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녘에 깨었다가 다시 잠들면 꼭 꿈을 꾸곤 하는데 오늘 꿈은 정말 다국적인데다 '대체 왜!'스러워서 한번 적어보려 한다. 물론 낮부터 꿈얘기를 한 미잘의 영향이 지대했다. 

 일이 끝난 후에 마트에 들렀다. 딱히 살 것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들어가서 얼마 안 있자 한무더기의 갱스터들이 마트 안으로 들어왔다. 현실에선 이런 상황이래도 늘 나와는 닿는점이 없었다. 풍경처럼 사람들이 있을 뿐이고, 말을 건네거나 나를 알아보는건 도인이나 종교인이 다였다. 그런데 그들은 어슬렁거리며 가게를 돌아다니다 곧장 내게로 다가왔다. 동양 사람을 처음 보는걸까? 설마 내게 오는건 아니겠지. 내쪽에 있는 물건을 보려는거야. 한발짝 뒤로 주춤거리며 움직이자 그들이 다가오는 속도가 빨라졌다. 억양이 센 영어로 그들은 내게 뭐라고 말을 했다. 그 중 몇몇은 내 물건이나 옷을 툭툭 치기 시작했다. 그때의 내 차림은 할리우드에서 저개발 나라의 사람을 등장시킬 때 고답적으로 코디하는 모습 그대로였다. 나는 계속 영어를 못하니까 놔주라고,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며 저항을 하며 그들을 피했다. 그리곤 간신히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다음 장면으로 점프. 내 꿈은 대개의 경우 별다른 연관없이 다음 장면이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예전에 살던 집에서 자려고 누웠는데 누군가 창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고 보니 좀 전 장면에서 나왔던 무리들 중 한명이 다정한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왜 좀 전에 나를 괴롭혔냐고 묻고 싶었지만, 영어가 안 됐다. 그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연인 사이이고, 밤마다 그는 창을 넘고 있었던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섹스를 했던건 잘 떠오르지 않는다. (외국인과 섹스를 해봤어야 꿈이라도 뭐가 좀 떠오르지. 어흥?) 잠자코 그의 까만 피부에 얼굴을 파묻고 몸이 참 따뜻하다며 좋아하고 있는데 밖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기미를 살피니 아빠와 아빠의 친구들이 분명 여기에 그 녀석이 있을거라며 집을 들쑤시고 다니고 있는 것이다. 

 그 녀석이 바로 내 옆에 있는 사람인지는 확인 안 됐지만, 남자는 본능적으로 도망쳤다. 빛나는 까만 몸이 창문을 넘어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아빠가 찾는 사람이 누구냐에 상관없이 한밤중에 다른 무리들이 내 방을 침범해 들쑤실게 분명한데 남자를 태연하게 내 옆에 둘 배짱이 없었다. 아마 그가 튀지 않았다면 내가 그에게 도망치라고 말했을 것이다.  

 내 방에 들어선 아빠와 친구들이었던 사람들이 친척들로 바뀌고, 누구를 잡는게 아니라 사냥을 한다는식으로 분위기는 다시 점프. 두꺼운 이불을 덮어놓은 여러개의 무덤 모양의 구조물이 마당에 있고, 누군가 그 중 하나를 겨냥했다. 그가 어디로 숨었는지는 몰랐지만 난 그의 안위가 걱정돼 엉성한 말들로 방아쇠를 당기는 시간을 늦췄다. 옆에 사람은 긴장을 주려고 너무 감질나게 하는거 아니냐고 농담을 던졌다. 난 옆에 있던 총을 뺏어서 입을 나불댄 사람을 쏘고 싶을 정도로 그 사람이 얄미웠다.  

 방아쇠는 당겨졌다. 사람들은 느릿느릿하게 걸어가 이불을 걷어냈다. 내가 걱정했던 남자가 아니었다. 아무도 아닌 사람, 혹은 우리 중의 누군가를 좋아했으나 실연당한 여자가 피철갑된채로 죽어있었다. 사람들이 경악해하며 대체 여기에 왜 사람이 있냐는 식으로 떠드는 틈을 타서 남자는 이불을 걷어내고 까만 점을 남기며 도망쳤다. 남자가 살아서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대체 이 여자는 이 늦은 밤 왜 이 청승을 떨다 결국 죽게되어버렸는지, 이불을 덮고 싶을 정도로 추운 날이었으면 그냥 집에 있지 싶어서 맘 한켠이 답답해졌다. 그런데 이 여자, 집은 있는거야?

 사람들은 시체를 숨긴다거나 죽음을 은폐해야한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다. 죽어서 싸다느니, 재수가 없었다느니 등등의 아무런 말도 없이 계속 그녀 주위에서 웅성웅성거렸다. 그 소리는 꼭 내게 하는 소리인 것만 같았다. 

 꿈이 너무나도 버라이어티해서 늦잠을 잤고, 세수도 안 하고 일하러 나갔다. 세수야 가끔씩 안 한다지만, 대체 무슨 꿈이 이래. 개꿈이라면 개가 나와야하는게 아니냐고 어처구니 없는 소리를 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 

  프로이트, 거기 있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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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리풀말미잘 2009-04-27 1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쳇 따라쟁이.

Arch 2009-04-28 03:58   좋아요 0 | URL
남이사. 아, 이 말 해보고 싶어서 어찌나 애가 타던지.

뷰리풀말미잘 2009-04-27 23:16   좋아요 0 | URL
울컥
 
성노동 - Sex Worker 여이연이론 14
여성문화이론연구소 성노동연구팀 엮음 / 여성문화이론연구소(여이연) / 2007년 10월
평점 :
절판



 일명 '토킹바'에 다니는 언니가 있다. 토킹바란 외국인을 상대로 대화를 하며 그들이 사주는 술로 돈을 버는 곳을 말한다. 토킹바의 스킨쉽 수위는 개개인마다 다르고, 일명 2차를 나가는 분들도 있다지만 대개의 경우 2차 나가기 싫어서 토킹바에 나간다는게 언니의 평소 지론이었다. 그래서 그런가보다 했다. 정말 2차를 안 나가는지, 언니가 돈없는 동남아시아 사람들보다 더 값어치 없다고 여기는 한국 남자들과 외국인은 얼마나 다른지, 원해서 자는거랑 남자가 비싼술을 샀기 때문에 자는거랑 어떻게 구별이 되는건지, 호텔에서 가끔 얻어먹는다는 점심은 어떤지 궁금했지만 워낙에 새침한 분이라 따로 꼬치꼬치 물어보진 못했다. 언니 말대로 싼티날까봐.

 얼마 전엔 언니랑 치안상태 어쩌고의 얘기를 하다가 HOOKER거리로 화제가 급전환되었는데 말의 내용과 분위기가 상당히 불편했다. 마치 자기 입에 그런 얘기를 올리기라도 하면 품격(그런게 있다면)이 손상될 것 같다란 인상이었다. 옆에 있던 같은 바에 다닌다는 언니가 자신이 어쩌다 HOOKER들을 본적이 있는데 대단히 괴상하게 생긴데다 인간으로서 결격사유가 다분해보인다는 얘기를 거들 즈음에는 웃기려는 수작인지 정말 그렇게 믿어서 말하는건지 판단불가 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제서야 대체 토킹바에서 일하는 것과 매춘을 하는게 뭐가 다르다는건지, 성적인 서비스를 파는건 같은건데 한쪽은 특정화된 성적 기관이란 것과 다른 쪽은 아니란 이유로 구별이 된다는건 어떤 논리인지 구분이 안 됐다. 게다가 왜 성적 서비스를 파는 입장에서 더 집요하게 다른 층위의 사람을 그토록 배척하는지, 그렇다고 달라보이는게 있는건지 궁금해졌다.

 내가 여성주의에 관심을 갖는건 바로 이런 의문에서 출발한다. 뭔가 불편한 느낌, 논리적인 설명까지 바라는건 아니지만 납득 안 가는 상황이 왜 그리 왕왕 출몰하는지에 대한 의문, 나란 사람의 정체성에 관련된 문제, 어쩌면 소위 말하는 여성스럽지 않은 자의식에 대한 몸부림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너무 몰랐고 여전히 모르고 있으며 앞으로도 치열해지지 않는한 뜬금없이 멍청한 질문만 쏟아낼게 분명하다. 그렇지만 적어도 '왜'에 대한 좀 더 치열한 사람들의 얘기를 듣고 나를 돌이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란 생각이 들었다. 혼자 생각하는건 늘 그렇듯이 같은 자리에서 뱅뱅 도는 느낌만 줄 뿐이고, 알려고도 하지 않고서 명백해지기를 바라는건 쉽게 흥분만 일삼아 민폐를 끼치는 것만큼이나 터무니없으니 말이다.

 이 책, 성노동을 읽으면서 평소에 궁금했던 섹슈얼리티의 문제들이 명백하게 해결되진 않았다. 도리어 어느 정도 수준에서 아프지않게 따먹을 수 있는 맛있는 앎이 아니라 직접 생활 가운데서 뒤뚱거리며 생각해야할 문제들이 속속들이 드러나면서 점점 생각의 입지가 좁아져 암담해질 정도였다.

 책을 읽기 전에는 성매매, 성노동에 대해서 그들의 노동자성은 인정해줘야한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정확하게 기억 안 나는 어느 나라의 합법화로 조직적인 매춘업소의 등장했다는 소식을 접한데다 인신매매의 문제, 낙인은 합법화만으로 해결이 안 된다란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옴쭉달싹도 못하고 독 안에 갇힌 기분이 들었다. 노동자성을 인정하는 문제와 가부장적 구조로 인한 성별위계에 대해 고민해야하는 것을 따로 떼어놓고 보지 않았고, 뉴스가 절대적으로 팩트만 전달한다는 믿음에 문제가 있었다란 것을 책을 보고서야 알게 되었다.

 '성노동'은 성노동의 정치화를 통해 그간 성노동을 일컫는 말들의 정치성과 강제와 자발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실천적 쟁점을 도출한다. 또한 섹슈얼리티의 위계와 낙인의 문제- 성별전환인들의 성노동에 대하여 알아보고 비범죄화와 합법화의 진실과 오해에 대해서도 살펴본다. 각국의 성노동 관련법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며 나아가 성매매특별법에 성노동자들이 저항하는 이유와 앞으로의 쟁점과 방향을 다루고 있다. 책을 통해 그물망처럼 이어지던 생각들의 연결고리는 단단해졌고, 앞으로의 문제시되는 사안에 대한 적절한 해석할 수 있는 힘도 기를 수 있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선 성매매특별법을 계기로 보호라는 미명 아래 매매춘은 불법이라는 여성계의 입장과 성노동 여성의 생존권 충돌로 성노동자 운동이 촉발되었다. 주류 여성계(과연 이런 말이 있다면)가 한무더기로 몰려 공격을 받고, 각계각층의 목소리들이 튀어나와 여성운동이란 것이 어떤 것에 초점을 맞춰야하는지, 성노동자와 일반 여성을 구분지으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건 아닌지, 대체 성거래는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까지 정리되지 않았지만 충분히 공감가능한 의견들이 제시되었다. 그런 와중에 성노동자의 권리를 인정하고 논의를 진행하려는 여성문화이론연구소 성노동연구팀에 의해 이 책이 만들어졌고, '상식 밖'이 아니라 실은 몰랐던 일들을 알 수 있는 지점이 마련되었다.

 성노동 운동은 성별위계가 철저한 가부장제 사회에서 편향된 사고에 생생한 균열을 내는 사안이다. 다른 선택이 있었다면 성노동을 했겠냐느니, 쉽게 돈을 벌며 사치를 하려고 성노동을 한다느니, 국가가 집장촌을 관리하지 않으면 성병이 만연된다느니(옮겨다니는 사람들은 누군데?) 성판매의 비범죄화로 성의 상품화와 성산업이 확장된다느니 오해와 편견은 끝이 없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대개의 직장인들이 이곳이 아닌 다른 곳을 꿈꾼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신의 직업에 그다지 만족하지 않는 것을 볼 때 성노동에 한해서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란 의문부호를 떠올려야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쉽게 돈을 번다는 언설도 이해가 안 되는게 그동안 여성들이 해왔던 노동, 특히나 가사에 대해선 아무런 금전적인 이익이 없었다. 설마 이 부분에 대해서 가족들을 위하는 것에 돈 운운은 너무 가혹하다란 입장이라면 가사 노동의 다른 형태인 세탁소나 음식점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가사뿐만 아니라 간호사나 서비스직의 여성들이 감당하는 육체적 노동뿐 아니라 감정 노동의 측면은 늘 저평가 받아왔다. 성거래가 어떻게보면 감정노동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다는 정희진의 말을 놓고 볼 때도 이 일이 쉽지만은 않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꼭 경험해봐야하는 당사자성의 문제뿐 아니라 다른 직업에 대해 쉽다, 어렵다를 나눌 수 있는 기준이 오래 공부를 해서 어렵게 그 일을 시작했느냐의 여부라는 생각은 좀 터무니없다란 입장이다. 쉽게 돈을 벌어서 사치를 하고 싶어하는건 노동의 댓가를 통해 사람들이 추구하는 방향성에 관한 문제이지, 이것이 도덕적으로 지탄받아야하는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국가의 관리라 일컬어지는 합법화는 여러 가지면에서 모순을 보이고 있다. 국가에 등록해서 규제를 받는 것은 세금을 내야하고, 지정허가제를 운영하고, 개별 매춘인 등록제의 실시, 건강검진을 필수적인 요건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국가는 제일 큰 포주라는 말이 아니더라도 국가는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쪽으로 권력을 넓혀갈게 분명하다면 성노동자의 사생활이나 시민권은 보호되지 않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이점은 독일의 합법화 논의를 통해 알 수 있다. 따라서 성판매를 성병의 온상처럼 규제해야한다는 입장은 성노동자의 인권문제뿐만 아니라 잘못된 선입관과 성구매자의 성병 여부에 대해선 아무런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지점에서 잘못됐다.

 비범죄화를 통해 모든 통제로부터의 자유를 쟁취한 네덜란드의 입장은 괄목할만하지만 시작으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지 해결책이나 성노동 운동이 도달해야할 지점으로 보이진 않는다. 내가 앞서 언급했던 대규모 성판매업소의 등장이란 뉴스 등 익숙하지 않은 방법, 사람들의 시야에서 벗어난 일들에서 느끼는 우려는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제대로된 연구없이 관습적이 사고를 토대로 비범죄화를 이룩한 성노동자의 권리를 깎아내려하거나 인신매매를 이유로(자발과 강제의 경계는 분명히 구분해야함에도 불구하고) 다시 합법화나 보호해야한다는 입장이 불거져나오는 것을 보면 말이다. 따라서 비범죄화를 시작으로 성별위계질서의 균열을 일으키고 적극적으로 성노동자의 노동성을 인정하는 운동이 추진되어야 한다.

 앞서 언급했던 언니의 경우, 자신은 HOOKER가 아니므로 깨끗하단 입장이었지만 비로소 난 좀 더 제대로 그녀를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성애화된 노동을 파는 입장에서 언니나 성노동자는 별반 다를게 없다. 굳이 다른걸 찾는다면 성기결합을 한다는 '여성으로선 치욕적인(대체 왜?)'낙인과 깨끗한 여성에 대한 판타지만 존재할 뿐이다. 감정노동의 대부분을 여성이 맡고 있고, 좀 더 부드러워질 것을 요구받는 사회에서 사는한 나와 다른 여성들간의 경계, 성노동자와의 경계도 그다지 다를 것 같진 않다. '성노동'은 나와 다른 사람의 경계를 들여다보고, 그 안과 밖에서 사유할 수 있는 힘을 줬다.

 여성주의는 공부하면 할수록 더 갈증이 나고, 더더욱 모르겠는 학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주의에 대해 알아가고 내 삶과의 접점을 확인하면서 난 좀 더 '나다움'에 다가가고, 좀 더 행복한 선택을 내릴 수 있으리라는 것을 믿는다.


 성노동이나 여남 문제에 관심을 갖는 분들 뿐만 아니라 자신이 너무 도식적으로 사고하는게 아닐까란 생각이 드는 분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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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9-04-26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Arch님 글 덕분에 책을 읽어보고 싶어져서 보관함으로 옮겼습니다. "감정노동의 대부분을 여성이 맡고 있고, 좀 더 부드러워질 것을 요구받는 사회에서 사는한 나와 다른 여성들간의 경계, 성노동자와의 경계도 그다지 다를 것 같진 않다. '성노동'은 나와 다른 사람의 경계를 들여다보고, 그 안과 밖에서 사유할 수 있는 힘을 줬다"는 말씀에 더욱 책에 관심이 갑니다.

Arch 2009-10-13 12:56   좋아요 0 | URL
람혼님 반갑습니다. 무척^^
성노동을 인정한다란 입장에서 시작해서 대체 성판매, 성구매가 왜 있는지에 대해 여러가지로 정리를 해야하는데 리뷰라기보다는 페이퍼 성격에 더 가까운 것 같아요. 그래도 저 덕분에 책을 관심있게 봐주셔서(내가 인세 받는 것도 아닌데) 고맙습니다.
 

 나는 매일 엘의 블로그에 들어간다.  

 그녀의 일기는 몇개월째 이 문장으로 시작한다. 

 들어간다의 시제가 일기를 쓰는 시점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고, 설레임의 강도가 클 경우에는 각각의 단어나 글자 뒤에 점이 깊게 새겨지기도 한다. 그녀는 까먹지않고 밥을 먹듯이 엘의 글을 탐독했고, 엘을 탐구했으며, 엘을 탐했다. 

 엘은 공공연히 자신은 게으르다고 글에 썼지만 매일 블로깅을 할 정도로 부지런하고, 대개의 언어에서 툴툴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지만 누구보다 자신의 삶을 아끼고 좋아한다. 엘은 자신이 괜찮게 생겼다고 생각하는편은 아니지만 누군가로부터 잘생겼다란 소리를 들으면 부인하지 않는다. 엘은 혼자 고민하길 좋아하며, 고민하는 와중에 종종 번뜩이는 색채의 생각들을 풀어놓기도 한다. 그리고 엘은 무의식적으로 사람들을 웃긴다. 

 그녀는 엘의 유머를 좋아하고, 엘이 짤막하게 다는 댓글을 아낀다. 엘이 어떤 사람인지 몇년간의 글을 읽어보며 알 수 있었고, 엘의 관심사, 엘의 취향, 엘의 옷스타일까지 조금씩 알게 되었다. 사실 스치듯이 몇번 본적이 있기도 하다.  

 늦은 밤, 그녀가 텅빈 방안에 몸을 뉘이면 문득 방안 구석에서 형광광물처럼 반짝이는 엘을 보기도 한다.  

 요즘 엘은 배가 나와서, 일이 너무 늦게 끝나서, 연애감각이 이토록 터무니없이 죽어버려서 속상하다고 해서 그녀의 맘을 싱숭생숭하게 만들었다가 새로 나온 누군가의 신보 때문에,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가 옆동네 살아서, 봄꽃들이 아우성치며 맘을 들뜨게 한다고 해서 그녀의 맘을 두근거리게 했다.  

 그녀는 엘에게 살짝 얘기해줬다. 

- 난 너보다 더 당신을 잘 알 것 같아요. 

 며칠 뒤에 엘은 자신도 그녀를 쭉 지켜봤다며 매화꽃이 지기 전에 보자는 말을 남겼다. 

 약속 당일, 그녀는 세상에저 제일 예쁜 드레스를 입고 향수를 통째로 들이부었다. 행여 엘이 감기라도 걸려 냄새를 못맡을까봐. 그녀는 작은 거울 사이로 어느때보다 빛나는 얼굴을 바라봤다.  

 조금 힘들게 약속 장소에 나가 그를 기다렸다. 그가 저만치 오고 있었다. 벤치에 단정하게 앉아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가 벤치에 앉았는데, 어, 어, 제 위에 앉으면 어, 

 엘은 벤치에서 한참동안 그녀를 기다렸다. 참다못해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받지 않는다. 해가 지도록 그녀를 기다리다 지친 엘은 자리를 떴다. 벤치에는 먼지처럼 찌부러진 그녀의 잔해가 남았고, 바람이 불었던가, 먼지는 날아가버렸다. 

 난, 

 당신의 관심사, 당신이 즐거워하는 일, 당신이 분개하고 맘 아파하는 일들에 공감하고 당신의 글을 읽는걸 좋아해요. 아주 많이! 그 중에서도 당신의 오늘 하루는 어땠는지, 가끔씩 적는 당신 얘기가 무엇보다 더 좋아요. 

그건 마치, 

사랑스럽달까. 

 그러니까 어디 도망가지 말고, 쭉 글을 써주세요. 전 호기심이 많고, 해보고 후회하는 스타일이지만, 우린 블로그 연애니까 그녀처럼 감히 만나자고 말하진 않을거예요. 게다가 저도 좀 작아요. SM이라고. (정말? 정말. 이렇게 사심을 툭 던지다니! 미련한 아치같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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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9-04-24 0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글도 봄이군요 ^^
 

아치 이모 잘 지내 

집에 와서 지희랑 가치 놀아줄거지 이모 

편지 만이 보낼게.  

사랑해 알랴뷰 

그림 이모 엄마 

 (옥찌가 날 지 엄마보다 더 이쁘게 그렸다. 아 유치해. 유치해.) 

아프지마 겅강해 

지희가 

 무려 세번의 편지와 앙탈 끝에 받아낸 옥찌의 답장. 동생도 웬만하면 이모에게 편지 하나 보내라고 말을 해도 도통 듣지 않던 녀석이 며칠 전에 크레파스로 그림까지 그려선 편지를 보내줬다. 아침에 우편함에 꽂힌 편지를 읽으며 내리막길을 내려가다 엉덩방아를 찧었지만 사정없이 기분이 좋았다. 사진도 찍어서 살짝 접어 서재에 올리고 싶지만 사진기가 없다. 아, 자랑하고 싶어서 근질거려. 자식 자랑하는 부모는 팔푼이라던데 조카 자랑하는 나는 그냥 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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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9-04-23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유, 자랑할 만해요! 이쁜 녀석들!

Arch 2009-04-23 19:02   좋아요 0 | URL
히히~ 제가 아치라서.
 
야옹이가 제일 좋아하는 색깔은? - 0~3세 세계의 걸작 그림책 지크 34
제인 커브레라 지음, 김향금 옮김 / 보림 / 199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여기 귀엽고 앙증맞은 고양이가 있어요. 이름은 따로 없고, 그냥 야옹이래요. 누군가가 야옹이에게 물어요. 넌 이 색을 좋아하니, 아니면 저 색을 좋아하니. 한참동안 여러가지 색들이 뭉텅이로 눈에 보이지만 야옹이는 다 별로래요. 이렇게 까다로운 야옹이라니. 강아지에게 묻는게 좋겠단 생각은 잠시 참아주세요. 아직 야옹이에게 더 물을게 있거든요. 마지막 장을 펼치면 야옹이가 좋아하는 색이 나오는데, 그때서야 아, 야옹이의 까다로운 안목이 결코 괜한게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을거에요.  

 그 색은 진짜니까요. 

 이 책은 아마 다른 알라디너의 서재에서 보고선 리뷰가 너무 좋아 보관함에 넣어뒀다가 옥찌에게 사줬던 것으로 기억한다. 3살 정도의 아이에게 읽어주면 좋겠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지금은 옥찌가 물고 찢어서 거의 너덜너덜해진 수준이지만 지금 읽어도 여전히 좋으니까. 물감으로 쓱쓱 그린듯이 투박한 그림이 원색으로 펼쳐지면 옥찌랑 나도 정말 야옹이가 좋아하는 색은 뭘지, 여러번 읽어서 어떤색일지 뻔히 알면서도 첫장을 넘길때면 마치 처음 본 듯이 설렌다.  

 아이들은 원색을 좋아한다고 하지만 잘 믿지 않았다. 이렇게 말하니까, 다이어트 감량 선전 같다. '처음엔 저도 잘 믿을 수 없었어요, 그런데 몇달 써보니'로 시작하는. 그런데 정말 좋아한다. 특히 정말 파랗고, 정말 빨간 색들이 쑥쑥 튀어나올때면 옥찌가 손뼉을 치며 당장에라도 색을 삼킬듯이 환호했다. 아이가 좋아하면 나는 점점 말소리를 낮추거나 높이며 정말 야옹이는 무슨 색을 좋아할지 궁금해서 못견디겠단 포즈를 취하는데 옥찌는 이모의 과장이 하나도 어색해지지 않을 정도로 좋아해준다. 내가 이 책을 좋아하는건 동화책을 읽어주는 사람을 즐겁게 하려고 하는 것도 아닌데 같이 흠뻑 빠져들게 만드는 옥찌의 리액션에 있을테고, 리액션이 가능하도록 만든 책의 따뜻하고 포근한 색감과 이야기에 있을 것 같다.  

 아이랑 대화하면서 읽어주는게 제일 좋을 것 같지만 너무 강요하지는 말길... 동화책 읽는 습관 중에 제일 나쁜건 계속 아이에게 질문하고, 대화하기를 강요하는거니까. 그저 동화책 읽는 사람도 즐겁게 읽으면 아이는 금세 알아챈다. 다른걸 하다가도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궁금해서 소리와 색이 펼쳐지는 곳으로 북북 기어오거나 아장아장 걸어올테니까. 아마 눈은 첫장부터 즐거워지고 맘은 저도 모르게 스르르 따뜻해지고 말것이다. 

 사족을 붙이자면,(스포일러일지도 모르겠으나) 모든 동화책에서 천편일률적으로 엄마 아빠를 가정하는건 일반적인 입장이란 것에도 불구하고 어떤 면에선 폭력적이다. 결손 가정이란 말을 좋아하는건 아니지만, 다양한 관계들을 조명한다면 아이들의 시야가 넓어지는 것은 물론 좀 더 깊고 넓게 세상을 바라보지 않을까? 


한핏줄 책 - 물감으로 그린 느낌은 아니지만 강한 색대비로 아이들의 흥미를 끌 수 있다. 물론 주제도 야옹이랑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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