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어 슬로베니아 - 사랑의 나라에서 보낸 한때
김이듬 지음 / 로고폴리스 / 201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김수우의 <쿠바, 춤추는 악어>를 읽으면서도 느꼈던 것이지만 김이듬으로 인해 새삼 확인하게 된 것, 시인과 여행기는 참 잘 어울린다. 여행이란 게 다 낭만적이지만은 않겠지만, 시라는 게 다 낭만적이지만은 않겠지만 여행이 가져야 할 많은 속성 중에 가장 정점에는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 싶은시심(詩心)이 있을 것이고 시가 가진 가장 진솔한 속성에는 여기가 아닌 다른 어딘가에 대한꿈이 있을 터이다. 물론 어떤 이는 정보가 가득한 여행기를 선호할 것이고 또 어떤 이는 의미를 찾아 나서는 여행기를 좋아하기도 할 테니 이건 어디까지나 나의 선호와 취향일 수도 있다.

 

돌아보니 최근 나는 연이어 유럽여행기를 읽고 있다. 한꺼번에 6,7권의 영역이 다른 책을 동시진행으로 읽는 독서습관을 가지고 있는데 그 책 중에는 꼭 힐링용책들이 들어있다. 즐기려고 읽는 책들. 때로는 <모지스 할머니><따뜻하고 사랑스럽고 그래><개를 그리다> 같은 그림이나 사진책, <엄마에게> 같은 그림책, 때로는 <무민 손뜨개>같은 자수나 뜨개질 책, <2천만원으로 시골집 한 채 샀습니다> 같은 집 이야기책, 때로는 <나미야 잡화점> 같은 소설 혹은 여행기 같은 것들이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최근 나는 <유럽의 아날로그 책공간><당신에게 파리><사람 풍경> 같은 유럽 여행기들을 연이어 읽고 있다. 평소에는 움직임의 에너지가 많지 않아서 집에 혼자 있는 걸 제일 좋아하는 사람인데도 멀리 가는 여행을 좋아하고 꿈꾸는 이유가 무엇일까? 물론 유럽만 좋아하는 건 아니겠지만 먼먼 세상을 꿈꾸는 건 맞는 것 같다. 죽기 전에 한 번쯤, 김이듬처럼 한 달 이상 혼자 여행가는 일을 꿈꿔본다. 김이듬은 장 그르니에를 인용해서 혼자 여행의 매력을 말한다.

 

장 그르니에 <> 나는 혼자서,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것을 수없이 꿈꾸어 보았다. 그러면 나는 겸허하게, 아니 남루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되면 나는 비밀을 간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주 오래 전에 키에슬로브스키 감독의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을 본 적이 있다. 그 영화 속 폴란드는 공산주의 국가 시절의 동유럽이다. 지금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으리라. 덜 어둡고 더 자본주의화 되었겠지. ‘비까번쩍하지는 않지만 서유럽의 분위기도 남아있으리라. 그러면서도 덜 세속화된 아름다움과 동쪽 나라 특유의 조금은 음산한 분위기가 있겠지. 이게 내가 상상하는 동유럽이다. 내 리스트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나라들이다. 내 상상이 맞는지 곧 확인해 보고 싶다.

 

이 책에서 가장 부러웠던 장면은 슬로베니아의 대표 시인 프란체 프레셰렌(19세기 초)의 사망일 28일을 문화기념일로 삼아 아예 국경일로 정해놓고 전 국민이 일터를 벗어나 시를 읽을 수 있도록 온종일 나라 전역에서 시낭송회, 콘서트, 연극 공연 등이 열린다는 내용이었다. 천민자본주의와 상업주의가 고상하고 고결하고좋은 것인 줄 아는 대한민국에서는 언제쯤 돈 냄새가 나지 않는 진정으로 고상한 시와 문화의 가치를 누릴 수 있을까.

 

류블랴나는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의 무대이기도 하단다. 그 책을 읽을 때야 그런 나라가 있는 줄도 잘 몰랐던 것 같다. 베로니카가 내려다보고 상념에 잠겼던 도시를 나도 내려다 보고 싶다.

그리고 트로모스토비에 다리로부터 15분 걸으면 국립도서관(류블랴나 대학 도서관)이 있단다. 쿠바 여행할 때 벤쿠버를 스쳐 지나가면서 원형극장을 흉내 낸 건물을 하나 본 적이 있다. 우리보다 한 달 뒤 3개월 어학연수로 벤쿠버에 가서 생활하게 된 아들 말에 따르면 그 원형극장은 공공도서관이란다. 아들은 랭귀지 스쿨 수업이 끝나면 그 도서관에 가서 저녁 무렵까지 공부를 하다가 어스름 어디쯤에서 햄버거 하나를 사 먹고 공원에 가서 산책을 좀 하다가 숙소로 돌아오곤 했단다.

아들이 보내준 사진 속의 도서관, 그리고 그런 녀석의 시간표는 나의 로망이었다. 도서관에서 실컷 공부하고 돌아오는 삶이 부럽다. 벤쿠버처럼 공기 좋고 아름다운 곳에서라면 더욱 좋겠지. 물론 잠시 머무는 삶이라서 부러운 것일 터. 그곳이 생계의 터전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는 것을 왜 모르겠는가. 세상은 여행자에게나 아련하고 아름다운 법이다. 일상은 붙박이의 안정과 따스함을 줄지언정 아름답지는 않으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부표처럼 들떠 있는 잠시의 경험이어도 좋으니 한 두세 달, 도서관과 서점, 포근한 저녁거리를 배회하는 고독하고 편안한 삶을 살아보고 싶다. 지난 여름방학 딱 하루, 아니 딱 한나절, 동네 가까운 개포도서관에 가서 공부하도 온 적이 있다. 에어컨도 안 틀어주는 낡아빠진 도서관에서의 한나절이 어찌나 달콤하든지. 대학을 졸업한 이후 처음 가 본 도서관에서의 한나절이 이토록 사치스럽게 여겨질 정도로 나는 바쁘게 살고 있는가 싶다. 올 겨울방학에는 자주 갈 거다. 지겨울 때까지 도서관에서, 숨막힐 때까지 서점에서 놀다 올 거다.

 

여행기에서 남겨준 정보가 언제 유용할지 알지도 못하면서 기록은 남긴다. 류블랴냐 시에서 3번 버스 타고 티볼리 공원에 가보라는 정보, 27번 버스 타면 복합상가 건물로 갈 수 있다는 정보는 언제 써먹을 수 있을지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김이듬이 소개한 스테파오누스키의 <루마니아 랩소디 1>과 스레치코 코소벨의 시로 만든 노래라는 <비브라토 티시네(침묵의 비브라토)>는 지금이라도 찾아 들어보련다.

 

김이듬은 류블랴냐 성에 갔을 때의 경험을 적막한 고성 벽에 기대어 태고의 새가 자신의 내면에서 푸드득거리는 소리에 귀 기울이는 시간은 더없이 향기롭다.’라고 전한다. 누가 시인 아니랄까봐서... 나도 돌담의 습기와 거기 서린 남의 역사의 신비를 조금은 맡아볼 수 있을까? 내가 그곳을 여행한 날은 비가 온 다음 날이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