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의 발견 - 한국 지식인들의 문제적 담론 읽기
고명섭 지음 / 그린비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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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발견 고명섭

 

작가 고명섭에 대해 경탄의 마음을 표하고 싶다. 학자도 아니면서 방대한 독서와 집핍의 에너지를 보여주는 그, 시간을 내어 연구해 몰두해도 다다르기 쉽지 않은 통찰의 안목을 보여주는 그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게다가 잘 읽히는 문장을 쓸 수 있다는 것은 그가 읽고 쓴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고 설명한다는 것인데... 무엇보다도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사람들의 저작과 사상을 정리해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사람의 삶과의 연관성 속에서 그 업적이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지를 통찰한다. 이렇게 깊이와 넓이, 5차원에 가까운 통찰, 그것을 표출하는 에너지와 기법 모두를 갖춘 저자를 정말 오랜만에 본다. 그의 책은 나를 다른 독서로 이끈다. 이렇게 한 권의 책에서 감자 캐듯 새로운 정보를 얻는 책은 보물이다. 나는 이 책을 통해 <계몽의 변증법>으로 나아간다.

 

그러고 보면 이 책은 전반적으로 <계몽의 변증법>이 제기한 문제에 대한 고민으로 보인다. 나는 아직 그 책을 읽지 않았으니(구해놓았다) 저자가 요약해 놓은 부분에 기댈 수밖에 없지만 고명섭은 이 책에 대해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그렇게 자기반성이 결여된 이성을 도구적 이성이라 일컬음. 계몽은 인간을 신화의 세계에서 구출해 냈지만 그 자신이 다시 신화가 됨이라고 요약하였다. 그렇게 신화가 된 계몽을 비판하기 위한 <계몽의 변증법>과 보폭을 맞추면서 고명섭은 <파우스트>, <니체>, 한나 아렌트와 도올을 바라본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이 책은 <계몽의 변증법> 필터링으로 읽는 현대 철학(의 일부)이라 할 수 있다. 니체나 도올은 제대로 읽어본 적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깊은 생각으로 여러 번 읽었던 파우스트에 대한 글, 그리고 내게 다른 시선을 안겨주는 똘레랑스 편이 유용했다.

 

나는 <파우스트>가 오만한 인간주의를 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방대함, 고민의 깊이를 찬탄하면서도 가리키고 있는 방향성은 무엇인 걸까 읽을 때마다 궁금해했다. 그에 대해 작가는 파우스트야말로 계몽주의 시대를 대변하는 작품이었다 말한다. 파우스트의 이성을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스스로를 계몽하지 않는 계몽이라 부르면서 그런 계몽은 필연적으로 전체주의에 이른다.’고 지적했다 한다. 파우스트 작품에 담은 주제 의식은 괴테 개인의 것이라기보다 시대의 것이었나 보다,

내가 파우스트를 읽으면 막연히 느꼈던 불편함을 이렇게 해명해주다니... 이렇게 계몽의 변증법 feat. 파우스트는 오래 묵은 나의 답답함에 대한 설명이 되었다.

 

그리고 한국 진보 진영에게 한때 중립적이고 이상적인 유토피아의 토핑같이 사랑받던 똘레랑스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은 관점을 제시한다. ‘진정한 톨레랑스는 냉정한 계산이나 적절한 선에서의 타협이 아니라 정의와 연대를 강조하는 뜨거운 이성이라면서 미국의 톨러런스는 다양성과 차이를 인정하는 톨레랑스가 아니라 타협을 말한다고. 그래, 미국 사회 특유의 너그러움이 프랑스식 톨레랑스와는 전혀 다르게 느껴졌던 이유를 알겠다. 진정한 톨레랑스는 인간의 완전함에 대한 부정이 전제조건이고 양심의 자유를 옹호하고 극단을 거부하는 태도이며

폭력을 거부하는 이성적인 토론과 설득. 비폭력의 원칙을 지킨다는 것. 하지만 이 관용의 정신도 사실 제국주의와 싸우지 않았고 서구인, 기독교인들끼리만 통하는 원리였다는 점도 지적한다. 톨레랑스가 구현되려면 토론이 중요한데, 이는 교육받은 이들끼리나 가능한 것이라 사회적 약자가 누리기 어려운 것일 수 있다는 것도.

80년대 진보주의 운동에서 많이 나오던 지식인주의의 오류와 맥이 통하는 지적이다. 오류라기보다 한계가 맞는 말이겠지만.

 

그리고 <계몽의 변증법> 뿐 아니라 부르디외 책을 산 것도 이 책을 통해 얻은 성과에 넣는다. 고명섭 기자, 땡큐. 나는 당신의 다음 저작으로 건너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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