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우리는 꽃이 아니라 불꽃이었다 - 프란시스코 고야부터 나오미 클라인까지, 세상과 맞서 싸운 이단아들
박홍규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22년 5월
평점 :
스무 살 가을에 스물한 살의 남자아이를 만났다. 그가 날 사랑한다고 느낀 즈음에 나는 수줍게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빌려주었고 그는 그 대가로 내게 빅터 프랭클의 <수용소에서>를 권했다. <데미안>이 자기 안으로 침잠하는 젊은이들 이야기라면 빅터 프랭클은 사람들과 세상으로 눈을 돌리는 사람이었다.
자기로의 침잠은 타고난 나의 기질일지라도 남편(그는 나의 남편이 되었다)이 그때 권했던 책이 준 충격은 또한 나의 가치관과 사회성, 정치성에 영향을 미쳤다. 빅터 프랭클의 책에서 내가 충격을 받은 것은, 죽음을 눈앞에 둔 수용소 사람들 사이에서도 이타성은 얼마든지 발현될 수 있다는 증언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조금은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타고 났으되 이타적이고 공동체적 가치관을 머리에 담으면서, 그렇게 살지 않으면 양심이 아픈 사람으로 평생을 살게 되었다. 그 두 가지는 자주 부딪치고, 궁극적으로는 나의 기질이 이길 때가 많았으지만 그래도 나를 아주 나쁜 사람으로는 살지 않게 해주었다.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때가 떠올랐던 것은 제르맨 틸리옹이라는 레지스탕스 이야기를 읽을 때 그와 함께 수용소를 경험했다 하는 드골의 조카 앙토니오즈 이야기 때문이다. 그녀는 “수용소에서 굶주린 포로들이 동료에게 먹을 것을 양보하던 광경이 잊혀지지 않는다”면서 평생 빈곤한 사람들을 위해 일했단다. 최근의 몇 날 새벽의 불면을 내내 이 책으로 견디면서, 세상엔 치열하게 살다간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새롭게 깨닫는다.
박홍규의 글과 책을 좋아한다. 정치적으로 진보적일 뿐 아니라 그 보다 더 나아가 때로는 이단아적인 참신하고 독특한 시각들이 좋다. 최근에 우연히 ‘내 친구 아나키스트 예수’라는 책을 발견하고 박홍규의 책을 쭉 몰아서 보다가 이 책, <우리는 꽃이 아니라 불꽃이었다>도 읽게 되었다. 세상 곳곳의 수많은 아나키스트들의 족적을 모아놓은 책이다.
나는 아나키스트가 아니다. 오히려 현실주의자로서 국가와 법의 체계가 잘 정비된 세상에서 살고 싶은 사람이다. 그래서 박홍규의 가치관에 모두 동의하지 않으며 이 책 속에 소개되는 사람들처럼 살고 싶지도 않다. 그들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힘들게 살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기 소개된 이들의 그 치열한 삶에는 진심 어린 존경을 보낸다. 책에 소개된 이들 중 내가 아는 사람은 1/3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너무 많은 사람들의 너무나 많은 활동을 접하고 뇌가 지쳐 “그런 뛰어난 사람이 기득권을 버리고 치열하게 저항하였으며,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많은 저서를 남겼다.”는 공통점만 머리에 남으면서도 실제로 살았던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고맙고 숙연한 마음이다. 그렇게 3분의 2쯤 읽을 시점에서 이제 남은 부분은 적당히 발췌독을 하고 말리라 생각하던 중 마리 퀴리를 읽었다.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자녀들까지 노벨상을 받을 정도의 천재 집안이지만 모두들 부와 권력을 탐하지 않고 인류를 위해 기여했다. 특리 마리는 전장터에서 부상자를 위해 직접 운전을 하는 등 현장에서 뛰었다. 과학자로서 기여하고 특허에 집착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만으로도 존경받을 만한데도.. 그런 사람들의 삶을 평범한 한 사람의 몫과 비교할 수 있을까. 새벽에 정신에 찬물을 끼얹힌 듯한 느낌으로 책을 읽다가 우루과이의 무히카 대통령 이야기를 읽고 체 게바라를 만났을 때처럼 매료되었다.
뛰어난 사람들의 무게를 실감할 때가 있다. 하지만 유능함에 그치지 않고 그것이 올바름과 결합될 때, 그리고 만약 아름다움과 함께 한다면, 도대체 인간이라는 하찮은 동물이 어디까지 드넓어질 수 있는지 감탄한다. 평범한 삶은 얼마나 그들에게 빚지고 있는가. 게다가 그들이 그 누구보다 스스로 권력과 명성을 멀리한, 단지 멀리한 게 아니라 세상에서 그런 것들은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한 아나키스트라면. 그래서 저자인 박홍규도 수도 없이 말하듯, 이렇게 훌륭한 사람이건만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고, 우리나라에 그들의 책이 번역조차 되지 않았다고 안타까워하는 아나키스트라면 더욱, 그 겸허함 앞에 마음이 아릴 수밖에. 그리고 나처럼 아나키스트는 아니지만 좋은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믿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들은 얼마나 귀하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덧붙일 이야기 하나, 책 뒤에 매겨진 값이 7200원이다. 이 겸손한 가격 책정 역시 아나키스트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