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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기별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내가 김훈이라는 작가의 작품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이 언제일까. 아마도 그를 세상에 높게 내보내준 작품 「칼의 노래」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킨 그 작품에 나 또한 걷잡을 수 없이 빠졌었고, 그것이 그의 에세이집을 만나게 해준 중매쟁이가 되었다.「칼의 노래」라는 중매쟁이를 통해 만난 「바다의 기별」. 설렘 가득한 그와의 첫 대면에 나는 그만 경악을 하고 말았다. 자신을 소개하는 「바다의 기별」표지 첫 마디가 “자전거레이서” 김훈이었기 때문이다. 아차, 싶었다. 내가 아는 김훈이 아니라 동명이인인 김훈인 것인가. 지은 책으로...「칼의노래」... 이 대목에 가서야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작가 소개란 첫 번째가 자전거레이서라니. 문단의 늦깎이라지만 비교적 짧은 시간에 유명작가의 반열에 오른 근사하고 화려한 경력을 뒤로 하고, 자전거레이서로 자신을 표현한 이 작가의 발칙함과 기발함에 첫 장부터 한방 먹었다. 그의 다음 작품엔, 어떤 말로 그를 표현할지 은근한 기대를 하며 페이지를 넘겼다.
예상은 했지만, 다른 작가들의 에세이와는 달리 가볍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이 책을 하루 종일 끼고 있었던 이유는, 그의 다른 책에서는 볼 수 없었던 그의 내면, 그의 생각들을 훔쳐보는 것이 좋았기 때문이다. 김훈이라는 나무가 새긴 나이테를 맘껏 볼 수 있는 더 없는 기회였던 것이다. 그가 언젠가 끼적여 놓았던 메모장을 소개해주기도하고,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말해주기도하고, 달릴 곳 없는 시대의 황무지에서 외로운 길을 걸었던 아버지를 회상하여 그 기억을 나눠 주기도하고, 딸아이가 첫 월급으로 핸드폰을 사준 소소한 이야기를 통해 작지만 벅찬 행복에 관한 단상을 깨워 주기도하고, 생명의 개별성(이 대목에서 특히 공감 가는 부분이 많았다.)에 관해 깊은 사색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한다.
그리고 늘 편식을 하는 나에게 이것도 한번 먹어보고, 저것도 한번 먹어보라며 홍명희의「임꺽정」을 설명해 주기도하고, 시인 최하림의 시도 읽어주고, 화가 오치균의 그림도 보여준다. 책의 페이지수로 치자면 다른 책의 절반 정도로 얇지만, 담고 있는 내용은 헤아릴 수 없는 만큼 거대하다. 두껍진 않지만, 얻을 수 있는 것이 많은 이 책을 음식으로 치자면 고단백 저지방 식품인 닭 가슴살쯤 될까. 그가 내준 음식이 모두 맛있었지만 한 번 더 먹고 싶은 것이 뭐냐고 묻는다면, 그가 했던 강연을 기초로 쓴 회상, 말과 사물(이 책 part3)이라고 할 것이다. 의견을 사실처럼 말하고 사실을 의견처럼 말하는 우리 언어의 현실과, 인간의 소통에 기여할 수 있는 말에 대한 그의 깊은 사유를 공유할 수 있는 것이, 이 책을 읽는 동안의 제일 큰 즐거움이었다.
책의 마지막엔 그동안 그가 썼던 책의 서문들과 수상소감들을 수록해 놓았는데, 이 책과 참 잘 어울리는 양념이라 생각한다. 그가 남긴 나이테와 발자국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차린 음식을 대접받고 가는 기분으로 이 책을 덮는다. 씹어도 씹어도 단물이 빠지지 않는 풍선껌 같은 그의 문장들을 나는 오래도록 곱씹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