 그런 것들은 넘기면서 김상욱의 책들을 읽고 나중에 좀 두툼한 책을 읽으면 나처럼 반복학습의 효과로 그래도 과학상식 좀 아는 인문학도라는 착각을 느끼는 경지에 도달한다.

요즘 환생이나 평행이론, 회귀, 시간의 반복 등을 다루는 영화나 드라마가 인기를 끈다. 이런 과학책을 읽다가 보면 드넓은 우주의 무수히 많은 태양계나 블랙홀, 특수상대성 이론 따위들이 우리를 블랙홀 너머의 세계나 평행우주로 데려갈 수도 있을 것만 같다. 작가들도 그런 상상을 하나 보다. 다만 김상욱은 말한다, 상대성이론은 시간이 관측자에 따라 다른 속도로 진행한다고 주장하지만 속도만 다를 뿐 진행 방향은 정해져 있다는 게 중요하다. 시간은 절대 되짚어 돌아갈 수 없다고. 그래서 어쨌거나 우리는 현재에 충실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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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수업 - 천재들의 빛나는 사유와 감각을 만나는 인문학자의 강의실
오종우 지음 / 어크로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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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에 우리 학교 선생님을 대상으로 하는 연수의 주제로 수업 개선과 관련한 책을 읽고 토론을 한 적이 있다. 그때 어떤 선생님이 이 책을 선택했다. 흥미로웠지만 다른 책을 읽느라 제쳐두었던 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가 생겼다. 한 젊은 동료 교사가 자율 휴직을 신청해서 올해 학교에 안 나온단다. 손에 꼽을 만큼 의미있는 수업을 하는 선생님이다. 나는 얼마 남지 않은 정년퇴직까지의 시간 중 그와 함께 일할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음에 대해 아쉽다고 말했다. 그처럼 똑똑하고 성실한 교사들이 학교 현장에 환멸을 느끼고 대학으로 갈 생각을 하는 경우를 많이 보아서 불안하기도 하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것은 경제학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어느 삶의 현장에서나 비슷한 일들이 있겠지만 특히 학교는 유능한 교사를 품기엔 그릇이 너무 작다. 물론 그에에 이런 걱정을 비칠 수는 없다. 그저, 당신같이 괜찮은 교사가 현장을 꼭 지켜주길 바란다는 속절없는 바람을 전할 수밖에. 속절 없는 이유는 내가 선배교사로서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설사 교장이나 교감이었더라도 딱히 할 일이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휴직을 떠나기 전에 뭐라도 줄 게 없을까 생각했다. 무슨 선물처럼 말고 그냥 무심하게. 그래서 보던 책 중 그의 수업과 연관이 있는 것들 몇 권을 고른다. 그가 신임교사였을 때 배움의 도><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프레이리 교육론> 등의 책을 주었던 기억은 난다. 이번에는 토론에 관한 책과 이 <예술 수업>을 주면 어떨까 싶다. 좋은 수업의 영감을 줄 수 있는 책일 것 같아 보여 후딱 읽어보고 주려 했다.

나의 감은 틀렸다. ‘후딱 읽어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오판이었다. 생각할 것도 메모할 것도 많았고 무엇보다 즐거운 마음으로 천천히 읽고 싶은 책이었다. 정말 좋은 책이 홀대받고 있었구나, 싶었다.

 

이 책이 성균관대 교양 수업을 책으로 옮긴 것이란 걸 확인하고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그 대학생들이 부럽다는 생각도 들었고 오종우 선생의 수업을 직접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만약 이 책이 수업 현장을 그대로 옮긴 것이라면, 수업을 위해 그가 준비한 자료가 얼마나 많을지 상상하며 그 노고에 감탄했다. 게다가 그것을 글로(혹은 말로) 표현할 때 그 표현력과 그 안에 담긴 성찰들에 경의를 표하고 싶었다.

책도 참 좋지만 책 속 장면을 대학 강단에서 벌어지는 수업이라고 상상해 보니 학생들에게 얼마나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주었을까 싶어 찬탄이 절로 나온다. 이런 수업을 들은 학생들은 참 행복했을 것이다. 어떤 학생들은 교수님에 언급한 책과 영화, 음악, 그리고 그림들을 검색하고 도서관에 가서 찾아 보고, 읽어 보고 들어 보려 애썼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뇌와 가슴의 변화는 얼마나 신선했을까.

 

다만 저자가 예로 드는 것 중 특히 문학작품들은 그야말로 우리가 어렸을 때 읽었던 것들인데 요즘 학생들은 톨스토이나 체홉, 도스토옙스키(그러고 보니 오종우 선생도 러시아 문학을 좋아하는가 보다)를 즐겨 읽지 않는다. 그들의 문해력과 지력은 활자나 책을 읽는 것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오종우 선생이 예로 드는 텍스트들, 요즘 젊은 대학생들이 얼마나 고개를 끄덕일지 걱정이 된다. 수업을 듣고 나서라도 그 책을 찾아 읽고 싶어질까. 막상 손에 들면 재미있게 읽겠지만 안톤 체홉을 읽고 타르코프스키 영화를 찾아 볼 대학생이 몇이나 되려나.

그렇다고 해서 요즘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대로 영상 콘덴츠만을 텍스트로 하여 수업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 학교에도 대여라고는 하지만 모든 중2, 1 학생들에게 태블릿을 안겨주고 그것으로 미디어 수업을 해왔지만 실익보다는 부작용이 많아 보인다. 수업 중 억지로 종이책으로 된 읽기 자료를 읽도록 구성을 한다. 모니터로 글을 읽는 것과 긴 시간 책 한 권을 읽어내는 것은 매우 다르다. 일부러라도, 학교에서라도 그렇게 해야 할 판인데 칼라 사진과 영상이 가득한 전자매체를 활용해 수업을 하란다. 이 학생들이 학교에서 그것을 운용하는 방식을 배우지 않아 미래사회에 도태될 일은 없다. 이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자기 머리와 자기 가슴으로 습득하고 생각하고 느끼는 일이다. 그래서 오종우 선생의 고전적인 텍스트들이 쓸쓸하게 느껴졌다. 학생들의 감각에 맞춰서도 안 되지만 이제는 사라져갈 자료들로 수업을 할 수도 없는 모순 앞에서. 그래, 세월이 가면 어떤 것은 버려지고 극소수의 것들만 살아남겠지. 늙어가는 이들은 모여서 어렸을 때 읽은 책 이야기나 음악 이야기를 할지 몰라도 젊은이들에게 그걸 강요할 수는 없겠지. 이 좋은 책을 덮으며 그런 씁쓸한 생각을 해본다. 물론, 휴직하는 그 40대 초반의 교사는 돌아와서 고전이로되 결코 낡지 않은, 선별된 좋은 자료들로 학생들에게 생각하는 수업 토론하는 수업을 펼쳐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 의미 있는 고민을 하는 선생들이 있기만 하다면 우리는 이제 마음 놓고 교단을 떠나도 될 것이다.

 

철저하게 남들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이 되는 것처럼 안타까울 때도 없다... 용모는 뛰어나되 표정은 풍부하지 못하다. 그럴듯한 교육을 받았는데도 그것을 써먹을 줄 모른다. 지성은 있되 본인의 사상은 없다. 가슴은 있되 관용이 없다... - 도스토옙스키 <백치> (책 속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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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준의 경제학 레시피 - 마늘에서 초콜릿까지 18가지 재료로 요리한 경제 이야기
장하준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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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발상이다, 경제학과 요리 이야기를 연결하다니. 위트 있는 필체도 좋은데 영어로 쓴 책이라니! 아마도 미식가일 것이 분명한 장하준 선생이 대중이 쉽게 읽을 수 있는 경제학 이야기를 쓴 것이다.

그는 신고전학파 (자본주의) 경제학을 비판하는 자본주의자, ‘보호무역이라 폄하하지 말고 국가가 적극적으로 정책적으로 무역과 경제에 개입해 약(한 나라)자를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경제학자이다. 이 책은 그런 관점을 요리 이야기와 다양한 사례, 그리고 비유로 쉽게 들려준다. 이 책의 미덕 중 하나는 흔한 경제학자들의 경제학 이론을 연대기적으로 늘어놓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이 책을 다 읽고 경제학 공부가 더 필요하다고 갈증을 느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유시민의 <경제학 카페>를 권한다. 경제학 흐름이 궁금하다면 <지대넓얕>류의 재미난 책도 많다. 물론 나처럼 머릿속에 기억으로 남는 지식을 취하는 독서에 약한 사람들이라면 역시 이 책 <경제학 레시피>가 딱 좋을 것이다. 양 많고 칼로리 높고 호불호 갈리는 유럽의 식당보다 이것저것 조금씩 먹어보며 맥주 한잔하는 스페인식 타파스 문화가 더 마음에 드는 입 짧은 미식가라면 더더욱.

 

경제학을 잘 몰라서 이런 의문이 드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경제학은 공부하면 할수록 자본주의 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는 어떤 것일까? 주변에서 자본주의 경제학 말고 다른 것을 지향하는 경제학자들을 본 적이 없으니 이런 생각이 드는 건지도 모른다. 장하준도 이 자본주의 시스템에 반기를 들지 않는다. 그러나 약자와 빈자를 위해 공생할 수 있는 시스템이 얼마든지 자본주의하에서도 가능하다고 역설한다.

 

그는 정책의 중요성을 자주 이야기한다. 인정. 문화를 바꾸는 것이 사회를 바꾸는 원동력이 되기에는 한계가 있다. 혹은 느리다. 역사의 흐름은 보통 정치적 변화에서 온다. 그는 전쟁 같은 혁명과 개혁이 불가할 때 정치적인 정책 변화로 얼마든지 세상이 좋아질 수 있다고 믿는 사람 같다. 물론 의문이 안 드는 건 아니다. 대개는 부자였던, 나중에 권력을 잡아 부자가 된 이들이 약자를 위한 정책을 입안하고 시행할 수 있으려면 어떤 동력이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그것은 정치의 영역이라서 이 책에서 언급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경제적 변혁은 정치 변혁이 선행되어야 가능한 것이 아닐까. 물론 정치적 변화의 동력은 대개 경제적인 문제에서 비롯되지만 말이다.

 

장하준은 신고전학파 경제학이 세계를 주름잡으면서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행동이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강자와 약자가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에서 시장에 맡기자고 주장하는 것은 무책임하다는 것이다. 국가가 적절히 개입해 정책으로써 거대자본과 강자에 맞설 수 있기를 저자는 바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경제학은 삶에 엄청나게 크고도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 세금 복지 지출, 이자율, 노동시장규제 등의 정부 정책, 일자리, 노동 환경, 임금, 주담대와 학자금 대출 상환금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심지어 그는 당대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는 경제학 이론은 동시대인들이 무엇을 가장 중요한 인간의 본질로 생각하는지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한다. 정치와 경제는 당연히 당대 사람들의 가치관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 아니, 적어도 대한민국만 보면 경제학 이론은 몰라도 주류를 점하고 있는 경제학적 가치관이 사람들의 가치관의 중심이 되는 것만은 맞는 것 같다. 돈은 언제나 중요했지만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의 가치는 더 이상 부정의가 아니지만 지금처럼 능력껏 벌어서 잘먹고 잘 사는 사람에게 찬사를 보내는 시대도 없었다.

 

다만 장하준이 신고전경제학파를 반대하면서 국가의 적절한 정책적 개입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결코 강자의 입장을 대변해서 그리 말하는 게 아니다. 미국은 레이건 이후 신자유주의를 표방하면서 국가의 적극적 개입을 주장하고 있다. 장하준이 말하는 국가의 개입은 약자를 보호하고 중소국들이 강대국으로부터 경제적으로 침탈당하지 않을 수 있는 장치를 말하는 것이다.

 

자유시장주의자였던 밀턴 프리드먼(윤석열 대통령이 대선 때 언급했던 경제학자)은 칠레 피노체트 독재정권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단다. 그러니 경제적 주장이 독재자의 정치에 맞닿아 있는 것은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프리드먼이 완벽한 자유 무역이 행해진 75이라고 묘사한 기간은 엄밀히 말하면 강대국의 자유무역을 말하는 것이다. 자유시장 옹호론자들이 말하는 자유는 경제 영역의 자유로, 기업이 높은 이윤을 낼 수 있는 자유를 말한다. 그런 자유 개념을 가져와 마치 보편적인 자유인 듯 외치면 안 된다. 프리드먼과 윤석열이 말하는 자유와 프랑스 혁명의 기치였던 자유 사이의 간극은 얼마나 큰가. 물론 사람들은 이미 대선을 치르기 전 프리드먼을 언급한 후보에게서 그런 낌새를 맡았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경제를 모른다고 책 한 권만 읽을 사람이 가장 위험하다고 폄하하였지만 대통령이 된 이후 일관되게 자신의 경제학적 가치관을 정치와 정책에 반영하고 있음을 주시해 봐야 한다. 그걸 사람들이 이미 간파했다 해서 막을 수 있었을까 싶긴 하지만.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한 것은 역사적 정치적 테크놀로지적 문제 때문이고 그는 그들이 개선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라는 말, 공감한다. 이제는 누구도 이 명제를 부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 것인가. 이에 대해 장하준은 적극적인 개입과 자국 보호 경제 정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고 그 예로 우리나라 현대차를 든다. 현대그룹은 다른 부문에서 만든 돈을 현대자동차에 쏟아부어 초기에 적자만 내던 회사를 지탱하게 했다. 또한 수십 년 동안 한국 소비자들은 품질 떨어지는 국산 차를 견뎌야 했지만 이런 식으로 보호받지 못했으면 한국의 자동차 제조업체들은 살아남기 힘들었을 것이라 말한다. 정부도 손을 보탰다. 1990년 초까지 한국 정부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현대차 등 하이테크 기업들, 특히 수출 지향적 기업들이 특별 저리를 융자받을 수 있게 보장해 주었다. 현대차를 살리느라 국민들은 손해를 봤다고 아우성이지만 국가 경제가 국민 경제에 직결됨을 생각하면 의미가 없다 말할 수 없다면서.

독일의 예도 든다. ‘철과 호밀의 결혼이라 부르는 비스마르크 주도로 기존 부자들(융커)과 신흥 중공업 자본가들 사이에 맺은 정치적 동맹(호밀 생산자들과 철 생산자들 사이의 연합) 말이다. 이 덕분에 독일은 경제가 성장하여 당시 1위였던 영국을 따라잡았단다.

 

보호무역이 필요하다, 정부가 저극적으로 정책개입을 해야 한다는 말이 누구의 입에서 나오는가가 중요하다. 미국이 주장하고 이명박이 표방했던 신자유주의도 그런 주장을 했으니까. 강자가 말하면 우리 마음대로 할 테다, 이고 약자의 입장에서 주장하면 우리에게 우리 스스로를 보호할 권리를 달라, 라는 주장이 되는 것이다. 장하준은 후자의 입장이고.

 

심지어 장하준은 부자나라에서도 혼합경제 시대보다 1980년 이후 신자유주의 기간 성장률이 더 둔화하고 불평등이 심화되었으며 금융위기도 더 자주 발생했다고 말한다. 물론 개발도상국들에 운용된 신자유주의 정책은 재앙에 가까웠고. 결국 부자나라에도 별 도움 안 되고 가난한 나라들에게는 피해만 입힌 정책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한민국 경제 정책에 큰 힘을 발휘하는 이들은 주로 이 부류의 학자와 관료들이다. 덜 보수적인 정당이 정권을 잡으면 그나마 나은데 보수정권이 들어서면 영락없이 미국의 입장에 선 경제 정책들이 나온다. 아무리 그런 정책이 자신들 개인의 영달과 가치관(대부분 미국에서 공부한 경제학자들이 주류이므로)에서 나온다지만 이렇게 자신의 정체성에 반하는 정책을 펴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다.

 

복지에 대한 장하준의 생각을 살펴보자.

복지국가는 자본주의에서 불가피한 개인의 불안을 해결해 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고 잘 설계된 복지국가는 새로운 기술과 노동 관행에 대한 사람들의 저항을 줄여서 자본주의 경제를 더 역동적으로 만들어 준다고 장하준은 주장한다.

그런 역설은 비스마르크의 예에서 알 수 있다(나는 이번에 처음 알았다!). 비스마르크는 복지 국가를 처음으로 발명한 사람이란다. 노동자를 산업재해로부터 보호하는 세계 최초의 공공보험 제도를 도입했다. 그 이유는 노동자들이 사회주의로 경도되어 사회주의가 확산하지 않도록 하려고 그랬다는 것. 2차 대전 이후 유럽에서는 중도우파 성향의 정당들마저 복지 국가의 필요성을 많이 받아들인 이유가 정치 안정을 위해서라니 우리나라 보수정권들도 귀 기울일 필요가 있지 않은가. 복지는 결코 좌파의 전유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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