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의 동행
미치 앨봄 지음, 이수경 옮김 / 살림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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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아침, 물을 마시러 거실에 나갔다가 돈벌레와 마주쳤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벌레인 이 녀석은 요리보고 저리 봐도 참 호감형이 아니다. 다리가 오십 개는 족히 달렸을 것 같은 이 녀석을 보면서 문득, 내가 벌레로 태어났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다면 아마도 나는 나처럼 벌레를 싫어하는 사람 손에 죽거나, 지나가는 자동차에 깔려 죽거나, 그도 아니면 나보다 더 큰 어떤 생명체의 발바닥에 최후를 맞이했을 것이다. 이 얼마나 허무하고 슬픈 일인가.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나는 내가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새삼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내가 왜 돈벌레가 아니라 사람으로 태어났는지 궁금해졌다. 내가 수많은 벌레들, 수십 종의 동물들 중의 하나가 아닌 사람으로 이 세상에 보내진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만일 정말 내가 어떤 이유가 있어서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라면, 혹은 그것이 아니더라도 이왕 이렇게 사람으로 이 세상에 보내질 것이라면... 그렇다면, 좋은 조건들까지 주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은, 좋은 조건들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은 나와 출발선 자체가 다르고 느꼈다. 아무래도 돈이 많은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이루고자 하는 것을 쉽게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소위 사람들이 말하는 성공한 삶, 행복한 삶을 살기 더욱 쉬울 것이다. 그렇기에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고 느꼈던 것이다. 또한 착하고 성실하게 사는 사람들이 큰 시련을 겪고,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바쁜 사람들이 오히려 잘 살아가는 현실은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는 나의 생각을 더욱 굳건하게 하였다. 어릴 적 동화책에서 읽었던 내용은 분명 이것이 아니었다. 남을 위해 봉사하고 성실하게 사는 사람은 복을 받고,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어려움에 빠뜨린 사람은 벌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현실은 착한 사람이 꼭 복을 받는 것도 아니고, 못된 사람이 꼭 벌을 받는 것도 아니었다.

 행복한 자, 부유한 자는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냐고 그렇게 따져 묻는 나에게 이 책의 주인공들은 그렇지 않다고, 이 세상 한 번 살아볼만 하다고 말한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성직자 앨버트 루이스(렙)는 행복해지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묻는 이 책의 저자 미치 앨봄에게 이렇게 답한다.

   
 

그래. 이 물질적인 사회는 우리가 행복해져야 한다고 말하지. 이런저런 새로운 물건을 사고, 더 큰 집을 장만하고, 더 좋은 직장에 취직해서 말일세. 하지만 그건 틀린 생각이야. 그 모든 것을 가진 사람들이 인생 상담을 받으러 나를 찾아오곤 했는데, 그들은 결코 행복하지 않았거든.

 
   

 렙은 그렇게 말했다. 그 모든 것을 가진 사람들은 결코 행복하지 않다고. 좋은 조건들을 가지고 태어나 남들보다 훨씬 앞의 출발선에 선 그들이 행복하지 않다니. 그 이유가 무엇일까. 렙은 그 이유를 더 많이 가지면 행복할 것 같지만, 그러면 그보다 더 많이 갖고 싶은 욕망에 휩싸이게 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물질적인 욕망에 휩싸이면 오히려 불행하게 된다는 것인데, 간단하지만 깊은 뜻을 담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했던 것도 어쩌면 물질적인 욕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더 많이 갖지 못한 것을 안타깝고 분하게 생각해서. 더 많이 가진 사람이 성공한 것이고, 행복한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얼마큼 가졌느냐를 성공한 삶, 행복한 삶의 절대적 기준으로 삼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것이 절대적 기준이 아니라면 나에게 주어진 조건들은 썩 괜찮은 건지도 모른다. 또한 더 많이 가진 자들보다 얼마든지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때는 문제아였고, 비행청소년이었고, 나쁜 범죄자였던 성직자 헨리 코빙턴이 물건을 도둑맞아 화가 난 노숙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화내지 말게. 자네보다 훨씬 나쁜 상황에 처한 사람도 많아.

 
   

노숙자에 물건까지 도둑맞은 사람에게 더 나쁜 상황에 처한 사람도 많으니 화를 내지 말라는 헨리의 말은 선뜻 이해하기 힘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헨리의 삶을 들여다보면 물건을 도둑맞은 노숙자의 상황은 그렇게 절망적인 것이 아니다. 열네 살 때 아버지를 잃은 헨리는 추락할 수 있는 데까지 추락한다. 마치 인간이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지 알아보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그의 추락과 타락은 이미 예정되어 있는 것처럼 찾아와 그의 삶을 힘겹게 만들었다. 코카인, 알코올, 헤로인에 중독된 그는 비틀비틀 대며 공중의 외줄을 타고 있는 듯 위태위태해 보였다. 헨리에게 그것은 이미 정해진 삶이며, 그는 거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변화한다. 마치 한 인간에게 주어진 나쁜 조건들을 어디까지 이겨낼 수 있는지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그에게는 자신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련을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 시련들을 이겨낸 헨리는 바위틈에서 자란 소나무같이 강인하고 늠름한 큰 나무가 된다. 삶의 고난으로 인해 주저앉으려 하는 사람들에게 그늘이 되어주고, 그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같이 노래를 불러주는 그런 나무가 된다. 나에게 주어진 시련은 나를 다시 일어설 수 없을 만큼 절망 속으로 빠뜨렸었나 생각해본다. 작은 시련에도 쉽게 주저앉진 않았었는지, 좋지 않은 상황에 부딪쳤을 땐 이것을 이겨낼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맞섰는지, 아니면 알 수 없는 미래에 불안해하기만 했었는지 생각해본다.

 어쩌면 내가 불평했던 대로 나에게 주어진 조건들은 아주 훌륭하진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가난한 어린 시절 사촌의 옷을 물려 입어 놀림을 당한 렙과. 태어나 처음 한 기도가 자신의 집에 있는 쥐를 쫒아달라는 것이었던 헨리에 비하면 나는 괜찮은 조건들을 가지고 있다. 나는 첫째로 태어나 늘 내가 쓰던 것을 물려 쓰는 동생에 비해 새것을 많이 써왔고, 내가 태어나 처음 한 기도는 생각나지 않지만 헨리가 했던 기도보다는 나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렙과 헨리는 노래하는 삶을 살았다. 세상의 아름다움을 알려주려는 듯, 아직 이 세상 살아볼만 하다고 알려주려는 듯 말이다. 그들의 노래와 믿음은 그렇게 나에게 왔다. 오늘 아침 만났던 돈벌레를 다시 만난다면 난 또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내가 사람으로 이 세상에 보내진 이유는 아직 확실하게 알 수는 없지만, 나에게 주어진 조건들을 불평하면서 살라고 보내진 건 아닌 게 확실하다. 나의 소중함을 안다는 것, 인생이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첫걸음임을 알겠다. 수많은 벌레들. 수십 종의 동물들 중의 하나가 아닌 사람으로 태어났고, 꽤 괜찮은 조건들이 주어졌으니 이제 남은 것은 나의 몫이다.

 이 두 분과 연결된 삶을 살기 위해 의미 있는 일들을 하며 살아가야겠지. 아마도. 

(마태복음 5장 13~15절)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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