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카스 수업의 장면들 - 베네수엘라가 여기에
서정 지음 / 난다 / 202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랜만에 보물을 발견한 기분이다. ‘작가라는 이름으로 많은 평범한 사람들의 글과 책이 넘쳐난다.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도 빛나는 것들은 있고 배울 점도 많지만 때로는 아무나 글을 쓸 수 없던 시절이 그립기도 하다. 적어도 출간이라는 관문을 통과한 검증된 글들, 고뇌를 거듭하고 문장을 벼려 세상에 내보낸 글들을 읽는 고마움... 그런 기쁨과 고마움을 오랜만에 맛보았다. 서정이라는 분은 도대체 뭐하는 이일까? 경력을 보니 자유 영혼을 지닌 이인가 보다. 세상 여기저기를 떠돌고 많은 이들을 만나며 살아온 것은 그의 기질 탓일까. 외국어를 여럿 할 줄 알고 이렇게 필력이 좋은 이라면, 그리고 낯선 곳에 가서도 잘 살아낼 정도의 에너지가 있는 이라면 소위 잘나가는 삶을 살 수도 있었을 텐데... 재능이 뛰어나도 세속에서 추구하는 돈과 명예를 좇지 않는 이들도 많다. 그렇게 살 수 있어도 자유롭게 살고 싶은 욕구가 그런 삶을 선택하게 하지 않는 이들도 많다. 그도 그런 사람일까...

 

베네수엘라에서의 작가가 보낸 일상 이야기는 재미있지만 그의 글에는 많은 경험과 에피소드보다 사유가 앞선다. 문학적 감성이 뛰어나고 무엇보다 예술을 보는 안목이 있다. 소설을 쓰는 이일까? 평범한 사람이지만 남들은 못하는 경험을 했기 때문에 그 경험을 책으로 내보자는 제안을 받은 걸까?

 

당신의 사진 속 텅 비어 있는 공간들에는 어둠과 빛이 공존합니다. 먼지 속에 반짝이는 것들이 보입니다. 가슴이 내려앉는 이유는 거기에 달아놓은 5, 10불짜리 가격표를 당신이 똑바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포악한 상인들이 득실거리는 가차없는 시장에 삶이 통째로 팔려 나온 우리의 처지를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는 당신의 사진으로 비로소 알았어요. 내 물건, 내 공간에 깃든 별 것인 시간의 가치를요. - 마릴리 콜 사진 전시회에 대한 작가의 글

 

마릴리 콜의 사진을 놓고 화면을 붙잡은 이의 의도 따위는 없다. ...프레임 안을 들여다봄으로써 프레임 밖을 고민하게 되었다는 것. 프레임 안의 고요가 프레임 밖의 곡소리를 심화한다는 것.’이라 평했다. 평범한 비평이 아니다.

 

그의 글을 읽으면서 요즘 내가 공부하고 있는 스페인어에 대해 생각했다. 그가 다루고 있는 남미의 현실과 미술은 잘 모르지만 문학작품에 대해서는 좀 생각했다. 그가 언급한 노래들을 찾아 들어 보았다. 그러나 이런 문화적 지평 넓히기보다, 도대체 이 사람은 어떤 영혼을 지녔기에 고난이 예상되는 곳에 기꺼이 찾아가 살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내가 영혼이라 표현한 이유도 그가 관심갖는 문화적 영역이 관심의 영역이 아니라 정신적인 영역이라 느껴져서이다.

그러나 이렇게 깊은 영혼과 재능도 자신을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상품화하여 세상에 내놓지 않는 한 쓸쓸하고 아름다운 작은 별로 떠돌다 언젠가 사라지겠지, 생각하니 마음이 좀 아리다. 우리 중 궁극적으로 보면 그렇지 않은 삶을 사는 사람이 없겠지만, 정도 차이이겠지만, 그래도 세속적 안락을 추구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서정, 그는 도대체 무엇을 좇는 것일까. 책을 읽는 내내 작가가 궁금한, 이런 책도 드물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