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 - 추억을 잃어버린 모든 이에게 우리시대 대표 문인들이 전하는 특별한 수업 이야기
김용택.도종환.양귀자.이순원 외 지음 / 황소북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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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수업을 들어왔는지 헤아릴 수 없습니다. 저에게 크고 작은 지혜를 주신 스승님의 수도 역시 그렇습니다. 헤아릴 수조차 없는 무수한 인생의 수업을, 헤아릴 수조차 없는 스승님께 매 순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살아간다는 것은 수업을 받는 과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난날에 배운 수업이 오늘을 살아갈 지혜를 주고, 또 오늘 무심코 얻은 지혜가 앞으로의 날들을 헤쳐 나갈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은 아닌지요. 

 제가 그동안 받은 수업 중에는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어른들의 말씀도 있었고, 아직은 어린 양인 학생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고자 하신 선생님의 말씀도 있었습니다. 또한 친구들과 모여 함께 한 게임에서 배운 수업도 있었고,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창피한 순간을 통해 배운 수업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매 순간 인생의 수업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힘을 주리라는 것은 수업을 받을 당시에는 몰랐습니다. 권태현 작가가 "철봉대를 붙잡고 울어본 적 있나" 하고 물은 체육 선생님의 말씀을 십수 년이나 지나서 깨달은 것처럼 말입니다.
  
 더구나 그동안 제가 받았던 수업을 새까맣게 잊고 지내는 시간도 많았습니다. 이 책을 읽기 전의 요즈음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동안 제가 받았던, 그러나 잊고 지냈던 인생수업의 순간순간들이 마구 떠올랐습니다. 제가 최근에 받았던 인상 깊었던 수업도 떠올랐고, 또 제가 아주 어릴 때 받았던 수업까지도 거짓말처럼 생생하게 떠올랐습니다. 

 제가 받은 많은 수업들은 대부분 저에게 좋은 말, 아름다운 말을 해주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에 관해서, 하루하루 상쾌한 아침을 맞이하는 것이 얼마나 멋지고 행복한 일인지에 대해서 귀가 따갑도록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저의 기억 속에 선명하게 박힌 것은 인생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수업이 아니라 저를 당황하게 하고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저를 놀라게 한 수업이었습니다. 은미희 작가도 이 책에서 기뻤던 순간보다 자신을 슬프게 하고, 당혹스럽게 만든 수업이 더 선명한 무늿결로 남아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저의 경우에도 그랬습니다.

 예컨대 제가 초등학교 2학년 때 받았던 수업 같은 것 말입니다. 그때 저희 학교에서는, 우유를 먹고 싶은 사람들은 신청을 해서 2교시가 끝나면 먹었습니다. 저는 흰 우유를 너무도 싫어해서 엄마한테 신청하지 않겠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엄마는 우유를 먹어야 키도 크고 건강해 진다며 억지로 시켰습니다. 그래서 저는 2교시가 끝나면 교실 문 앞으로 배달된 우유를 하나 가져다 먹어야 했는데, 흰 우유는 도저히 입으로 넘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유를 아애 가져가지 않거나 선생님께서 우유 안 먹은 사람 가져가라는 말씀을 하시면 어쩔 수 없이 가져다가 그대로 집으로 가져가곤 했습니다. 그런 제가 우유를 먹는 날도 있었으니 바로 딸기우유나 초코우유가 나오는 날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날은 딸기우유나 초코우유가 나왔던 것 같습니다. 저도 우유를 가져다 먹은 날이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우유를 신청한 한 아이가 우유가 없어 먹지 못한 것입니다. 우유 빈깍의 개수를 세어보면 신청한 사람 수대로 맞게 배달이 되었는데, 우유를 먹지 못한 아이가 있으니 문제가 된 것입니다. 누군가 우유를 신청하지 않고 가져다 먹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었는지 선생님께서는 오늘은 꼭 누가 그랬는지 알아낼 것이라고 엄포를 놓으셨습니다. 그리곤 물이 담긴 유리컵을 하나 가져오셨습니다. 그 유리컵을 들고서 선생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유리컵을 가지고 있으면 누가 거짓말을 하는지 알 수가 있어. 앞에서부터 차례대로 내가 묻는 질문에 대답을 하고 유리컵에 손을 넣어라. 거짓말을 하지 않은 사람의 손은 그대로 있을 것이고, 거짓말 하는 사람의 손은 커다랗게 부풀어 오를 거야." 그렇게 말씀을 마치시고는 앞에 있는 아이들 쪽으로가 질문을 하셨습니다. "네가 우유를 가져다 먹었니?" 그러면 아이는 "아니요" 하고 손을 유리컵 속에 집어넣었습니다.

 저는 제가 신청한 우유를 가져다 먹은 것인데도 왠지 모르게 가슴이 쿵쾅거렸습니다. 우리들 중 누군가의 손은 커다랗게 부풀어 오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얼마나 부풀어 오를까? 손가락이 얼굴 만하게 커지는 건가?' 이런 생각이 들자 가슴이 떨렸습니다. 그런데 옆에 있던 아이도 저처럼 떨고 있었던 것을 떠올리면, 그때 선생님의 말씀을 거짓이라 의심하는 아이는 아마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많은 아이들이 손이 커다랗게 부풀어 오를 친구의 미래를 걱정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으니까 괜찮아' 하며 안도감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상황이 이러하니 정말 우유를 가져다 먹은 아이는 공포에 떨고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몇 명의 아이만이 유리컵에 손을 집어넣을 만큼의 짧은 시간이 흘렀는데 뒤쪽에서 한 아이가 "선생님, 제가 그랬어요." 하고 자수를 하였습니다.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니 그 친구는 울고 있었습니다. 울음소리는 더욱 커졌고 자세히 보니 그 친구는 오줌까지 지렸습니다. 아니 조금 지린 정도가 아니라 교실 바닥을 적실만큼 흥건하게 오줌을 쌌습니다.

 자수를 한 그 친구에게 선생님께서 뭐라고 하셨는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다만 공포에 질려 서럽게 울던 그 친구의 표정이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까지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 거짓말을 한 사람이 손을 집어넣으면 손이 부풀어 오르는 그런 유리컵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에도 그 아이의 표정이 생각났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받은 이 수업이 저는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이렇게 제가 오래도록 기억하고 있는 것은, 마냥 행복하고 기뻤던 수업보다 놀라고 긴장했던 수업입니다. 이순원 작가도 잘난 체하다 친구들한테 망신을 당한 일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문교부 장관이 누군지 아는 사람! 이라는 선생님의 질문에 과학책 겉장에서 '문교부장관 검정필' 이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보고는 자신 있게 검정필이라고 대답했다가 친구들에게 웃음거리가 되었을 때, 어린 시절의 이순원 작가는 그 순간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요.

 저한테도 그런 순간이 여러 번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람들 앞에서 창피 한 번 당해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우리는 인간이기에 실수는 늘 그림자처럼 따라다닙니다. 실수를 통해 지혜를 얻고 삶의 이치도 조금쯤 깨달을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제가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분들께 지혜를 얻었는지 생각해 봅니다. 또한 이러저러한 일을 겪으면서 그를 통해 깨달음을 얻었던 순간들을 회상해 봅니다. 참으로 고마운 세상입니다. 그것을 생각한다면 김나정 작가의 말대로 저는 암만 노력해도 영영 불행한 사람은 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저에게 가르침을 주시려는 분들이 있기에, 이렇게 자신의 수업을 나누어 주려는 책이 있기에 아무리 넘어지고 깨져도 다시 일어나야 할 것 같습니다. 기쁜 일이든 슬픈 일이든, 행복한 일이든 당황스러운 일이든 그 모든 것들이 삶의 버팀목이 되어 주는 수업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이제 또 다른 수업을 들으러 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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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19 23: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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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28 23: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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