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유럽 - 당신들이 아는 유럽은 없다
김진경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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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글을 만나면 나의 글을 돌아보게 된다. 좋은 관점, 폭넓은 공부와 취재, 사회 변화의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안목....

나는 <시사인>을 통해 김진경의 글을 처음 만났다. 그는 지면에서 코로나 시대의 유럽이 결코 세계인들의 귀감이 되지 못함을 생생하게 전해주었다. 그리고 드디어 이 책, <오래된 유럽>에서는 제목이 의미하듯 더 이상은 이상적이지 못한 유럽의 민낯을 다양한 측면에서 보여준다. 프랑스에 사는 목수정과 마찬가지로, 스위스에 사는 김진경도 폭넓은 안목을 지닌 한국 출신의 지성인이면서 관찰자가 아닌 생활인으로서 현지 삶을 살아가는 이만이 쓸 수 있는 독특하고 귀한 글을 쓴다.

 

나는 지난 겨울 이후 지금까지 클래식이나 팟캐스트를 그림 그리는 일이 푹 빠져 살고 있다. 클래식은 말할 것도 없고 철학, 음악, 여행, 미술, 과학 등 다양한 영역의 콘텐츠를 다루는 그 팟캐스트는 정말 재미있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대부분 유럽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원근법을 공부하겠노라고 출력한 사진 속 풍경은 아름다운 유럽의 거리다. 어떤 작가가 해마다 휴가 때는 유럽에 다녀온다고 해서 유럽에 대한 열망 혹은 열등감이 있는 이인가, 혼자 질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이 보고 뭐라 할 일이 아니다. 나에게도 유럽에 대한 환상이 있는 건 아닐까. 사실 질투가 난다. 그들이 누리는 문화적 아름다움, 깊이, 그런 것들이 내 것이 아니라는 속상함 같은 게 있다. 그들이 누린 풍요와 그들이 이룬 아름다움은 식민지 침탈과 전쟁, 약탈의 역사에 기반해 있음을 모르지 않지만, 부러운 건 부러운 거다. 실상을 보았다고 해서 열망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래서 나는 의식과 감성 사이에서 괴리를 느낀다.

그런 와중에 김진경의 책을 만났다. 많은 이들이 부러워하는 유럽이 결코 유토피아가 아님을 구체적인 사례와 근거를 들어 말해준다. 김진경은 코로나를 통해 드러난 공동체 시스템의 문제점뿐 아니라 스위스를 포함한 유럽 여러 나라들이 교육, 다문화 정책, 이민자를 대하는 태도, 현실을 극복하는 대처 능력에 어떤 문제를 갖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좋은 유럽인이라는 개념이 있다 한다. 아마도 내가 부러워하는 유럽적 이상을 한 마디로 표현한 것일 터이다. ‘자유와 인권의 가치를 수호하며 국가와 민족을 초월해 함께 연대할 때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믿는 유럽인의 위상. 아마도 내가 열등감을 가지고 가장 부러워하는 측면일 것이다. 다양성을 존중하고 성숙한 연대를 구현할 수 있는 곳으로서의 유럽. 그런데 저자는 과연 그런가? 당신이 아는, 혹은 꿈꾸는 유럽이 실존하는가?’ 묻는 것이다.

 

학교 교사이므로 특히 나는 유럽의 교육이 한국의 교육 못지 않게 계급의 대물림에 기여한다는 이야기에 눈이 갔다. 한국은 압축성장과 군부독재, 권력의 부패를 경험했기에 그런 현상이 개발도상국 발전과정의 필연적 부산물쯤으로 여겨졌지만 도대체 유럽은 왜? 자본주의가 발달했지만 복지와 사회민주주의적 국가 개입에 대한 성숙한 담론이 풍부했던 유럽이 왜? 책 속에 답은 없었다. 저자는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적어도 유럽을 대안 삼지는 말라고 말하는 것 같다.

가령 의료보험제도. 미국의 허술한 의료보험 이야기는 하도 많이 들어 익히 알고 있지만 스위스도 별로 다를 바 없단다. 반드시 들어야 하는 의료보험 수가는 턱없이 높고 의료비는 더더욱 부담스럽다. 이쯤 되면 대안을 유럽이 아니라 변형되고 왜곡된 민주주의 제도 속에서 살아온 줄 알았던 우리나라에서 찾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유럽이 가장 멋지다고 생각되는 지점은 경제 문화 예술 철학을 선도하고 있다는 점 말고도 다양성, 존중, 배려, 토론, 공감, 공정의 문화 때문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이슬람 문화에 대한 편견과 왜곡된 표현의 자유 논쟁에서 의문점을 갖게 된다. 뭐랄까, 꽤 멋진 아이인 줄 알았는데 궤변을 늘어놓는 위선자임일 밝혀진 것 같아, 혹은 알고 보니 잘난 것도 똑똑한 것도 아닌 친구가 허우대만 멀쩡했던 거였나 싶을 때의 실망감 같은?

 

이 책이 유럽의 숨겨진 면면들에 의문을 던진다고 해서 그들이 쌓아 올린 역사와 가치관이 다 무너져버리는 것은 아니다. 누가 뭐래도 유럽은 끊임없이 우리가 잘하고 있는 것인가?’ 스스로에게 묻고 있다. 어쩌면 유럽이 진정 멋진 것은 그들이 이뤄놓은 것들이 아니라 그들이 성장해온 과정일지도 모른다. 이 책은 그리하여 유럽 별 거 아니네가 아니라 이 친구들, 이렇게 끊임없이 논쟁하며 살아가는구나.’하는 깨달음을 준다. 그렇다면 허술할지라도 그들은 여전히 멋진 친구들이 맞는 거다.

 

기억에 남는 대목을 정리해 본다.

 

수많은 언어 폭력은 더 심한 사건의 전조현상 인정한다. 그런 면에서 지금의 한국이야말로 가장 아슬아슬한 곳일 수 있다.

 

국가(國歌)의 다양한 의미 - 라 마르세예즈, 이탈리아 국가처럼 전쟁을 암시하는 가사, 영국 여왕을 칭송하는 영국 가사, 기독교 찬송가 같은 스위스 가사, 작곡가 친일 논쟁이 있는 우리나라 애국가 등 논란이 있다는 지적 국가를 부를까 말까에 대해서는 자율에 맡길 때 가장 논란이 덜 된다. 프랑스에서 베일 착용을 금지하자 베일 착용자가 오히려 늘었다는 것도 비슷한 이치인 듯 보인다. 어쩌면 논란 일으키기 좋아하는 이들이 음모에 놀아나는 것일 수도 있고 말이다.

 

차별과 혐오에 대한 경계를 가르칠 때 수업자료로 쓸 이야기

(요약) 보든이라는 18세 여성이 길에 세워진 어린이용 자전거를 타고 급히 동생을 데리러 가려다가 그건 우리 아이 자전거야!’라고 소리치는 소리를 듣고 내려놨다. 주민의 신고로 기소되었다.

프레이터라는 41세 남성이 가게에서 86달러어치의 물건을 훔쳤다. 무장강도로 5년 징역을 산 적 있던 전과자였다. 기소되었다.

이 둘의 재범 위험도를 판단해 형량을 정해야 한다면 당신은 어떤 결정을 내리겠는가?

미연방은 위험평가risk assessments’라 부르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돌려 재범율을 보고 형량을 정한다. 보든이 더 높게 나왔다. 왜냐하면 보든은 흑인, 프레이터는 백인이었기 때문

 

외국인 이민자의 범죄율은 확실히 높다. 스위스 인구 25퍼센트의 외국인이 범죄의 58퍼센트, 독인은 인구 2퍼센트의 불법 이민자가 전체 범죄 용의자 8.5퍼센트를 차지하는 등등. 하지만 이것은 가짜 투명성이다. 독일 14~30세 젊은 남성 인구가 전체 9퍼센트지만 이들은 전체 폭력 사건의 절반을 차지한다. 그러니 이민자가 아닌 젊은 남성 문제에 집중해야 한다. - 이민자 차별이라는 이슈와 약간 동떨어진 이야기이긴 한데, 인류의 역사는 젊은 남자아이들을 잘 가르치는 것을 가장 큰 과제로 삼아왔다 하고 교육의 모범국가라는 핀란드에서도 남자 중학생의 학력 저하가 가장 큰 교육 난제라 했던 것이 생각난다. 동서고금, 생물학적 이유 때문인지 젊은 남자는 사회 발전의 가장 큰 동력이기도 하고 트러블 메이커이기도 했던 것일까. 남중에서 수십 년을 가르치고 있는 나는 힘든 길을 걸어왔던 게 맞다.

 

이란이 반외세를 외치면 전통 회복을 주장할 때 자발적으로 베일을 쓰고 저항한 이란 여성들이 있었다. 페미니즘 민족주의. 1979년 성직자 호메이니를 내세워 팔라비 왕조를 무너뜨리고 이슬람 혁명에 성공. 하지만 그 다음 새 정부가 반 서구를 기치로 내세우며 여성들에게 다시 베일 착용을 강요했다나. - 역사는 항상 이런 아이러니와 배신의 씨앗을 품고 진화 혹은 반복돼 오고 있구나 싶다. 꼭 가야 할 길이었지만 실수 혹은 오류를 범한 한국 페미니즘 운동과 위안부 운동에 대한 착잡한 마음이 오버랩된다. 하지만 오류가 있다고 가야 할 길을 아니 갈 수는 없다. 어떤 것은 실수이지만 어떤 것은 적들의 농간에 이용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할 일을 하지 않을 수는 없는 것. n번방 사건을 수면에 끌어올렸던 사람, 위안부 투쟁으로 평생을 살아왔던 사람들이 정치권에 가서 망가지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들이 해왔던 일들의 가치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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