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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을 위하여 - 우리 인문학의 자긍심
강신주 지음 / 천년의상상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1.

이전에 저자의 다른 책인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에 대한 감상을 적으며 다작하는 철학자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한 가지 편견을 드러낸 적이 있다. 이 책을 읽으며 또 다른 편견을 고백해야겠다. 나는 감상적인 철학자 또한 신뢰하지 않는다. 감상주의는 이성적 판단을 방해한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객관적 시선을 가지기 어려운 것도 이 때문이다.

 

감상주의 철학의 대표적 사례가 흔히 인생철학이라 불리는 것들이다. 물론 인생철학에도 분명 주목할 만한 삶에 대한 지침이나 어떤 통찰들이 담겨있고, 또한 이것이 우리 삶에 대한 사유와 성찰을 촉구한다는 점에서 나름 의미 있다는 것도 인정한다. 다만 그러한 사유와 통찰이 도출되기까지의 지난한 과정은 버려진 채 인생철학이 보여주는 아포리즘이나 경구의 감동에만 매몰되어 여기저기 맥락 없이 적용되는 현실을 경계하는 것이다. 철학과와 철학관에 대한 사람들의 혼동이 여기서 비롯된 게 아니었을까.

 

철학이란, 하나의 학문으로서 철학이란, 그것이 설령 인생에 대한 지침이나 통찰이라 하더라도, ‘이렇게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감탄/느낌표의 학문이 아니라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의문/물음표의 학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거칠게 말하자면, 모든 철학자는 회의주의자다. 나는 그런 편견을 가지고 있다.

 

2.

저자는 이 책을 쓰게 된 이유가 김수영을 떠나보내기 위해서였다고 고백한다. 저자에 의하면 젊은 시절, 타인의 오해와 갈등 그리고 그로부터 야기된 고독감에 힘겨워할 때 저자를 위로해준 이가, 그래서 스스로 정신적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었던 이가 바로 김수영이었다고 한다. 그런 김수영을 왜 떠나보내야 하는가. 이제는 더 이상 위로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김수영에 의존하지 않아도 스스로 이겨낼 힘을 갖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는 홀로 설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의 표출. 그러니까 결국 이 책은 저자 강신주의 독립선언인 셈이다.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독립의 조건을 제시한다. 바로 대상에 대한 거리두기다. “사실 김수영에 대한 글을 쓴다는 것은 그에게 거리를 두는 것이다. 아니면 누구든 김수영에게 거리를 두었을 때에만, 김수영에 대한 글을 쓸 수 있다고 말해도 좋다.”(34) 거리두기란 무엇인가. 아버지의 후광 안에 있을 땐 눈부심으로 인해 대상을 분명하게 쳐다볼 수 없다. 거리두기란 그와 같은 후광에서 벗어나 이전에 보지 못했던 부분까지 보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거리두기란 대상에 대해 객관적으로 이해해보겠다는 결심이며, 나아가 그 이해를 토대로 대상을 넘어서보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출이기도 하다.

 

과연 이 시도는 성공했을까.

 

3.

저자가 보기에 김수영은 진정한 인문정신의 구현자이다. 진정한 인문정신이란 무엇인가. 저자에 의하면 진정한 인문정신이란 바로 단독성의 추구. “인문학은 다른 학문과 달리 고유명사의 학문이다”(18)라는 설명에서 알 수 있듯이, 인문정신이란 단순히 일반성에 포섭된 특수성, 다른 것과 얼마든지 교환 가능한 특수성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고유성을 확보하는 일, 즉 자기 스스로 우뚝 서려는 태도이다. 그리고 김수영은 그 누구보다도 단독성을 추구한 사람이었다.

 

단독성이란 다른 그 무엇과도 교환될 수 없으며, 다른 그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다는 점에서 고유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단독성은 남과 비슷해지라는 내적, 외적 압력이나 강요, 혹은 스스로 서려는 자에게 가해지는 온갖 억압에 저항할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결국 단독성을 추구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가해지는 모든 외적 억압과 내적 태만에 끊임없이 온몸으로 저항한다는 것(자유)이고, 이러한 저항을 통해서만 스스로 도는 힘을 얻을 수 있다.

 

저자가 김수영에서 읽은 것, 저자가 김수영에게서 위안을 얻을 수 있었던 것 바로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타인의 오해와 갈등, 고독감에 힘겨워할 때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그게 바른 길이라고 큰 소리로 격려해 주니 말이다. 저자가 김수영을 정신적 아버지라고까지 부르며 열광했던 이유를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4.

그렇다면 김수영의 시와 산문 그리고 그의 삶이 단독성의 추구라는 말로 모두 해명될 수 있을까. 저자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 책은 온전히 이러한 해명으로 채워져 있다. 저자에겐 단독성과 이로부터 파생된 자유’, ‘스스로 도는 힘’, ‘온몸으로 밀고 나가기등의 키워드가 김수영의 글과 삶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실제로 400페이지에 이르는 분량 중 무작위로 아무 페이지나 펼친다고 해도 바로 저 단어들을 만날 수 있다.

 

이는 저자가 철학적 시 읽기에서 보여준 모습, 즉 문득 건져 올린 하나의 통찰 혹은 직관으로 철학자나 시인의 모든 것을 해명하려는 시도와 매우 유사하다. 전작에서 그것이 하나의 강의로 압축되었다면, 이 책에서는 열 개의 강의로 넓게 펼쳐놓은 느낌이다. 물론 단독성이라는 동일한 주제에 대한 열 개의 다양한 변주의 형식으로.

 

김수영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적절한가? 즉 저자는 자신이 목표한 거리두기의 첫 번째 목표를 이루었는가? 나로선 이에 답할 능력이 없기에 수많은 김수영 연구자들에게 책임을 미루고 싶다. 다만 개인적으로 하나의 개념이나 용어로 한 사람 혹은 한 사상을 관통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는 점은 강조하고 싶다. 저자가 이 책에서 풀어내는 김수영을 보면서도 그의 시와 그의 현실이 매우 모순됨을 느낀다. 예를 들어 아내를 때린 날을 언급한 시인 <죄와 벌>을 다루는 부분을 보자. 이 시를 통해 저자는 김수영에게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나약함과 아내보다 우산을 아까워하는 이기심을 극복하려는 의지”(303)를 읽어낸다. 그러나 그 사건에 대한 성찰을 통해 아내에 대한 사랑과 용서도 결국 타인의 시선 때문이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면 왜 그 즉시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나려 노력하지 않았는가. 왜 아내와 헤어지지 못한 채 복수하듯 오입질(<>)을 하거나 술집 여급과의 사랑(<김영태에게 보내는 편지>)에 애타하는가. 나는 잘 이해가 가질 않는다. 혹시 김수영에게는 시가 현실에서 살지 못하는 이상을 실현하는 도구가 아니었을까. 그랬기에 한없이 나약한 삶에 대한 반대급부로 그토록 시에서는 엄격하려했던 게 아닐까. 모르겠다. 어쨌건 애매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5.

두 번째 목표는 어떨까. 저자는 김수영을 넘어서고 있는가. 이 점은 아쉽다. 책 곳곳에서 짙게 느껴지는 정서는 김수영이라는 거대한 존재 혹은 김수영으로 표상되는 어떤 인문정신에 대한 극복이라기보다는 재확인과 추종이다. 물론 거장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먼저 그를 속속들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 거인의 어깨 위에 앉기 위해선 거인의 발밑에서부터 차근차근 기어올라야 하는 법이다. 그러나 저자는 김수영의 어깨를 딛고 서기보다는 품에 안겨 머물고 있는 느낌이다. 김수영으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가려 하기보다는 단독성이라는 통찰을 반복해서 곱씹고만 있기 때문이다.

 

김수영으로부터 단독자가 돼라는 일갈을 들었다면 그 다음 우리가 질문해야 할 것은, 왜 단독성을 지향해야만 하는지, 도대체 어떻게 하면 단독성을 확보할 수 있는지와 같은 구체적 물음이다. 그러나 저자는 그 이유와 방법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혹은 온몸으로 밀고 나가라거나 모든 억압에 저항하라와 같은 추상적 답변만 제시할 뿐이다. 어쩌면 그 대답 역시 누구의 가르침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깨달아야만 하기 때문일까.

 

또한 김수영의 외침은 자기 성찰이라는 측면에서는 큰 가르침을 줄지 모르지만 타인과의 관계에 대해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혹은 김수영에게 타자란 단지 자기 성찰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김수영이나 저자나 모두가 시인이어서 시가 필요 없는 세상’, ‘자유로운 인간들의 공동체를 꿈꾸지만 이를 위해 요구되는 것은 구성원 각자의 자기 성찰뿐이다. 사회를 이루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타인과의 관계를 버려둔 채 자신에 몰두하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는 일종의 자폐적 철학이 아닐까.

 

6.

물론 저자의 의도는 무엇보다도 지금 이 시대에 김수영의 정신을 다시 회복하는 것일 테다. 저자가 느끼기에 김수영 이후 반세기라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김일성 만세>를 외치며 지적했던 현실에서 단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했기에 김수영 정신의 회복은 더더욱 중요한 일일 것이다. 그렇기에 이 책이 저자의 독립선언임에도 불구하고 <강신주를 위하여>가 아니라 <김수영을 위하여>인지도 이해된다.

 

그러나 우리가 김수영 철학의 추종자나 아류로 남지 않고 마침내 넘어서기 위해서는 그의 철학으로부터 파생되는 다양한 질문들을 제기하고 답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질문되지 않는 철학은 단지 종교일 뿐이다. 김수영 정신의 회복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끊임없이 김수영에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 저자의 다음 책이 그러한 질문과 대답이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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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개미 2012-06-07 0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변주곡이라는 단어 이번 서평에 꼭 넣고 싶었는데 먼저 사용하셨군요...솔찍히 이렇게 길게 쓸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로 동어반복적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한편으로는 우상을 대치한 그 자리에 또 다른 우상이 자리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구요. 뭐 비평하자면 많은 것들이 있겠지만, 그래도 진정성이랄까 뭐랄까 독립된 개인으로 열심히 살아보려는 저자의 노력이 엿보여서 아쉬운대로 긍정적인 평가로 리뷰를 마무리 하고 있는데...(다들) 너무 잘 써놓으셔서 부담되네요ㅋ 여튼 훌륭한 리뷰 잘보고, 감탄하고 갑니다.

nunc 2012-06-07 05:04   좋아요 0 | URL
앞에서 밝혔듯이 다소 편견을 가진 데다 호평 일색이라 이런 감상도 하나 있어야 할 것 같아 망설이지 않고 올렸네요. 이것저것 해보고 싶은 얘기가 더 많았지만 정리도 잘 안 되고 너무 길어지는 것 같아 이 정도에서 멈췄지만, 다시 읽어보니 여기저기 고치고 싶은 부분이 많네요. 부족한 글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일개미님께서 쓰실 좋은 리뷰도 기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