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데기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주술적인 힘 - 엄밀히 말하면 바리의 능력은 주술이라기는 어렵다. 아픔을 읽는 것만으로 그렇게 부르기는 어렵다. 그러나- 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바리는 령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동물이나 말없는 존재와의 대화도 가능한 아이였다. 발 마사지를 하면서 (발이란, 한 사람의 가장 낮은 곳 아닌가) 그 사람의 아픈 과거를 읽을 수 있는 이였다.

그가 세상의 아픈 사람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들은 없다. 남편 알리가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을 알 수는 있었지만 그를 구해내지는 못한다. 환상 속에 만나는 많은 불쌍한 령들, 그들을 구원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녀의 환상 속에서이다.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면 전설 속의 바리공주와 바리는 다르다. 그녀는 나약한 현실인이다. 그녀가 강한 부분은 꿋꿋이 살아간다는 것뿐. 그렇게 따지면 우리 모두는 바리이다. 사는 것은 고약하게 아픈 일이지만 생명의 본분을 다하여 열심히 사는 것.

그래서 어떤 이는 황석영의 바리는 치유도 해원도 하지 못하는 절망의 바리공주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사람들의 발을 주무를 때, 그 어루만짐이 해원이고 치유라고 생각한다. 얼마나 미약한가. 남의 말을 들어주는 것, 남의 발의 굳은 살을 어루만지는 것.. 학교에서 아이들을 만나 상담이라는 것을 하면서 나는 자주 괴롭다. 상담은 문제를 해결하는 행위는 아니다. 좀더 전문적으로 들어가면 치료도 가능하겠지만 전문상담교사의 상담은 '들어주기'가 최선이다. 아이들이 쏟아놓는 상처들을 손도 대지 못한다. 남의 아픔을 들으면서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다는 것이 나를 고통스럽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상담이 끝날 무렵, 아이는 "그래도 이야기하고 나니 마음이 편안해져요."라고 말한다.

상담은 내담자가 자기 스스로 자기 문제를 마주 보게 만들고 이야기하게 만들고 응어리를 풀고 스스로 대안을 찾아가게 하는 활동이어야 한다. 성과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참 느려터지고 비경제적인 활동이다. 그러나 나의 신념은 그런 느린 활동들이 세상을 덜 아프게 하고 덜 썩게 하고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바리가 자기에게 오기를 바라고 그녀에게 발을 맡기는 것은 그녀가 성실하고 뛰어난 발마사지사라서가 아니다. 그녀가 갖고 있는 주술성 때문만도 아니다. 그녀는 '나'에게 관심을 기울여줄 사람이며 내 생애의 아픔을 들여다 보아줄 수 있는 사람이다.

바리의 생명수가 무엇인지 나는 모르겠다. 그녀는 분명 신화 속 바리공주보다 무기력하다. 그래도 나는 그녀의, 남의 아픔을 자기것으로 하고, 결국 자기도 아픔 속에 함께하는 그, 진정성에 감동한다. 그런 이야말로 우리의 무당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