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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데우스 - 미래의 역사 ㅣ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김명주 옮김 / 김영사 / 2017년 5월
평점 :
과학의 진보도 경제성장도 부서지기 쉬운 생물권 내에서 일어나므로 과학과 경제가 전속력으로 달리면 그 충격파로 생태계가 불안정해진다. 전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부유한 미국인들과 똑같은 삶의 척도를 제공하려면 행성이 몇 개는 더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지구뿐이다. 진보와 성장이 결국 생태계를 파괴할 경우, 흡혈박쥐와 여우, 토끼만이 아니라 사피엔스도 호된 비용을 치르게 될 것이다. 생태계 붕괴는 경제파탄, 정치 불안, 삶의 척도 하락을 초래해 결국 인간 문명의 존재 자체를 위협할 것이다.
우리는 진보와 성장의 속도를 늦추어 그 위험을 줄일 수 있다.
유발 하라리의 강연 영상이 유명하대서 찾아보다가 깜빡 잠이 들었는지 꿈에 그가 나타났다. 나는 손을 들고 어수룩한 영어로 질문을 던졌던가. <호모 데우스>에서 결국 우리는 ‘데이터 교’의 시대를 거부할 수 없다는 결론이라면 우리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 거냐고. 그의 답을 듣지는 못했지만 깨고 나서도 생각은 이어진다. 조금이라도 그 시간을 뒤로 미루려 애를 써야 할까? 아니면 전기의 시대, 스마트폰의 시대를 처음 맞이했을 때처럼 뭔가 더 긍정적인 활용을 위해 마음을 열어야 할까?
이 책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대목은 현대를 ‘데이터 교’의 시대로 규명한 결론이 아니었다. 경제성장률이 0%가 되면 오히려 환경오염이 덜 된다는 구절이 가정 충격적이었다. 왜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을까? 경제를 잘 모르고 경제적 변화에 직접적 영향을 받지 않는 삶을 산다고 생각하면서도 기사에서 올해 경제성장률이 떨어질 거라고 뜨면 괜히 덩달아 걱정을 하곤 했던 나의 무지가 우습게 여겨졌다. 코로나 때문에 경제가 어려워질 거라고 하지만 그 역설로 지구가 깨끗해지고 인간이 아닌 다른 종들은 좀 더 살기 좋아졌다는 기사를 보면서 그래, 전염병의 두려움 뒤에서 사람들은 이제 한 번쯤, 왜 그리 경제성장에 목을 매고 살았는가 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물론 이런 경제적 타격은 가장 가난한 이들에게 직격탄으로 오기 때문에 낭만적으로만 생각할 있는 문제는 아니지만 그래도 거시적으로, 그리고 음모론적으로 경제성장이 모든 국가 행복의 잣대라고 생각하는 이들, 그리고 그 신화에 놀아났던 우중들에게는 분명 중요한 죽비가 될 것이다.
역사적 통찰이 중요한 이유
20세기 들어 질병 뿐 아니라 전쟁도 사라지고 있다. 그동안의 역사에서 전쟁은 당연한 일, 평화는 일시적이고 위태로운 일이었지만 인간의 폭력으로 사망하는 비율이 20세기에는 5%, 21세기 초에는 약 1%로 줄었다. 2012년 세계 사망자 수는 약 5600만 명. 이 중 62만 명이 폭력(전쟁 12만, 범죄 50만)으로 사망, 80만 명 자살, 150만 명 당뇨병으로 사망. 현재 설탕은 화약보다 위험하다.
2010년 기아와 영양실조로 죽은 사람이 총 100만 명, 비만으로 죽은 사람 300만 명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통찰의 시각을 갖는다는 것이다. 세상은 높고 넓은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은 현실을 직시하게 하고 미래를 바른 방향으로 전망하게 한다.
역사학자들이 과거를 연구하는 것은 그것을 반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자본주의의 역사를 말하고 페미니스트가 가부장제 사회의 형성 과정을 공부하고 미국 흑인들이 노예무역의 참상을 기억하는 이유는... 그들의 목표는 과거를 영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서 해방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런 통찰력을 갖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생각했다. 가령, 책의 도입부에 나오는 ‘현대’의 사정은 전에 생각해 본적이 없던 이야기라 놀라운 충격을 주었다. 태어나서 대학생이 될 때까지 계속된 군부독재 정권은 분단을 빌미로 늘 전쟁을 위협하고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물론 전쟁의 위험은 실재하는 것이기도 했고 말이다. 국제적으로 곳곳에서 테러와 국지전이 끊이지 않는 20세기를 관통하였고, 21세기에도 핵전쟁 위협 등이 사라지지 않았다. 공포는 상존하지만 통계로 보면 그 이전 역사 속에서 늘 당연히 여겨졌던 전쟁이 2차 세계 대전 이후로 사라지고 있다니.
민주주의가 유용한 이유
엄밀히 말하면 ‘알고리즘과 데이터가 지배하는 미래 사회’를 예견하고, 경고하고, 대비하라고 촉구하는 것이 이 책을 통해 정말 유발 하라리가 말하고 싶었던 것이었으리라. 하지만 나는 그 불확실함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그나마 그가 말하는 ‘민주주의’에 대해 집중해서 책을 읽는다. 정확히 말하면 민주주의라기보다 자유주의적 인본주의, 즉 자본주의 체제가 갖고 있는 삶의 형태일 것이다. 그는 ‘민중에게 정치적 권리를 부여해야 하는 이유는 독재국가보다 민주주의 국가의 병사와 노동자들이 더 뛰어난 수행능력을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근대에 들어서 전제주의를 벗게 된 게 고작 몇 백 년이다. 실제로야 어떻든 모든 인류가 평등하다고 모든 사람이 입을 모아 말하게 된 게 어디냐. 이럴 때일수록 대중의 민주주의 가치를 드높여야 함을 저자는 말한다. 동의한다. 이제는 계급이 사라진 자리에 부자라는 계급이 이전의 왕권보다, 전제주의 시절의 독재자보다 더 무서운 존재가 되었지만 그리고 그런 부분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지만 그래도. 본질은 어떠하더라도 선언적 민주주의, 절차적 민주주의라도 먼저 세우는 게 어디냐 말이다.
저자가 예견하는 유토피아일까, 디스토피아일까? 상상은 잘 되지 않지만 지나간 과거에 비추어 예상을 해본다면 이렇다. 스마트폰의 세상이 열렸을 때, 사람들은 스티브 잡스를 예찬했다. 놀라운 유토피아가 펼쳐지는 것처럼 생각했다. 나는 조금 과장해서 그가 악마의 화신처럼 느껴졌다. 지금 사람들이 환호하며 경탄하고 경배하는 그 세계가 결국 인간을 옭죌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스마트한 세상이 사람들에게 주는 즐거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결국 사람들을 단절시키고 불행하게 할지도 모른다. 데이터교의 미래도 그럴 것이다. 처음에는 모두 환호하면서 데이터교의 미래 사회의 긍정성을 논하고, 더 발달시키기 위해 모두 힘을 합치고 정책적 지원을 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지만 그런 행동들은 예견된 부정적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부정함으로써 자기합리화하려는 행동에 불과하게 될지도 모른다. 거부할 수 없는 미래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인공지능의 세상, 기후변화의 세상, 데이터 만능의 세상, 전염병 창궐의 세상 등등 예견은 되지만 막을 수도 없고 거부할 수도 없는 세상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