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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전
김규항 지음 / 돌베개 / 2009년 4월
평점 :
나에게는 종교가 없다
현재의 나는 무신론자이다. 아니 사실은 신앙을 갖고 싶으나 '신앙심이 생기지 않아서' 종교를 갖지 못한 사람이라고 말해야 맞다. 이런 나에게도 신앙의 역사가 있다. 물론 내게 이 책을 빌려준 동료나, 기꺼이 빌려달라 했던 나나 예수를 어떤 종교적 대상으로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우리는 사회과학적 의미의 예수를 언급했음을 확신하면서(왜냐하면, 저자가 김규항이니까) 읽었던 것이다. 시작도, 읽는 과정에서 만난 예수의 모습도 기독교적 의미와는 다소 거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약간 추억과 감상에 젖어서, 약간의 결기와 더불어 복잡미묘하게 예수를 생각해야 했다. 다른 이에게도 그렇겠지만 내 안에는 많은 예수가 있다.
새벽기도를 다니던 6학년 아이
초등학교 6학년때, 나는 자발적으로 교회를 찾았다. 미아동 재래시장 뒷골목에서 주운 전단지에는 길잃은 어린 양 하나를 찾는 예수의 그림이 그려 있었다. 나는 그 전단지를 읽고 정말 머리에 번개를 맞은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시장 안 허름한 건물 2층에 있는 '교회'를 찾아갔다. 목사도 없이 우리는 늘 검은 뿔테안경을 쓴 젊은 전도사 아저씨와 함께 기도를 했던 것으로 보아 소위 시장사람들과 함께 한 개척교회였나보다. 겨울방학에 불교신자인 엄마 몰래 새벽 5시에 손바닥만한 성경책(전도용으로 길거리에서 아이들에게 나누어 준 것이다.)를 영어회화 카셋트 박스에 숨겨 새벽기도를 나갔고 불도 안 땐 냉골의 방에서 엄마 몰래 고린도 전서 13장을 몽땅 외웠다. 나는 진심으로 뜨겁게 '하나님'을 믿었다.
그 믿음이 끝이 난 것은 호기심 많은 내가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은 모두 지옥에 간다고 말하는 전도사에게,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온 게 100년 정도밖에 안 됐다는데 그 전에 살았던 조선시대, 고려시대 사람들은 모두 지옥에 간 거냐, 시골에 살고 있는 우리 할머니는 기독교가 뭔지 접할 기회조차 없었는데 아무 죄도 없이 지옥에 가야 하는 거냐, 물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 누구라도 여기에 답해주시면 감사하겠다. 진짜 궁금하므로.) 그 전도사는 '그렇다, 하지만 네가 열심히 기도를 하면 너의 할머니도 우리 조상들도 구원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전도사는 대학을 갓 졸업하고 온 젊은 청년이었던 것 같다. 어린 청년이 대답할 수 있는 최선의 답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 후 교회를 그만 나갔다. 하느님이 진정 사랑의 하느님이라면,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하느님을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을 그렇게 가혹하게 내치진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이것이 기독교 원리 근본의 어떤 문제인지 한국교회의 논리 부재에서 비롯된 문제인지 그 전도사 개인의 미숙함인지를 아직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요즘도 가끔 독실한 기독교인들과 이 문제를 이야기하다가도 여전히 답답함이 풀리지 않기 때문이다.
연습장 한 권을 가득 채운 성경 구절들
나의 사랑하는 제자 중에 음악과 신앙으로 열심히 사는 아이가 있다. 정말 맑은 감수성을 가진 그 는 나를 찾아올 때마다 허공에 불고 놀 수 있는 비누방울도 만들어 오고 자기가 쓰던 색깔이 예쁜 볼펜도 가져오고 아르바이트 하던 목공소에서 얻은 자투리 나무로 작은 나무상자를 만들어 오기도 하는 아이이다. 스승의 날에는 주소가 적힌 쪽지 한 장만 들고 일부러 생전 처음 와보는 우리집 동네까지 버스 타고 지하철 타고 찾아와 우리집 우편함에 장문의 편지를 넣어두고 가곤 하던 아이였다.
그 아이가 어느 날은 파란 연습장 한 권을 놓고 갔다. 나는 또, 필기감이 좋은, 줄없는 연습장 한 권을 발견하고 나눠쓰자고 두고 간 줄 알았다. 나도 그런 공책을 참 좋아하고 그녀석이 그것을 알고 있을 법 하기에 그럴 듯한 선물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는 글씨가 써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연습장 한 권 가득. 그 아이가 좋아하는 성경 귀절을 일일히 손으로 베껴 적은 것이다. 두레일기와 여러 통의 편지를 통해 익숙하게 보아온 녀석의 약간 날리는 듯한 손글씨가 가득했다. 로마서, 잠언, 그리고 주로 마태 복음이다. 중간에 쓰다가 지운 흔적, 힘들어서 글씨가 점점 늘어지는 곳도 있다. 편지에는, 온전히 선생님만을 위해 쓴 것이라고, 저는 여기 있는 말씀을 모두 믿는다고, 선생님이 함께 믿으시면 참 좋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적혀있다.
고뇌하던 청년 예수
사춘기의 나는 뮤지컬 '수퍼스타 지저스 크라이스트'를 만나면서 다시 흔들렸다. 사실은 현대 기독교에 대한 조롱을 잔뜩 담고 있었던 그 뮤지컬은 예수가 주인공이 아니라 유다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이라 했다. 유다의 운명에 대해 나약한 우리 인간들이 입을 모아 '하나님 왜 그러셨어요. 유다가 너무 불쌍해요.'라고 항변하는 의미였고, 유다는 악인이라기보다 영원한 저주에 갇혀서 스스로 자기 운명에 대해 조롱하면서도 한편 의연하기도 한(요즘 말로 쿨~한) 사내로 그려진다. 그런 설명들을 다 듣고 공연을 보았지만 나는 충격 속에 그 뮤지컬을 보고 또 볼 때마다 예수가 게쎄마네에서 기도하는 장면에서 수없이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난다.
예수는 결국 한없이 고독한 인간이었다. 그가 진정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믿음이 생기지는 않았다. 오직 그의 맑고 아픈 인간적 영혼이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그 즈음 읽었던 사반의 십자가와 같은 소설 속의 민족의 해방과 하느님 나라 건설 사이에서 고뇌하던 예수의 모습까지, 내가 사춘기 때 사랑한 예수는 온통 고뇌하고 마음 아파하던 여리기 여리던 30세의 사내였던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들었던 민중가요 속의 얼굴이 그을리고 쓰레기통에 버려진 피흘리는 예수였고 정호승 시 속의 가난한 사내 예수였다.
창의적이고 진보적이고 인간적인 예수를 부인할 수 있을까
예수가 이루고자 했던 변혁의 범주가 어디까지이든, 그의 의미가 사회적 혁명이든 종교적 개혁이든 간에 그는 누구보다 당시 기득권 사회에 대해 반사회적이었고 진보적이었고 놀랄 정도로 참신했던 인물임에 틀림없다. 인기인이든 수많은 안티세력을 지닌 문제 인물이었든 어떤 해석을 하더라도 그가 진보적 인물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기독교가 가장 득세하는 대한민국과 미합중국에서 진정한 예수는 가장 멀리 있다는 사실이 내가 단지 비기독교인이라서 그리 생각하는 것만은 아닐 터이다. 이 땅에서 전 세계에서, 진보와 사랑, 두 단어로 우뚝 서는 예수가 다시 오는 세상을 꿈꾼다.
그런데, 김규항 씨에게...
저자는 바리새인들을 오늘날의 어중간한 진보주의자 혹은 운동권, 진보적 지식인을 자처하는 사람들에 비유하면서 이들이 심지어는 로마나 사두개인들보다 더 나쁘다고 말하고 있다. 정확히 어떤 부류의 사람들을 빗대고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애매하기 때문에 오해를 부르기도 한다. 진보주의자들 내부의 각성을 부르는 발언이라면 더욱 명확할 필요도 있다.
물론 운동의 외형적 성장과 운동의 정체성 훼손이 비례하는 경향에 대한 지적처럼 공감이 가는 대목도 많지만 이런 내부의 적에 대한 신랄한 비판은 잘 모르고 오류를 행하는 경우와 전략적으로 거짓되게 운동을 떠드는 이와의 구분이 모호해 진보진영 대다수를 적대시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또한, 이렇게 비판하는 김규항 씨는 과연 어느 지점에 서있는지를 자꾸 묻게 된다. 이 책은 흐름이 매우 간결하고 담박하여 매우 마음에 들었고 저자에 대해 신뢰감을 갖게 하다가도 그런 지적이 나올 때마다 그럼 당신은? 하고 묻게 된다. 나는 김규항 씨를 잘 모른다. 그에 대한 좋은 평판들을 알고 있고 그의 칼럼들을 자주 읽지만 그를 잘 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래서 그를 비판하기도 조심스럽다.
하지만, 과연 완벽하고 온전한 이들이 다른 이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던가? 저자의 기준으로 버려지게 될 자칭 타칭, 반성적, 전략적, 어설프기 짝이 없거나 순진하기 짝이 없는 진보적 지식인의 범위는 너무 넓은지도 모르겠다. 명확한 논거를 대기 전에 뭉뚱그려 말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