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동어미전
박정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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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풍댁은 화기가 뻗쳐오를 때면 늘 하던 대로 두어 번 숨을 고르고는 골내댁을 이해해 보려 애썼다. ‘이 사람아 성내지 마고 저 사람 심정을 살피게. 젊으나젊은 기 시집이라꼬 와가 허구한 날, 남의 빨래품에 방아품 팔아 늙은 시어마이하고 병든 서방을 봉양할라만 그 속이 얼매나 썩었을로. 저도 오죽 답답꼬 속상하만.... ’

 

진정한 어른의 모습이다. 이사람아 성내지 마고... 하고 자기자신에게 이야기를 나눈다. 융이 말한 자기화에 성공한 성숙한 인격이다.

그리고는 두어 걸음 물러서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하고는 골내댁의 손을 잡았다.

골내 새사람, 내 하나 물어봄세. 그래, 골내서 살 적에 남들 다 가는 화전 놀음, 자네 혼자 안 가이 그 속이 시원턴가?” 질문하며 설득하기의 전형이다. 그리고 그 말을 할 때 청풍댁이 골내댁의 언 손을 연신 주무르며 말한다. 청풍댁은 속으로는 골내댁의 골질하는 작태가 어리석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이해의 마음을 내오는 것이다. 어른은 이런 거다.

 

책에는 너무 많은 여성서사가 들어있다. 처음에는 골내댁이나 청풍댁 이야기를 하는가 싶더니 봄이 이야기를 하는가도 싶었다. 한참을 읽다가 왜 제목이 덴동어미전인가 의문이 들었다. 처음에는 덴동어미를 그저 엿장수로 동네 이야기를 전하는 메신저 역할 정도라 생각했으니.. 알고 보니 그 누구보다도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으되 끝끝내 강퍅해지지 않고 세상 모두를 이해할 수 있는 인물인 덴동어미가 화전놀이에 가서 좌중을 이끌어가는 인물임이 드러난다. 그는 온갖 세상사를 짊머졌을 뿐 아니라 그것을 나름대로 극복한 해탈적 존재이며, 혼자 고난을 극복하여 영웅이 된 사람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아우르는 사회자이며 지도자 역할을 한다. 그런 인물 현실 세계에서도 남자들 서사에서도 흔치 않다. 더 놀라운 게 있다

 

덴동어머를 천하다 기구하다 배제하지 않고 그에게 말할 기회를 주고 멍석을 깔아주는 이가 동네 여성 지도자 역할을 하는 안동댁이다. 반상이 어우러지고 있는 자, 가난한 자가 함께 노는 대동의 세상, 비록 단 하루지만 인생 전체를 아우르는 해탈과 해원의 시간이 펼쳐진다. 고집 세고 권위주의적인 양반 남자들과 봄이를 탐하는 악한 의붓오라비도 나오지만 덴동어미가 겪은 남정네들이 모두 기구하면서도 최선을 다해 살아내는 모습을 보이면서 단순히 남녀 대결구도를 만들지 않는 지혜로움도 엿보인다.

단 하루의 화전 놀이, 모여 앉은 자리에서 펼치는 신세한탄에서 사람들은 덴동어미의 기구함을 통해 오히려 힘을 얻는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저리도 기구하건만 끝끝내 살아내는 그 힘, 그 모든 기구함을 노래와 각설로 풀어내는 긍정의 힘에서 힘을 얻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 자녀들은 조금이라도 자유롭고 인간다운 세상으로 발을 내딛는다. 그들 역시 청풍댁처럼 덴동어미처럼 너그러운 이해와 연대의 역할을 마다하지 않는다.

 

친정 어머니가 읽을 책을 빌려달란다. 공부는 많이 못했지만 젊은 시절 서점할 때 책깨나 읽었던 양반이다. 총기가 좋아 젊은 시절 읽은 책이며 팔았던 책의 내용과 저자를 다 기억한다. 지금도 소일거리로 한자를 쓴다. 그런 어머니에게 좋은 머리를 물려받고도 동생들은 식구들이 모여 술 마시는 자리에서 어머니를 없는 사람 취급한다. 대기업에 다니며 억대 연봉을 받는다고 자기들 하는 일의 전문적인 대화를 나누면 어머니가 하나도 못 알아들을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대화의 중심을 고루 돌리며 어머니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줄 줄은 왜 모르는 걸까. 그나마 엄마는 요즘 무슨 드라마 보셔?” 하고 질문을 던져 겨우 노인네가 말문을 열려 하는데 화제를 가로채서 회사 이야기를 하는 동생이 얄밉다. 엄마는 다 알아듣는다. 엄마가 너보다 책도 더 많이 읽는다, 이 헛똑똑이야....

 

어머니는 최근에 이금이의 <알로하, 나의 엄마들>과 도올의 강의록을 읽었다. 그리고는 책을 빌려달란다. 나는 이금이의 <소희의 방>과 김애란의 <두근두근 내 인생> 그리고 이 책 <덴동어미전>을 챙긴다. 이 험난한 여자들의 이야기에 안 그래도 죽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76세 노모는 우울해지지 않을까 걱정도 된다. 10년 병수발 후에 2014년 돌아가신 아버지가 그립고, 혼자 쓸쓸해서 늘 너넨 짝꿍이 있지, 난 없다!’를 외치는 이 양반은 덴동어미의 기구한 삶에 반사적으로나마 위로를 받을 수 있으려나.... 내일은 엄마랑 족발이라도 시켜먹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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