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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모리스 평전 - 개정판
박홍규 지음 / 개마고원 / 2007년 4월
평점 :
절판
이 뛰어난 아름다움이 아주아주 진보적인 부자의 손에서 이 아름다운 디자인이 나왔다는 것에 대해, 놀라면서 감사하다.
예술의 전당을 좋아한다. 잘못된 건축이라고 욕도 많이 먹지만 어쨌든 내가 좋아하는 공간 중 하나이다. 지나가면서 그곳의 조명을 보는 것도 행복하다. 사회주의 세상에서라면 저런 돈 많이 드는 공간의 존립이 가능할까 하는 단순한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기업이나 자본가가 아니어도 국가든 조직이든 공동체든 비싸고 아름다운 건축물을 구축할 수도 있으리란 생각을 못했나보다. 부가 있어야 고급스런 미학이 존재 가능하다는 생각을 어느 새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윌리엄 모리스는 그런 세상을 꿈꾸었을 것이다. 가난한 사람 부자인 사람 모두 자연과 생이 주는 아름다움에서 소외되지 않는 그런 세상 말이다. 특히나 가난한 사람들도 깊은 아름다움을 즐기고 누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 사람이 바로 모리스이다.
솔직히 처음 그의 벽지 도안을 보았을 땐 굉장히 돈 많은 (부르주와적인) 자들의 취향이 반영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리스를 근대 디자인의 진보적인 아버지로 높이 칭찬하는 것을 보면서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렇게 만나게 된 평전, 초기에는 그저 낭만적인 사회주의자쯤이라고 생각했다. 이 모든 오해는 그의 디자인이 갖고 있는 자본주의적이고 낭만적인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의외로 그는 매우 치밀한 논리를 갖고 조직적으로 사회주의 운동을 해온 활동가였다. 사회주의 미학은 상업적이지 않은 대신 어딘가 조악하다는 오해를 불식시키고도 남을 만큼 그는 안으로도 충실한 사회주의자이자 외면적으로도 부족함 없는 디자이너였다.
헬렌 켈러, 아인슈타인, 찰리 채플린, 밥 딜런이 그러했듯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그들의 정치적 행보와 이념성은 쏙 빼고 재능만 성취적 관점에서 부풀려진 윌리엄 모리스에 대해 아직도 사람들은 바로크 풍의 부르주아 취향의 디자이너로 오인하고 있다. 제대로 알리기만 하여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영적인 안쪽이 어떻게 재능과 맞물리는지, 본인들은 생전에 그다지 염두하지 않았을 세속적 성취로 함부로 평가하고 점수 매기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