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겁게 안녕 - 도시의 힘없는 영혼들에 대한 뜨거운 공감과 위로!
김현진 지음 / 다산책방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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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 군산에 다녀왔다. 집으로 돌아올 때 방에 처박혀있던 종이뭉치를 집어들고왔다. 정리의 마법을 다시 부려보고 싶은건 아니고 뭔가 찝찝했기 때문이다. 누군가 들춰봐도 괜찮을 기록일지 의심스러운건 둘째치고 대체 저기에 무슨 이야기가 들어있는지 궁금했다. 지난 시간 적어놓은 기록도 정리하고 싶었다. 내가 살아온만큼(나이 허세 돋네) 쌓인 일기와 영화와 책을 보며 적은 메모들, 누군가와 주고받은 편지, 이제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와의 만남에 관한 사적인 기록까지. 그리고 시나리오 공부. 벌써 3년이나 됐다. 시나리오 공부를 하겠다며 무작정 서울에 올라가 시나리오 공부대신 혹독하게 혼자 사는 방법을 배웠던 때가. 시나리오는 공부가 아니라 그냥 쓰면 됐다. 하지만 뭐든 기초부터 알아야 시작할 수 있다고 고지식하게 믿은 덕분에 무려 상경을 한 것이다.


 시나리오 공부를 하려고 올라갔지만 사실 공부보다는 어쨌든 쓰는게 더 중요했다. 하지만 어쩐지 글을 썼던 기억보다는 사람들과 어울렸던 일들이 더 기억에 남는다. 젊었던 우리는 항상 배가 고팠다. 수업이 끝나면 근처에 있는 술집에서 통닭과 생맥주를 마셨다. 어떤 날은 후라이드를 먹었고 다른 날은 반반을 시켜 먹었다. 비가 오는 날에는 골뱅이를 시켰고 안주가 나오기 전에는 기본안주만으로도 맥주잔을 퍽도 잘 비워냈다. 누군가 선생님의 권위를 생각해서 이래야 저래야한다 간섭하지 않았고, 어떤 줄에 서야 이 판에서 살아남는다며 잰체하는 사람도 없었다.(늘 그랬듯 나만 몰랐을지도 모르지) 헐렁한 모임이었고 느슨한 열정이었다.


  돌이켜보자면 시나리오 하나 쓰지 못했지만 그래도 그때 그 시절이 있었던게 때때로 위안이 될 때가 있다. 지금에서야 떠올리며 회한에 젖는 위안이 아니라 방세를 내려고 하기 싫은 일을 할 때도 든든해지는 위안이었다. 뭔가를 하고 싶었을 때 나와 같이 뭔가를 하고 싶었던 사람들과 그때를 함께 보냈다는게, 그들과 밤을 지새우고 초췌한 몰골로 새벽 거리를 걸었다는게, 강제가 아니라 맘에서 우러나야만 할 수 있는 몇몇 일들을 같이 도모하고 같이 했다는게 말이다.


 ㄲ님 아니었으면 김현진의 책을 다시 읽지 않았을 것이다. 한 블로거의 글로 그녀의 주사를 상세하게 알고 있거나 지난번 책이 실망스러워만은 아니었다. 더 이상 나는 현진씨에게서 누구나 하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때가 되면 졸업해야할 작가들이 있는 법이다. 내게는 바이올렛의 S가 그랬고 이런저런 직함으로 한때 반짝였던 많은 저자들이 그랬다. 그런데 '뜨겁게 안녕'은 김현진을 다시 보게 만들었다. 김현진이 제일 잘 할 수 있는 이야기, 그녀가 살 부대끼며 살고 실수하는 사랑하는 이야기이다. 혹은 너무 뜨겁지만 정작 자신은 뜨겁다는걸 알지 못해 자꾸 열이 나는 젊은 시절의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그때는 순진하게도 나의 창의력이라던가 그런 것이 꽤 가치 있는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 같다. 부끄러운 일이다. 이제는 이런 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고, 오래 버티는 놈이 이긴다는 것 정도는 안다. 그래도 그때는 시나리오 작가로서 뭔가 길이 열릴 거라는 바보 같은 믿음이라도 부여잡고 있지 않고서는 아홉시부터 여섯시까지 책상 앞에 딱 붙어 보내는 시간과 사람을 계속 회의적으로 만드는 온갖 회의들과 종종 회식 자리에서 삼겹살을 일정한 크기로 자르거나 시시한 농담을 귓등으로 들어넘기며 대리님과 과장님들 소주잔이 비면 잽싸게 빈 잔을 채워주는 시간을 그토록 잘 견뎌내지 못했을 거였다. 사실 잘 견뎌내지도 못했다. 나는 회사나 다닐 사람이 아니야! 라고 속으로 객기 부렸던 듯한데, 회사에서 먹여 살려주는 걸 고마워했어야 했건만 그땐 뭘 몰랐다. 내 능력이니 창의성이니 이런 게 뭔가 중요한 게 틀림없다는 큰 착각 속에 빠져 있어서 그랬다. 죄송하기 짝이 없다.


  거리마다 사연을 품고 있는 골목길과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 예쁘고 빛나는 분홍 새틴 원피스를 걸어두고 하수구를 뚫어야만 했던 일,  옳고 그름 대신 아프고 짠함을 보듬는 그녀.


 현진씨는 잰체하며 쓸데없는 말 늘어놓는 어른이 아니라 '진짜 어른'을 좋아한다. 나도 그런데.


사십 년 동안 같은 자리에서 순대국을 끓여온 할머니의 대답은 늘 명쾌했다.

-할머니, 회사 대리가 괴롭혀요.

- 아가야, 속 좁은 놈들은 별것도 아닝 게 무시해버려라잉.

- 할머니, 저 회사 그만뒀어요. 인제 어떡해요?

- 아가, 앞으로 돈 벌 날 하고 많응게 쪼매 안 벌어도 돼야. 안 굶어 죽는다.

- 할머니, 저 이렇게 술 많이 마셔서 어떡해요?

- 아가, 걱정하지 말아라. 들어갈 때 실컷 마셔라. 안 들어갈 날이 곧 온다.

-할머니, 멀리 이사 가는 거 아니고 가까운 데 가니까 자주 올게요.

-아가야, 그래도 이사 가면 여기 살 때랑 같나......

그제서야 알 것 같았다. 그 집에서 내가 먹어온 것은 순대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차마 감당이 안 돼서 펄펄 날뛰다 못해 미친 개 같던 젊음을, 고달프고 외롭고 거친 혼자살이와 돈벌이의 어리광을 그 식탁 위에 조용히 내려놨었다는 것을. 아이고 이쁜이가 왔구나, 아가야 많이 먹어라, 하는 그 말에 넘치도록 위로를 얻어왔다는 것을. 아무리 추운 겨울이라도 그 집에서 내 맘대로 정한 내 지정석에 앉아 있으면 아무리 가난하고 춥고 외로워도 꼭 따사로운 봄날 같았다. 그토록, 따사로운 순대국이었다.


 그리고 뜨겁게 안녕


 이제 사장님이 말아주는 술기운 없이 진짜 내 인생을 살아야 한다. 감정에 술을 섞지 말고 진짜 울 일에 울고 진짜 웃을 일에 웃고 기뻐할 일에 기뻐하고 슬퍼할 일에 슬퍼해야 한다. 16mm는 이제 안 도와준다. 다 내가 알아서 해야 한다. 어쩌면 그런 게 어른인건지도 모른다. 어른이 되기 싫어서 16mm의 폭탄주 잔을 아기 젖병처럼 붙들고 늘어져 있었는데, 이제 젖병 빨고 있을 나이 진작에 지난 것이다. 사랑했다. 정말 사랑했다. 사랑해서 헤어지는 게 이런 거구나, 너무 사랑해서 헤어진다는 게, 하고 신파조로 읊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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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da 2012-07-05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별 다섯이다!
적어도 이 책은 "누구나 하는 말"은 아니었죠?^^
순대국 할머니한테 제가 다 고마웠어요.
현진씨를, 그 많은 젊은 술꾼들을 위로해줘서 말이에요.



Arch 2012-07-05 16:42   좋아요 0 | URL
네!

나는 진짜 꽃양배추님처럼 멋지게 정리하고 예쁜 무릎과 순대국 할머니에 대해 쓰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시나리오 부분에서 꽂히고 그러다 그냥 막 끝내버렸어요. 내가 그렇지 뭐.
할머니 부분은 기쁠 때 읽어도, 쓸쓸할 때 읽어도 다 좋아요. 나만 기쁜 것 같은 특별함에서 벗어날 수 있고 쓸쓸할 때는 위로가 되어주거든요.

맥거핀 2012-07-05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현진씨 예전에 한겨레에 글 쓰실 때 읽었었는데, 요새는 잘 못 본 것 같아요.(이게 띄어쓰기가 맞나요? 잘 못 본 것..) 뭐 물론 요새는 제가 주의깊게 읽지를 않아서 그럴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할머니 말씀이 위로가 되는군요. 저도 할머님의 충고를 받아들여 들어갈 때 실컷 마시겠...

Arch 2012-07-06 09:56   좋아요 0 | URL
정말, 다 띄어쓰기 해야할 것 같은데 막상 띄어쓰자니 어색한데요. 저 같음 '요새는 못봤어요.' 이럴텐데^^
저는 다음날 숙취가 걱정돼서 술을 적당히 마시는 타입이었는데 저 말을 듣고 언젠가는 숙취고 뭐고 좀 먹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나이가 될거 아냐 싶은거에요. 그래서 막 들이붓... <---위로가 잘못 적용된 사례

숲노래 2012-07-05 1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마음을 먹고 마시면서
좋은 삶을 누린다고 생각할 수 있으면,
언제 어디에서라도
좋은 글을 실컷 쓰면서
즐거우리라 느껴요..

Arch 2012-07-06 09:57   좋아요 0 | URL
저도 그러리라 믿어요. ^^ 수시로 변덕스럽고 기분이 오락가락해서 좋은 마음이 될 순간을 갖기 어렵긴 하지만.

무해한모리군 2012-07-06 2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표지 사진 예쁘네요.
이 분은 제가 구독하는 작은책에 오래연재해서 왠지 아는 사이 같아서,
얼마전에 취직했다는 기사를 쓰셨길래 괜히 혼자 기뻐하기도 했어요 ㅎ

이 책도 참 좋구나. 저도 읽어봐야겠어요.
Arch님 안녕~

Arch 2012-07-10 13:38   좋아요 0 | URL
김현진다운 책이었어요. 휘모리님도 읽어보면 좋아하실 것 같아요 ^^

알로하 2012-08-02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은 솔직해서 좋았어요. 저희 집앞 커피숍에서 이 책을 처음 봤는데요. 갈때마다 조금씩 읽어서~ 이 책 다보려면 커피 더 자주 마셔야겠어요!ㅋ

Arch 2012-08-03 09:45   좋아요 0 | URL
솔직하다고 적나라하진 않은 것 같아요. 그렇게 조금씩 읽는 것도 참 좋더라구요. 감질맛나고 꼭 읽어야할 것 같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