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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멸종 - 거꾸로 읽는 유쾌한 지구의 역사
이정모 지음 / 다산북스 / 2024년 8월
평점 :
AI의 관점에서 지구의 역사와 인류, 그리고 멸종된 동물을 바라보는 과학책이다. 호모 사피엔스가 많은 동물을 멸종으로 몰아넣고 지구의 온난화를 가속하며 결국 자신마저 멸망할 위기에 처하게 한다고, 사람들은 인류만 없으면 이 지구는 평화로울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정모는, 아니 이 책의 서술자인 AI는 인류가 없었다면 아름다운 이 지구의 역사를 누가 기록했겠냐고 반문한다.
인간이 등장하기 전까지 우주는 제 나이가 137억 살인지, 지구 나이가 46억 살인지도 몰랐다.호모 사피엔스는 우주와 지구의 존재를 ‘알게’ 해 준 존재란 뜻이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갈 때, 생명체로서 생명 활동은 해나갈지라도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의 활동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누구나 염두에 두고 사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인식’이라고 한다. ‘이게 바로 ‘나’라고 깨달으며 스스로를 소중하게 여기거나 반성하는 일을 ‘자아 개념, 자아 인식, 자기 성찰’이라고 한다. 이 책의 저자는 스스로 다른 존재가 되어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 것은 호모 사피엔스만의 엄청난 능력이라며 그랬기에 지구의 역사를 기록하고 그것에 의미 부여를 할 수 있었다고, 그러니 인류는 얼마나 소중한 존재냐고 되묻는 것이다.
여기까지 읽고는 인류적 관점에서 자부심을 느낀다. 인간은 우리 자신의 문명에뿐 아니라 지구와 지구에 사는 생명체들, 아니 전 우주적으로도 의미 있는 존재였구나. 다만, 우리가 ‘자아’를 갖는 것은 타인을 의식해서이며 성찰이란 것도 다른 존재와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지구 인류만큼 그런 인식/평가/반성의 활동을 할 다른 존재가 없다면 그 값어치는 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 물론 이 책의 저자는 인류가 멸망하고 난 후에도 한참을 남아있을 AI가 그런 평가를 내릴 것이라는 가정을 한다. 허무한 미래적 상상이긴 하다.
이 책의 신선한 관점 하나 더.
멸종에 관한 책으로써 이 책은 멸종이란 ‘새로운 생명 탄생의 찬란한 시작’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흔히 꽃이 질 때, 꽃은 지더라도 그 자리에 열매가 맺히거나 새잎이 난다고 하면서도 어떤 동물이 멸종 위기에 처하면 (대개 그 책임을 인간에게 물으며) 종말을 슬퍼하곤 한다. 그러나 멀고 긴 지구의 역사를 보면 어떤 한 종의 멸종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음을, 또 다른 어떤 종 혹은 동물은 새롭게 진화함을 거시적인 안목으로 서술한다. 중생대의 지배자였던 공룡이 멸종한 후 비로소 신생대가 시작되면서 포유류가 기를 펴기 시작하고 그때 호모 사피엔스가 등장했던 예를 든다. 기후 위기 앞에서 우리는 인류의 멸종, 인류세의 종말을 두려워하지만 호모 사피엔스가 멸종하면 지구의 다른 생물들에게는 또 다른 신세계가 열릴 수도 있는 것이다.
인간의 삶도 유한하고 하찮지만 우주적 관점으로 보면 슬퍼할 가치조차 없을 만큼 작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슬프지조차 않은 것이다. 이 책의 관점은 그러하다. 나는 이래서 과학이 좋다. 과학은 철학이 되고 어쩌면 종교적 성찰에 닿는다.
그렇다고 지금, 인류에 의해 많은 동식물 종들이 멸종해가는 시대를 낙관만 할 수는 없다. 종의 다양성이 줄어든 생태계는 건강하지 않단다. 게다가 인류가 자기만 살겠다고 인위적으로 자연을 파괴한다면 당연히 자연스러운 지구의 변화나 그로 인한 멸종과는 다른 결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이 책이 좋았던 점 하나 더.
과학 에세이를 평온의 도구로 삼는 내가 즐겁게 책을 읽으며, 아, 이건 중학생들 읽을 수 있겠다 싶어 중2 수업 도서로 가지고 들어갔다. 설명문 쓰기를 하기 위해 비문학 도서 50권 정도를 가지고 들어가 자신이 관심 있어 하는 분야의 책을 읽으며 주제 찾기를 하는 수업이다. 솔직히 중2가 읽을 수는 있어도 제법 배경지식이 있어야 하는 책이다. 소수이긴 하지만 이 책을 열심히 읽고 진화론이나 멸종에 대한 설명문을 쓰는 학생들이 있다. 페름기 대멸종 사건을 다루며 이 책을 참고하고 다른 자료를 더 찾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기억에 남는 구절
만약 화성을 테라포밍하려는 노력의 1만분의 1이라도 지구에 쏟았다면 인류 종의 운명은 지금과 달랐을 것.
지금도 수천 명이 거주할 수 있는 달 기지를 건설하려는 아르테미스 프로젝트(2017년 미국 주도, 2024년 현재 22개국 참여 개발 중)가 진행중이라는데 이도 마찬가지다. 우주로 나아가려는 시도와 노력은 결국 부유한 자들의 몸부림이다. 가난한 자들과 함께 오염된 지구를 버리고 떠나려는 그 노력 대신 여기서 함께 잘 살고자 하면 어떨까 하는 저자의 문제제기이다. 한편으로는 너희는 화성으로 떠나 감자를 심으며 먹고 살라, 우리는 너희가 떠난 지구를 서서히 복원시켜 여기서 잘 살아볼테다, 이렇게 말하고 싶기도 하다. 뭐, 부자와 빈자, 계급의 차이라는 건 빌런들이 떠나도 또다시 돋아나는 어떤 사회학의 공식 같은 걸지도 모르지만 일단은.
그리고 저자는 지구 온난화는 지구 가열화로, 열대화는 지구 비등화로 용어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찬성한다.
또 재미있었던 장면은 달 이야기다. 달은 초기 지구 가이아가 원시 행성 테이아와 충돌한 후 지구와 함께 탄생한 천체다. 달이 태어나면서 지구 자전축이 23도 기울고 지구에 계절이 생김겼다. 달은 참 여러 가지로 드라마틱한 존재다. 이 역시 인간이 없었다면 달과 지구에 인간성을 부여하고 스토리라인을 만들지도 않았겠지. 인류가 멸망한다고 상상해 보면 수많은 세월 동안 인류가 쌓아 놓은 모든 문명과 문화가 무의미해질 터이다. 달을 두고 노래한 것, 달에 가고 싶어 애달복달했던 그 뜨거운 열망, 저 존재를 알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았던 지적 욕구들 그 모든 예술적 학술적 감성과 업적들도 다 사라질 것이다. 인생은 그런 것이다. 살아있다는 것은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살아남는다는 것은. 멸종에 대한 책을 읽으며 어떻게든 멸망하지 않고 살아야 할 당위를 다시 한 번 되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