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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시절
공선옥 지음 / 창비 / 2011년 4월
평점 :
내가 의미있고 진지한 소설을 좋아한다고 해서 문체나 대중성 같은 것은 안 본다는 뜻이 아니다. 이 소설, 첫 장면부터 재미있었다. 처음부터 주인공이 죽고, 저승에서 이승을 보며 자기 살았던 이야기를 하나 보다, 그렇게 생각했다. 시골 상갓집 같은 이런 분위기의 글을 좋아한다. 몽환적인 순간이다. 누군가는 죽고, 죽음을 애도하며 사람들이 밤을 새는 동안 혼은 지붕 위 같은 데서 사람들의 불빛을 바라보면서 서로들 가슴에 담았던 이야기를 나누는 그 신비감. 물론 그게 이 이야기의 핵심은 아니다. 처음을 보면서 아리고 아름다운 이야기려니, 했던 내가 잘못 짚었다.
이것은 투쟁에 관한 이야기이다. 달콤할 리 없는 이야기다. 실제로 공선옥은 지금도 싸움의 현장에 자주 얼굴을 보인다고 한다. 서재에 앉아서 신문을 뒤적이며 진보의 앞길에 선듯 발언을 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란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의식이나 실천이 소설을 무겁고 딱딱하게 만드냐, 또 그건 아니다. 소위 '의식있는' 시와 소설들이 그 얼마나 비장하고 무겁고 아린 목소리였던가 생각하면 공선옥의 이 소설은 따뜻하고 귀엽고 천진하다. 시골 할머니들은 가장 유하여 가장 강한 이들, '암것도 몰'르기 때문에 세상에 가장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온갖 부당을 온 몸으로 수십 년을 겪고 살아왔으나 그 모든 것을 다 품을 수 있는 이들이다.
소설은 쇄석기 공장에 맞서는 주민들의 싸움을 그리고 있지만 중간중간에 그 싸움의 가장 중심에 선 할머니들이 젊은 날부터 어떻게 남편들 즉 가부장의 권위와 싸워왔는지도 그린다. 가장 가깝게는 남편들로부터, 그리고 가장 삶에 무관할 수 있던 어떤 '공장'으로부터도 아무 취급도 받지 않으면서 물처럼 싸우는 저들, 고단한 싸움의 과정에서도 처절하기보다 '씨물떡', 천연덕스러운 싸움으로 가장 쿨한 저 할머니들, 끝내 목숨을 놓아도 그 데모하던 시절을 인생의 가장 '꽃 같은 시절'로 여길 만큼 자기 목소리 한 번 가져보지 못했던, 그 할머니들이야말로 진짜 힘 센 투사들이다.
다만, 진정한 아름다움이지만 기왕이면 진짜로 진짜로 힘을 가졌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약하기에 아름다울지는 모르지만... 그리고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자꾸 김진숙이 떠오른다. 그의 의지가 빛나는 눈빛과 강인한 목소리는 자칫 그를 강한 투사로 보이게 하지만 사실 그는 거대한 자본과 이념에 맞선 한 인간일 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가슴이 턱 막히지만, 군주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 세상을 바꾸는 가장 무서운 힘이 '여러 사람의 목소리'라는 삼국유사에도 나오고 시경에도 나오는 그 이야기를 믿을 뿐이다. 믿어 보자. 다만, 그 믿음은 분명 실현될 것이로되, 그 이전까지 너무 많은 사람이 아파야 하고 죽어야 한다는 것이 슬플 뿐이다. 결국 너희, 우리의 목소리를 이기지 못하리란 것을, 두려움을 갖고 알아야 한다. 조금이라도 현명하면 미리 깨달아야만 너희도 망하지 않으리란 것을 알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