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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법 수업 - 흔들리지 않는 삶을 위한 천 년의 학교
한동일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9월
평점 :
하워드 진의 <미국 민중사>를 읽으며 우리나라 헌법 제정에 대해 생각한 적이 있다. 미국의 건국 역사도 짧다 하지만 우리나라 근대화의 역사는 그야말로 초스피드의 역사였다. 고유한 문화를 거의 접다시피하고 서양의 근대문물을 받아들여야 했던 역사. 그러니까 19세기 말을 기준으로 본다면 헌법이 제정된 1948년까지 5, 60년 정도의 시간에 남의 나라 수백 년 역사를 거의 흡입하다시피 한 것이다. 그에 비하면 우리나라 제헌 헌법은 제법 좋은 정신들을 다 담고 있었다. 그러니까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물밑으로 우리는 너무나 많은 역사를 이루었는지도 모르겠다.
로마법을 읽는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한동일 교수의 전작 <라틴어 수업>을 재미나게 읽은 기억에 의존했을 뿐 솔직히 로마에도, 로마의 법에도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다른 영역에서도 그렇지만 서구 문명의 근간을 이루는 로마의 힘을 새삼 느낀다. 그러니까 작품성을 떠나 그 영향력 때문에 로마사를 읽고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 로마법을 읽는 것은 의미가 있더란 말이다. 저자도 책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거의 대부분의 법이 로마법의 법률 개념을 바탕으로 정립되었기에 로마법을 알아야 한다.
서구의 법률들이 로마법을 근간으로 해서 세워졌고 지금 세상을 지배하는 문화와 문명이 대부분 그렇듯 우리의 법률도 그 뿌리에서 자유롭기 어려우니까.
로마의 법은 어떤 부분은 근대의 기준에서 미개하거나 과하게 여겨지는 부분이 없지 않지만 로마 사회가 그랬듯 매우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부분이 많다. 오히려 세상을 자본이 지배하면서 법정신의 근간이 자본과 권력에 흔들리는 것에 비하면 로마법이 더 옳다고 말하고 싶은 부분도 많다. 저자 역시 한국의 사법농단, 연예인의 약물 범죄를 언급하며 로마에서는 판관의 판결 조작이나 약을 먹여 성폭행하는 것 등은 극악무도한 범죄로 치부해 외딴섬에 고립시켰다는 판결을 언급한다.
로마는 계급사회였지만 오히려 공개적으로 계급을 인정하면서도 합리적으로 계급 간 공존을 가능하게 했고 법적으로는 시민 계급인 인제누우스나 노예 출신 시민이나 합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지금 대한민국의 사회처럼 보이지 않는 계급의 담장 아래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법이 오히려 공정을 가장한 불공평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로마에서 해방노예로서 자유민이 된 리베르투스의 경우 공적 임무에서 배제되는 대신 군 복무로부터 자유로웠다 한다. 해석하기 따라서는 나름의 공정함이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물론 미개하고 덜 발달한 법이 없지 않다. 혼외임신을 한 여성은 형벌 없이 남편이나 아버지에 의해 정부와 함께 살해되었다는 대목도 그렇고 로마 사회는 전반적으로 여성의 인권을 고려하고 않았다.
로마보다 먼저 이탈리아 반도에 자리잡고 있던 에트루리아인들은 자녀의 이름을 지을 때 양친 모두의 이름을 반영하는 문화가 있었지만 로마에게 점령당하고 나서 사라졌다고 하니 로마 문화가 매우 진보적이고 합리적인 듯 보여도 여성에 대해서만은 그렇지 못했던 것 같다. 다만 법문에 여성이 무고당하지 않도록 도우러 가야 한다는 조항은 있단다.
여성에 관한 법률을 언급하면서 한동일 교수는 특히 힘주어 남자든 여자든 어느 한쪽 성만의 특성과 특권으로 조화롭게 완성된 삶을 살기는 어렵다는 것을 강조한다. 페미니즘 운동이 여혐 논쟁으로 번져 역페미니즘으로, 성별 혐오로 이어지는 한국 사회에서 특히 영향력 있는 남성들이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탈리아에서 정말 경치 좋은 곳을 찾으려면 장애인 시설이나 어린이 병원 같은 곳을 찾으면 된단다. 우리는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세웠지만 진정한 선진으로 가기 위해서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숙고해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