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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 - 사랑과 자유를 찾아가는 유쾌한 사유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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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평가단의 첫 리뷰 도서로 강신주의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이 선정되었을 때 조금은 실망했다. 평소 흥미 없던 저자의 책을 ‘읽어야만’ 하는 일이 별로 탐탁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무슨 책이든 읽는 것이 안 읽는 것보다는 좋을 것이고, 또 누군가의 권유로 관심 없던 책을 읽다가 선입견이 깨지는 경우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수없이 널려 있는 관심 도서를 두고 다른 책을 ‘어쩔 수 없이’ 읽어야 하는 일은 아무래도 시간낭비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선뜻 즐겁지 않았던 듯싶다.

왜 강신주라는 저자에 관심이 없었을까. 강신주는 최근 2~3년 동안 예닐곱 권의 많은 책을 쏟아내고 있는 철학자다. 다작이 그 자체로 흠결이 될 수는 없겠지만, 개인적인 선입견으로 인해 철학자의 다작은 일단 의구심을 가지고 쳐다보게 된다. 철학적 사유의 깊이나 통찰력이란 것이 그렇게 빠른 시간 내에 업데이트 될 수 있다고 믿지 않기에, 철학자의 다작이란 결국 자신이 깨달은 하나의 통찰을 이러저러 변형된 버전으로 반복하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강신주의 책에서 다뤄지고 있는 철학자들은 고대와 현대, 동양과 서양을 가리지 않고 온갖 철학자들이 망라되고 있는데, 이 경우 각 철학자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가 되기보다는 마치 ‘수능완전정복 100제’와 같이 철학사에 대한 요약정리가 될 수밖에 없고, 그렇다면 차라리 같은 가격의 철학사 책을 사서 차근차근 읽어보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책을 읽기 전 이러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도 책을 읽어야만 하기에 이 책의 쌍둥이 형인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까지 구입해서 차분히 읽어보았다. 그리고 두 권을 모두 읽고 나서 느낀 점은, 나의 선입견이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책에 대해 간단히 소개하자면 두 권을 합쳐 각각 서른다섯 명의 시인과 철학자가 소개되고 있다. 각 장은 모두 동일한 구성을 이루고 있는데, 한 장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첫 부분에선 시인에 대한 소개가, 두 번째 부분에선 철학자에 대한 소개가,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선 두 사람의 결합이라는 형식을 띠고 있다. 즉 시인의 시를 읽고 촉발된 사유가 어떤 철학자의 개념으로 이어지고, 그 철학자의 개념을 보다 면밀히 살펴 본 뒤, 이를 다시 시의 이해에 적용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구성은 상당히 매력적이다. ‘철학이란 것이 도대체 어디에 써먹는 것이냐’라고 묻는 이들에게 그 구체적인 사용방식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시가 되었건 TV프로그램이 되었건 아니면 일상에서 벌어진 우연한 사건이 되었건, 우리가 보고 느끼고 생각한 것들에 대한 성찰의 과정으로서의 철학의 의미를 명료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모든 과정이 차분하고 꼼꼼하게 풀어져나가기보다는 너무 성급하게 진행되고 마무리 된다는 것이다. 이는 아마도 이 책 자체가 대중강연용 원고로 작성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일주일이라는 짧은 준비 시간 혹은 한 시간정도라는 한정된 강연 시간 내에 모든 것을 끝마쳐야 하기에 논리적 비약이나 어설픈 연관성을 눈치 채고도 어쩔 수 없이 마무리 지어야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를 책으로 다시 펴낼 때에는 강연에서 못 했던 얘기들이나 빈약한 부분들을 충실하게 채워 넣는 수고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강연이야 질문 시간을 통해서 의문을 해소할 수 있지만, 책은 그럴 수 없기에 보다 친절하고 차분한 설명이 추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매 장 당(혹은 매 강연 당) 한 명의 시인과 한 명의 철학자라는 구성을 지키려다보니 시나 철학 개념에 대한 꼼꼼한 분석과 논리적 연관성보다는 ‘얼핏 유사한 부분이 있다’는 식의 인상 비평에 그치게 되거나 아니면 철학자의 사상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시에 끼워 맞추는(혹은 그 반대의 경우도) 식이 되고 마는 경우도 생길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채호기와 맥루한에 대한 내용을 보자. 채호기 시인의 시는 사랑하는 사람의 전화에 전전긍긍하는 인물을 다루고 있고, 저자는 여기서 매체가 우리의 사랑에, 즉 우리의 삶에 영향을 끼친다는 점에서 맥루한을 떠올리게 된다. 이는 그럴듯한 연상이다. 그러고는 곧 핫미디어와 쿨미디어에 대한 맥루한의 구절을 인용한다. 맥루한이 말한 핫미디어란 주어지는 정보량이 고밀도여서 이용자의 참여도가 낮은 미디어를 말한다. 당연히 쿨미디어는 그 반대의 경우이다. 그런데 여기서 저자는 이용자의 참여도를 단순한 ‘상상력’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

“당연히 사진을 본 사람이 사진에 자신의 상상력을 부여할 여지가 별로 없습니다. 그저 사진가가 찍은 그대로를 받아들이면 되는 거지요. 그러니 ‘뜨거운 미디어’인 겁니다. … 반면, 만화는 사진에 비해 정보량이 적은 ‘저밀도’의 미디어입니다. 정보량이 적으니까, 우리는 상상력을 발휘하면서 만화를 읽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개입할 여지가 많기 때문에 만화는 뜨겁지 않은 미디어, 즉 ‘차가운 미디어’라는 겁니다.”(137)

이처럼 참여도를 단순한 ‘상상력’으로 이해하다보니 전화가 쿨미디어인 이유도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기 때문이라고 이해한다.

“맥루한이 앞에서 말했듯이 “전화는 차가운 미디어, 혹은 저밀도 미디어”입니다. 다시 말해 전화 통화만으로 우리는 상대방이 내게 느끼는 감정의 정확한 속내를 쉽게 파악할 수 없다는 겁니다. 정보량이 너무 적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전화로 들려오는 애인의 목소리를 듣고 우리는 오만가지 상상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당연히 이 경우 상상력은 청각적이기보다는 시각적일 겁니다.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혹시 목욕을 마친 섹시한 모습일까? 아니면 지금 다른 사람의 품에 안겨서 전화를 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수많은 상상이 가능한 것은 전화라는 미디어가 단지 소리만을 들려주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시각을 포함한 나머지 감각들은 상상력과 결합해 작동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142)

다시 말해 전화가 쿨미디어인 이유는 그것이 우리에게 청각적 정보라는 빈약한 정보만을 전해주기 때문에 시각적 상상력이 작동할 수밖에 없고 이용자의 참여도가 증가할 수밖에 없다는 식의 설명이다. 그러나 단순히 이렇게 이해한다면 저자가 인용한 구절 바로 뒤에 나오는 문장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저자가 의도적으로 생략했는지 모르겠지만, 인용구는 “당연히 라디오 같은 뜨거운 미디어는 전화 같은 차가운 미디어와는 매우 다른 영향을 미치게 된다.”라고 덧붙인다. 저자의 방식으로 이해한다면 라디오도 청각적 정보만 주어지는 매체이고, 우리는 라디오를 들으면서 오만가지 시각적 상상을 펼 수 있기 때문에 쿨미디어야 하는 게 아닐까. 맥루한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어떤 것을 읽을 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인쇄된 말에 소리를 집어넣는다. 그리고 라디오를 들을 때 무의식적으로 소리를 영상화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전화 통화를 하고 있을 때에는 왜 시각화할 수 없는가? 독자는 곧 이렇게 반론할 것이다. <천만에, 나는 전화를 걸면서 보고 있다!> 그러나 신중하게 검증해 볼 기회가 있다면, 전화 통화를 하면서 시각화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 전화는, 글로 씌어지고 인쇄된 책자와는 달리 완전한 참여를 요한다. … 많은 사람들은 전화 통화를 하면서 <낙서>하려고 한다. 이런 현상은 전화 미디어의 본질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즉, 전화는 우리는 모든 감각과 기능의 참여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냥 틀어놓고 다른 일을 볼 수 있는 라디오와 달리, 전화 통화를 하면서는 그럴 수 없다. 전화가 제공하는 청각 이미지는 아주 빈약하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모든 감각을 동원하여 그것을 메우고 완전한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미디어의 이해>, 민음사, 371~372)

즉, 전화가 쿨미디어인 이유는, 청각적 정보라는 한정된 정보를 메우기 위해 시각적 상상력을 키우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전화를 하면서 귀와 입, 그리고 손과 같은 여러 가지 감각과 신체 기능을 극대화하기 때문인 것이다. 저자가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혹시 목욕을 마친 섹시한 모습일까?’와 같은 전화를 통한 시각적 상상력에 주목한 이유는 아마도 채호기의 시가 가지고 있는 사랑에 빠진 자의 애절함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맥루한을 설명하는 적절한 예가 되기 어렵다.

더 나아가 맥루한이 ‘미디어는 메시지이다’라고 했을 때의 의미, 즉 각각의 미디어가 인간의 삶에 미치는 서로 다른 영향이라는 측면을 고려해 보았을 때도, 채호기의 시는 적절한 사례가 되기 어렵다. 채호기의 시에서 전화를 편지나 카톡, (컴퓨터) 메신저 등으로 바꾸어도 그 정서는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시에서 단지 전화라는 매체를 다루고 있다고 해서 이를 맥루한과 연결시키는 것은 너무 자의적인 해석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다른 철학자들에 대해선 아는 게 적기에 꼼꼼히 따져볼 능력이 안 되지만, 읽다가 문득 의문이 드는 부문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의 미덕이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니다. 평소 시에 관심 있던 이들은 시를 이해하는 새로운 방식을 얻을 수 있을 테고, 평소 철학에 관심 있던 이들은 자신이 선호하는 사상을 시나 소설 혹은 다른 무엇을 가지고든 쉽게 풀어나가는 법을 배울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평소 이해하기 어려웠던 시나 철학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단초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이 책을 통해 몇몇 흥미로운 철학자들의 목록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이 책의 목적이었을까. 단순한 소개와 흥미유발이 목적이었다면 어느 정도 성공한 듯하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만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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