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를 읽으면서 거기 담긴 몇 안되는 마그리트의 그림을 더 보고 싶었다. 그렇게 검색을 해서 산 이 책을 사놓고도 오랫동안 들여다 보지 않은 이유가 뭘까. 어쩌면 역逆 피그말리온 현상을 연상케 하는, 체모가 다 그러나서 민망한 표지 그림 때문이었을까. 혹은 잘 펼쳐지지 않는 판형이나 딱딱한 종이, 구식 인쇄방식 탓?청소년기에 3단 세로 식자판으로 세계명작 따위를 읽었던 세대인 내가 그런 것에 흔들리지는 않는다고 일단 말하고 싶다. 책 뒤에 이 책에 대한 서평으로 지은이 수지 개블릭이 어쩌구저쩌구 하여 고전적 연구를 하였다, 라고 써 있는데 나는 읽다 말고 그 '고전적 연구' 라는 대목을 다시 읽으며 쿡, 하고 웃었다. 좀 미안한 말이지만 르네 마그리트라면 철학적이고 정신분석학적으로 읽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림 마다마다에 그런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었던 화가의 의식 혹은 무의식이 숨겨있을 터이고 만약 그런 의식이 없이 그려진(실지로 마그리트는 모든 그림을 그렇게 의식하고 그리지는 않았다고 했던 것 같다) 그림일지라도 그것을 사회적으로 혹은 원형적으로 읽을 수 있는, 읽으려는 어떤 코드나 노력이 가능하지 않을까. 난 그런 걸 기대했던 것이다. 어떤 그림이 어떤 그림과 비슷하다는 주제별 분류가 필요했던 것이 아니고.마그리트는 전혀 상관성이 없어 보이는 두 가지 사물을 결합 배치하여 신비롭고 두렵게까지 느껴지는 '화면'들을 연출하였다. 그 이원성이라는 것은 개념의 혼돈 - 눈에 보이는 그 물건은 진짜 그거게 아니게? 하는 식의 - 과 정체성 규명에 대해 끊임없이 문제를 던진다. 밤과 낮의 공존, 거대한 하늘, 바다와 작은 생물체 혹은 무관한 사물의 공존 따위를 통해 이것은 왜 불가능한가 하는 문제를 던진다. 그 답은 그 자신도 모를지라도 말이다. 차라리 설명 없이 그의 그림을 '흠뻑' 즐기면서 논리나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림이 던져주는 환상 속으로 빠지는 게 더 아름다운 감상법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