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의는 아니지만 - 구병모 소설
구병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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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병모 '고의는 아니지만' 탄탄하고 매력적인 문장력과 감각적인 비유가 단연 돋보인다. 극단까지 밀고 나가는 상상력과 문명 비판적 메시지가 오밀조밀하게 얽혀 있다. 탈국가적인 배경과 지극히 한국적인 시대상이 공존하는 흥미로운 이야기판이다.


특수금속으로 땅에 박혀 점점 인간에서 물체가 되어가는 남자. 카프카의 전언처럼 우리 모두는 벌레도, 물체도 될 수 있다.(타자의 탄생) 생존마저 위협하는 아이를 오븐에 넣는 상상을 할 정도로, 모성이란 이름의 폭력성을 고발한다.(어떤 자장가)


정치적으로 올바르며 선의에 의해 행동한다는 믿음이 사실 타인에게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아이러니하게 보여주는 작품. 고의가 아님에도 우리는 남을 칼로 찌를 수 있다. 감수성이 모자라다는 건 단순한 악덕이 아니라 수치다.(고의는 아니지만)


히치콕의 영화처럼 새가 절망에 찌든 사람을 공격한다. 새의 먹이가 되지 않으려면 긍정적인 사고을 하자는 희망타령이 난무한다. 당장 미래가 불투명한 취업준비생은 갖은 고생 끝에 차라리 먹히기를 꿈꾼다. 거짓희망전도사들에게 날리는 한 방.(조장기)


그 외에도 비유가 금지된 나라의 우화 '마치 ...같은 이야기'나 성범죄자들에게 가한 국가의 폭력을 그로테스크하게 표현해낸 '곤충도감', 감각을 잃어버린 남자의 절망을 다룬 '재봉틀 여인'도 좋았다. 최근 읽은 단편집 중에서 압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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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 인터넷이 우리의 뇌 구조를 바꾸고 있다
니콜라스 카 지음, 최지향 옮김 / 청림출판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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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웹과 유비쿼터스 환경이 인간의 삶과 의식구조를 어떻게 바꾸었는지 분석한다. 멀티태스킹과 몇 분마다 오는 자극은 뇌를 산만하게 만든다. 주의깊게 읽는 능력은 사라진다. 링크를 클릭하고 스크롤을 내리지만 글은 읽지 않는다.


기기를 통한 자극에 익숙해지면 실제 세상의 이미지는 흐릿해진다. 그러한 '방해'가 가치있다고 여기는 건 자신이 소외되어 있지 않다는 확신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참견과 정보들은 과대평가되어 있다. 새로운 정보는 대개 중요하지 않고 사소하다.


링크가 클릭할 가치가 있는지 평가하는 능력은 발달하는 한편 문서를 이해할 때 쓰는 인지적 자원과 집중력은 떨어진다. 번번한 중단에 익숙해져 긴 글을 읽는 감각을 잃는 것이다. 효율적인 업무 처리가 가능해지지만 고차원적 능력은 약화되는 부작용.


목적 없는 웹서핑을 한참 한 뒤 무엇을 봤는지 복기하면 거의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클릭놀이를 했을 따름이다. 하이퍼링크의 자유로움은 실은 읽기를 방해하는 자극이었던 것이다. 인터넷에 오래 머물수록 이해력이 떨어졌다. 이제야 좀 인터넷에 거리를 둔다.


"책을 왜 읽어요? 구글에 검색하면 다 나오는데"한 철학과 학생의 말이 의미심장하다. 언제든지 검색 가능하므로 마치 정보를 소유한 것 같은 착각. 음유 시인들과 함께 기억술이 사라졌듯 편리한 기술은 두뇌를 덜 사용하게 만든다. 과연 웹이 내 소유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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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8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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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토 가나에의 데뷔작인 '고백'은 선뜻 손이 가는 책은 아니었다. 평범한 제목이기도 했지만, 띠지의 헌사가 너무 요란스러워 그저 마케팅 멘트려니 했다. 그러나 거의 어떤 정보도 없이 읽은 책에 홀리듯 빠져들었고, 한번에 읽어내리게 하는 흡인력이 있었다. 숨어 있는 보석 하나를 발견한 셈. 베스트셀러긴 한데 베스트셀러조차 너무 많은 현실이니. 미스테리 소설이다 보니 내용이 스포일러가 포함될 수 있겠다. 재미를 위해서는 나처럼 정보 없이 보는 편을 권하고 싶다. 하지만 범인은 처음부터 밝히고 시작하므로 의외의 범인 같은 반전은 없다. 미미 여사의 걸작 ‘모방범’처럼 여러 사람의 입장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모방범’은 하나의 결론을 향해 달려갔다. 이미 알고 있는 살인자가 단죄당할 때 카타르시스는 극에 달한다. 

그러나 ‘고백’에는 최소한 다섯 가지 입장이 있다. 네 살짜리 딸을 잃은 유코와 살인자인 슈야와 나오키, 동급생인 미즈키, 그리고 나오키의 어머니. 아쿠타가와의 원작 소설인 ‘덤불 숲’(영화 라쇼몽에 같이 등장하였지만 산적과 무사 부부가 나오는 이야기는 ‘덤불 숲’이 맞다)에서는 같은 살인 사건을 두고서 자신에게 유리한 증언만을 한다. 그건 그들이 인지부조화를 막기 위해 선택한 자연스러운 합리화일까. 그럴 가능성이 크다. 우리의 뇌는 우리를 방어하기 위해 눈 깜짝 않고 다양한 거짓말을 만들어낼 수 있다. 어쩌면 가장 창의력이 필요한 것이 그 작용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는 ‘덤불 숲’처럼 사건 자체가 왜곡되거나 누락되어 진실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게 아니다. 진실은 다층적이라는 걸 보여준다. 또한 작은 단서 하나와 숨겨진 진실들이 계속해서 연쇄 비극을 낳는다. 우리는 어리석어서, 그리고 무지해서 죄를 저지른다. 악한 의도가 없었다 하더라도, 인간은 극악무도한 죄인이 될 수 있다.

유코는 네 살배기 딸을 잃는다. 살인범은 담임을 맡고 있는 반의 두 학생이다. 중학교 교사의 네 살배기 딸이 살해당했다. 기묘한 주범과 공범. 누가 주범일지 공범일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유코는 학교를 그만두는 날, 반 학생 전체에게, 이 살인사건에 대해 말한다. 범인이 누구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슈야와 나오키라는 건 모두 알고 있다. 유코는 그들을 고발할 생각이 없다고 했다. 너무 쉽게 처벌받으면 곤란하다고. 그리고 지극히 개인적인 방식으로 복수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여기서 묘사된 슈아는 사이코패스 같았다. 단지 자기의 재미를 위해 동물을 죽이고 그 사진을 홈페이지에 올리고, 전기 충격 장치 같은 걸 만드는 아이. 일본 열도를 뒤흔들었던 일가족 살해 사건의 범인이 딸이었다는 게 밝혀진 충격적인 사건에서 슈야는 다음과 같이 반응한다. 영락없는 사이코패스. “루나시가 뭐가 잘났어. 청산가리? 원래 있던 걸로 죽였을 뿐이잖아. 나라면 살해 도구를 직접 만들어낼 수 있어. 그러면 더 주목을 받겠지.”(45) 

다음은 미즈키가 유코에게 보낸 편지였다. 방학 이후, 모든 아이들이 쉬쉬하는 가운데, 나오키는 등교를 거부하고, 슈야는 원래대로 냉정한 태도로 학교에 나온다. 아이들은 이제 처벌을 시작한다. 제일 처음 규탄에 나선 사람은, 가장 공부를 잘 하고 인기도 많은 남학생이었다. 그리고 이젠 공공연히 슈아를 향한 공격이 시작된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남에게 칭찬받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착한 일이나 훌륭한 행동을 하기란 힘듭니다. 그렇다면 가장 간단한 방법은 무엇일까. 나쁜 짓을 한 사람을 질책하면 됩니다. 가장 먼저 규탄하는 사람, 규탄의 선두에 서는 사람에겐 용기가 필요하겠죠. 아무도 찬동하지 않을지 모르니까요. 하지만 규탄하는 누군가를 따르기는 아주 쉽습니다. 자기 이념은 필요없고, '나도,나도'하면 그만이니까요. 게다가 착한 일을 하면서 일상의 스트레스도 풀 수 있으니.그리고 한번 그 쾌감을 맛보면 하나의 제재가 끝나도 새로운 쾌감을 얻고 싶어 다음번 규탄할 상대를 찾지 않을까요? 처음엔 잔악한 악인을 규탄했지만 점차 규탄받아야 할 사람을 억지로 만들어내려 하지 않았을까요? 중세 유럽의 마녀 재판이나 다름없습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가장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그들에겐 벌할 권리가 없다는 것을.(78)
미즈키 역시 슈야에게 우유를 던진 순간 '기이한 황홀감'을 느꼈다. 그러나 신호를 저지한 것은 아이들의 '기묘하리만치 킬킬거리는 웃음 소리'였다. 슈아의 무심한 눈을 보며 미즈키는 그가 '어리석은 민중들에게 모욕당하는 성자'처럼 보였다. 미즈키는 유코에게 묻는다. 선생님의 개인적 처벌에 대해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시느냐고.

한편 나오키와 슈야의 입장을 보면, 그들이 그런 일을 왜 저질렀는지를, 심정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나오키의 어머니는 자기 아들이 살인에 직접적으로 가담했다는 걸 알면서도 아이를 옹호한다. 그 논리가 역겹고 불유쾌하더라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어머니는 자기가 아는 정보로밖에 파악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다들 진실을 정확하게 모르고 있다. 그리고 진실을 알았을 때, 어머니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유코의 복수에는 트릭이 있었고, 슈야와 나오키의 동기는, 생각과는 많이 다른 것이었다. 두 아이를 기본적으로 움직이게 한 원동력은, 남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다. 특히 자신을 학대해 아버지에게 이혼당한, 전직 과학도였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슈아를 놓아주지 않는다. 아무에게도 자신의 재능을 인정받지 못한 슈아는 괴물이 되어간다. 자기를 떠난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슈야는 발명품을 만든다. 전기충격기를 만든 것도, 누군가 칭찬해주길 바랐을 뿐이지 누굴 진짜 해칠 생각이 있었던 건 아니다. 홈페이지의 학대 사진들은 모두 가짜다. 그러나 선생이 자기를 그런 사람으로 여기는 모습에 또 실망했다. 과학발명품 대회에 나간 건 잘난 척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엄마가 알아주길 바라서였다. 그러나 그걸 이해하지 않고 화를 내는 담임에게 슈야는 증오를 품는다. 오해는 이토록 쌓이고 쌓여 비극을 낳는다. 그래서 슈아의 소아병적인 복수는 아이러니한 방식으로 터트려진다. 박찬욱의 ‘복수는 나의 것’이 오버랩되기도 했다. 

한편 나오키는 자신의 평범함에 절망하는 아이였다. 슈야 같이 독특한 캐릭터가 자기에게 접근했을 때, 자기가 이용 대상이 되리라는 건 상상도 못했다. 그리고 소박한 복수를 한다는 생각에 표적을 담임의 딸로 정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나오키는 본성인지 실수인지 알 수 없는 행동을 한다. 그건 복합적인 심리가 반영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오키는 진실을 모른 채로 방에 처박혀 있다가, 결국 폭주하고 만다. 이 도한 유코의 계획이 아니었음에도, 일은 그런 식으로 벌어진다. 또한 슈야의 복수 역시 사실은 유코의 복수로 마무리되는 것이다.

범죄자를 이해할 수 있을까. 그것도 중학생인 살해범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일본도 우리나라처럼 미성년자의 치명적인 범죄도 사법 처리를 하지 않는다. 그 연령을 낮췄다고는 하지만, 아이들도 얼마든지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 오히려 사법제도를 악용할 수 있다. 그러나 슈야와 나오키는, 처음부터 괴물이 아니었다. 그들은 만들어진 괴물이다. 유전자가 살인을 하도록 종용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처한 환경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열등감, 질투, 고독, 죄책감, 죽음에 대한 공포가 그 아이들을 그토록 엄청난 일에 몰려들게 했다. 물론 그렇다고 이 아이들을 용서할 수는 없다. 그건 복수의 피해자이자 가해자인 유코의 입장을 가장 이해하게 될 수밖에 없는 상황과 연관되어 있다.
 
“너 착한 거 안다. 그러니까 내가 너 죽이는 거 이해하지?”라고 말하던, ‘복수는 나의 것’의 송강호가 떠오른다. 누구나 그런 감정이나 상황에 처할 수 있다. 불우한 환경이라고 해서, 인정받지 못한다고 해서, 누군가를 해칠 권리를 갖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용서받을 수도 없다. 그것이 죄의 대가다. 이미 저지른 일에 대해서, 그 이유가 아무리 절실하였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자신에게는 유일무이한 선택이었다 하더라도, 폭력인 것임에는 틀림없다. 변명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극악무도한 살인자라도 절대자 품에서 진정으로 회개하면 구원받는다는 말을 경멸한다. 당신이 실수로 살인을 저질렀다는 그 사실, 그건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그걸 덮을 수는 없다. 그걸 덮기 위한 수단을 동원하는 순간, 우리는 인간 이하의 수준으로 떨어진다. 그러므로 살인자는 유족에게 용서받을 수 없다. 아니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어야 맞다. 왜냐하면 어떤 이유에서든, 살인을 저지른 건 그들 스스로일 뿐이다. 누구도 부추기지 않았다. 자기가 괴물이 되어 남을 찌르고, 그 칼로 다시 자기를 찌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슈야와 나오키의 이야기를 읽으며 마음이 아릿했던 것 역시 사실이다. 캐릭터의 힘은 이런 것이다. 살인자의 동기를 이해할 수는 없지만 수긍할 수 있게 만드는, 그런 면도 있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게 하는 힘. 이 모든 것에 책임을 지워야 한다면, 결국 그 또한 운명일까. 

데뷔작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잘 짜여진 훌륭한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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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의 이상과 현실
김민제 지음 / 역민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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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혁명사는 결코 완성된 적이 없었으며 또한 영원히 완벽하게 서술되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혁명사는 그 자신이 가능케 만든 역사가 전개됨에 따라
세세손손 인간에 대한 성찰과 정열을 끊임없이 불러일으킬 것이다." - 소불

1. 서론 : 내가 발견한 혁명론

프랑스 혁명(The French Rovolution)! 이른바 대혁명이라 일컬어지는 프랑스 혁명은 2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그 이름이 갖는 위용이 녹슬지 않았다. 혁명이란 단어가 주는 감동은 이미 낡은 것이 되어버렸을지언정, 혁명이 지닌 미래 지향적이며 이상적인 성격은 21세기인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상이야말로 인류를 현재의 실존으로 이끈 주요한 작동 원인 중의 하나이며, 이는 미래에도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엔 혁명이 새로운 생필품의 등장에도 붙여질 수 있는 흔하디 흔한 단어가 되어버렸다. 이는 혁명이 그만큼 보편적인 개념이 되었다고 볼 수 있지만 그 위상이 가벼워졌다는 의미도 된다. 어쩌면 이제 혁명은 역사적이고 정치적이 아닌 개인적이고 일상적인 맥락에서 인식하는 개념이 되었을지 모른다. 각자의 일상 속에서 혁명을 이루어내는 것이 정치적 사명을 갖는 것보다 중요하게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근대적 평등을 이룬 역사적 업적의 결과일 수 있지만, 보수화된 개인들이 사회적 영역에 무관심해져버린 현상일 수도 있다.

낭만주의적 시각에서나 실존주의적 시각에서나 프랑스 혁명은 여전히 매력적인 탐구 대상이다. 교육의 영향이겠지만 프랑스 혁명은 무의식적으로 인류 역사상 가장 극적인 도약이며 기점이 된 사건으로 느껴진다. 누구에게나 프랑스 혁명의 이미지가 다르겠지만 나에게  프랑스 혁명은 '베르사유의 장미'라는 일본 만화를 통해 최초로 강렬하게 인식되었다. 역사를 흥미로운 옛날 이야기 정도로 여기던 유년 시절, 프랑스 혁명은 마치 비극적이며 황홀한 꿈처럼 느껴졌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만화는 18세기 프랑스의 상황을 정통적인 시각에서 그리려고 애쓰고 있었다. 비록 초점이 사랑의 비화에 맞추어 있긴 했지만 귀족들의 생활과 고통 받는 민중, 혁명의 과정에서 일어나던 인간적 비극, 혁명의 쓰라림과 폐해 등에 대해 나름대로의 사회적 시각을 보여주고 있었다. 흥미로운 이야기성을 벗어나지 않았다는 단점을 지니고 있지만 '베르사유의 장미'는 내게 혁명에 대해 최초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더불어 역사 속에서 인간성은 어떻게 진화해왔는가, 인간은 어떤 개인적 · 사회적 삶을 창조했는가, 하는 물음을 던지기도 했다.

다시, 프랑스 혁명으로 돌아오자. 고백하자면, 『프랑스 혁명의 이상과 현실』은 내가 이제까지 접해보지 못한 형식의 책이었다. '이상과 현실'이라는 흔한 대조가 이 책에서는 끈질기게 대립하는 팽팽한 극단이었다. 프랑스 혁명의 '이상'에 완전히 빠지지 않고 '현실'을 완전히 긍정하지 않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였던가. 여러 역사가들의 프랑스 혁명사관을 시간순에 의하지 않고 주제별로 나열하였기에 혼란은 더더욱 컸다. 그러나 책을 다 읽은 후의 나의 결론은 역사가들의 택하는 관점과 비슷했다. 즉 나는 이 책에서 내가 믿고 싶어하는 혁명론을 발견하였다. 그렇기에 나의 주관적 혁명관 역시 이 책에 의해서 뒷받침될 수 있는 것이다.

본론의 방향은 이러하다. 수정주의 학자들이 정통주의 학자들의 주장을 반박하며 논지를 펼친 것처럼, 나는 역으로 수정주의 학자들의 논지를 공격하려 한다. 물론 그 논지는 이 텍스트의 내용을 기반으로 한다.

2. 본론 : 수정주의 해석에 대한 정리와 반박

수정주의적 해석은 소위 '엘리트 혁명' 이론과 '일탈'의 이론으로 집약할 수 있다. 전자는 진보적이며 자유주의적인 그리고 새로운 사상의 개방적인 귀족층과 부르조아지 상류층 사이에는 '엘리트'라는 범주 속에 일종의 합의가 존재하였다는 것이며 따라서 그러한 상황에서 대혁명은 회피될 수 있었거나 아니면 적어도 개혁적인 타협과 입헌군주정의 단계에서 안정되어질 수 있었지 않았을까하는 주장이다. 후자는 '다행인 해'인 1790년을 거쳐 1791년부터 1794년까지 이루어진 이른바 프랑스 혁명의 '일탈'이란 토지와 식량문제에 관한 전통적이며 복고주의적인 요구를 주요 동기로 삼아 동원되었던 도시대중과 농민대중이 전혀 예기치 못한 불법난입을 가져옴으로써 대혁명을 원래의 궤도로부터 벗어나게 만들었다는 이론이다.

수정주의적 해석의 큰 두 가지 이론은 위에서 인용한 바와 같다. 수정주의적 해석은 프랑스 혁명의 부정성과 무용성, 우연성을 주장한다. 전자는 프랑스 혁명에 대한 계급투쟁론이나 부르주아 혁명론을 부정하고, 후자는 혁명의 근본인 개혁성이 부족하고 복고주의적 경향이 보였기에 실패한 혁명임을 주장한다.

수정주의 학자들은 미시적인 역사 연구를 통한 실증적이고 사실적인 시각으로 프랑스 혁명을 바라본다. 역사적 사실들의 간격을 상상력과 그럴 듯한 명분으로 메꾸지 않고 각각의 그림을 세부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프랑스 혁명에 관련된 주요 쟁점을 정리하며 수정주의 학자들의 의견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계몽사상을 위시한 여러 '위대한 이념' 들은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는 데에 영향을 끼쳤는가

수정주의 학자들은 프랑스 혁명이 '위대한 이념'에 의해 발발했다는 명제를 한때 유행하던 낡은 논리 정도로 여겼다. 계몽 사상은 혁명적인 사상이 아니며 단지 '개혁적인' 사고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는 매우 보편적인 생각이고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고 주장한다. 루소의 계몽 사상은 애매모호한 데다 중구난방이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의 대중들은 루소의 책을 즐겨읽지도 않았다. 한 시대를 풍미하는 사상의 조류를 오직 유행하는 책으로 가늠할 수 있다면, 사상사 연구는 훨씬 쉬워질 것이다. 그러나 이념은 통계치로 나타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퓌레에 따르면 "혁명가들은 그들이 이해하지 못한 이념을 무의식적으로 수행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혁명을 진행시킨 건 의식이었지 결코 무의식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혁명가들에게는 이상주의적일지라도 명확한 목표가 설정되어 있었으며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수정주의 학자들은 프랑스 혁명을 주도했던 사람들이 복고적이라 주장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고전에 나오는 영웅들의 사고와 행동에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전혀 새롭지 않은 정치 개념은 그리스와 로마 시절을 답습한 것이라 한다. 그러나 과거의 것이라고 무조건 복고가 아니며, 현재적 의미에 걸맞는다면 그것은 하나의 새로운 이념이 될 수 있다.

더구나 수정주의 학자들은 쟈코뱅의 이념이 "지역마다 그리고 해마다" 달라졌으며, 또한 쟈코뱅이 보다 급진적이기 위해 수시로 정책을 바꾸었음을 지적한다. 쟈코뱅의 결점은 사회주의적이고 민주주의적 성격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계몽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계몽 사상의 혁명적 성격을 무시하면서 동시에 계몽 사상을 이해하지 못한 결점을 지적하는 것은 모순이다.

또 수정주의 학자들은 정통주의 학자들이 프랑스 혁명을 주도했던 이념을 패턴화하고 구조화했다는 사실에 대한 개별적인 반론으로 이를 부정한다. 혁명을 주도하는 세력들이 혁명의 과정에서 따르게 되는 강령이야 존재하겠지만, 어떤 혁명의 이념도 결코 단선적으로 패턴화시킬 수는 없다. 또한 로베스삐에르가 일관성 없이 행동했다는 사실 역시 똑같은 형태로 이해해야 한다. 현실에 따라 이념을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그는 혁명가가 아니다. 그는 혁명을 물리적으로 이루어냈을지는 몰라도, 진정한 의미의 혁명가는 아닐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더라도 혁명가에게 혁명은 늘 회의의 대상이며, 완전을 향해 끊임없이 지향되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구체제의 모순은 존재하였는가

수정주의 학자들은 혁명가들이 구제도를 만들었다고 말한다. "혁명가들은 구제도를 파괴하기 위하여 구제도를 창조했지만, 결과적으로 구제도란 개념이 오히려 혁명을 창조했고, 혁명을 구성해주었으며, 또한 혁명에 한계를 가져다주었다."

왕이 귀족들에게 특권을 포기하게 하는 일을 상상할 수 없는 시대는 전근대적인 시대다. 그렇다면 근대적 태도와 이념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가? 근대성이 인간이 만들어낸 하나의 이념적 발명품이라면, 그 발명품은 무(無)에서 나오는 것이다. 즉, 그런 태도가 전혀 존재할 수 없는 바탕에서 서서히 등장할 수 있는 것이다. 평민들도 특권을 누렸다는 점을 지적한다면, 시대에 편승하는 기회주의적 인물은 역사 어디에서나 빠짐없이 볼 수 있고 일상에서도 마찬가지라고 반박할 수 있다. 만약 우리 사회에 혁명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혁명 따윈 안중에 없으며 단지 개인적 영달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존재가 없어져야 하는가? 혹은 그들이 많기 때문에 혁명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인가? 어느 계층에나 중도적 인물이나 극단적 인물, 무의지적 인물이 있기 마련이 아닌가.

평민들이 가난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수치로 환산한다면 그것 역시 환원론적 결론이 되기 쉬울 것이다. 세심한 부분들간의 차이 빠리와 지방의 차이, 평민들의 개인적 재산 차이 등 에 집착한다면, 전체적인 경제사를 바라보기 어렵다. 폐부로 느끼는 부와 생존간의 간격이 지금과는 크게 달랐을 것임은 자명하다. 분명히 존재했던 농업의 위기상황을 기술적인 진전이 있었다거나 '굶지 않고 살았다'라는 식으로 표현하며 역전시키기는 어렵다.

또한 수정주의 학자들은 보통 사람들이 이상사회 건설을 위한 폭력적 혁명 따위를 바라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평민들이 올린 진정서에는 "이상 사회에 대한 바램"만이 적혀 있으며 "이들은 대립보다는 화합을 원했고, 왕을 신뢰했으며, 또한 왕이 그들이 생각했던 문제를 푸는데 중재자의 역할을 해주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그들에게 절박한 문제를 푸는 중재자의 역할을 왕이 해줄 수 있었던가? 이상사회는 말 그대로 이상사회에 불과했다. 그들이 가만히 있었다면, 역사는 결코 그들이 원하는 이상사회를 보여주지 않았을 것이다. 평민 일반이 봉건 제도에 적대적이었다고 규정하는 것도 문제가 있지만 그 반대편도 마찬가지다. 봉건 제도를 완전히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람이 4%(어떤 기준에 근거한 수치인지는 모르겠다. 혹은 어떤 집단을 100%로 상정하고 내린 퍼센트율인지도 또한 모르겠다)라고 하는데, 만약 어떠한 이상적인 제도를 상정하고 말하였다면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이에 찬성하지 않았을까. 길을 가다 설문조사를 한다고 가정해보자. '국가제도를 완전히 폐지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에 국민의 몇 %정도가 그래야 한다고 주장을 할까? 그러한 설문조사의 결과가 부정적이라고 해서 '국민은 보수적이며 현 체제에 긍정적이다'라는 결론으로 볼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프랑스의 구체제가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다는 수정주의학자들의 말은 궤변이다. 우리가 역사적 사건을 비교하기 위해서는 현재와 과거를 대비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18세기 뿐만 아니라 19세기도, 20세기도 얼마든지 구체제가 될 수 있다. 왜 유독 프랑스 혁명에 있어서 구체제란 존재하지도 않았다고 말하는 것일까? 구제도는 시대착오적 산물이 아니라 프랑스 혁명을 발생하게 한 실제적 체제이다. 정통주의 학자들이 말하는 선이 뚜렷한 모순이 없었다 하더라도 구체제 자체가 혁명 후에 아무 단절없이 복고화되었다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부르주아 혁명론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젠트리나 부르주아를 세밀하게 구분하기는 어렵다. 그들의 경제적인 기반이 거의 같은 데다가 개개인에 따라서 경제적 운세 등이 모두 달랐기 때문이다.

더구나 계층에 대한 고찰은 더욱 어렵다.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귀족과 제 3신분, 쌍뀔로뜨 등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들을 정확한 숫자로 분류하고 성격을 부여하는 것은 매우 까다로운 일이다. 더구나 중간분류의 사람들을 나누는 방식은 그들이 천차만별이라는 점에서 더욱 난항에 빠진다.

이는 프랑스 혁명이 밑으로부터의 혁명인가, 아니면 위로부터의 혁명인가, 하는 문제와도 맞물려 있다. 밑으로부터의 혁명이라면, 정치적 언어에 고무되고 피폐한 삶에 지친 민중들이 그들 중의 지배자로 하여금 새로운 정부를 세우게 했다고 가정할 수 있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는 혁명을 지배한 건 소수의 혁명가와 엘리트 집단이었으며 민중은 그들에게 그냥 끌려 다녔다고만 할 수 있다. 부르주아 혁명론은 '부르주아' 계층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에 추상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부르주아 혁명론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 부르주아 계층은 갑작스럽게 생겨날 수 없었다. 그들이 스스로의 역할을 찾아내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다. 혁명은 몇몇 사람들만이 주도적으로 움직이게 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혁명이 여러 사람을 움직이게 했다. 그래서 이 추상적인 집단의 설정이 가능하다. 프랑스 혁명 당시에 존재했던 부르주아는 그 구성인원이나 이념이 동일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부르주아는 혁명을 탄생시켰고, 혁명은 또 부르주아를 탄생시켰다.

문화의 연속성에 대한 수정주의 학자들의 입장은 어떠한가

수정주의 학자들은 신문이 프랑스 혁명 이후에나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나는 다시 수정주의 학자들의 비판의 근거가 매우 미시적이라는 판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즉 정통주의 학자들이 여러 가지 세부적인 원인들을 통해 통시적이고 종합적으로 혁명을 바라보는 것에 비해, 수정주의 학자들은 개별적 원인들이 혁명의 직접적 원인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집착하고 있다. 예를 들어 언론이 프랑스 혁명에 영향을 미친 요인 중에 하나라는 것이 정통주의 학자들의 입장이라면, 언론이 혁명 당시(1789년의 혁명을 말한다면)가 아니라 후에나 영향을 끼쳤다는 명제를 통해 혁명을 부정하는 것이 수정주의 학자들의 입장이다. 어떤 거대한 역사적 사실을 이루어낸 수많은 사건의 조합들 중 개별적인 것을 뽑아내어 원인이 되기에 부족하다고 하는 주장은 매우 미심쩍다. 그렇다고 해서 역사를 뭉뚱그린 상상적 대상으로 바라보자는 말이 아니다. 사실과 사실 사이의 공백을 메꾸기 위해 상상력을 필요 이상으로 동원해버린다면 그것은 날조된 역사가 될 것이다. 그러나 사실과 사실 사이의 공백을 무시하기 위해 개별 사료들만을 부각시킨다면 그것 또한 불완전한 역사일 것이다. '바스티유 감옥 파괴 사건이 있은 후 약 3개월이 지난 1789년 10월에는 빠리의 급진적인 신문들이 시민들을 베르사이유로 향하여 행진을 하게 유도할 수 있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라는 서술을 보자. 혁명이 바스티유 감옥 함락 사건에 불과하다면, 신문의 영향력은 없다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문화의 연속성을 말하기 전에 그 문화가 어떤 문화였는가를 먼저 살펴보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그 문화가 달라진 인간성을 반영하며 특수한 의식이 움트고 있었다면, 그것은 혁명 이후에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계승 · 발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수정주의 학자들은 구체제 하에서 대중문화가 융성했으며, 낭만적인 감성이나 일종의 평등 사상도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문화적 현상들이 혁명이 없어도 저절로, 장기적으로 지속될 수 있었을까? 구체제 하에서의 문화 자체가 혁명이 생겨나지 않을 수 없는 바탕이 되고 있다. 즉 구체제 하에서 평등 사상이 존재했다라는 말은, 그 문화 속에 내재된 혁명의 씨앗을 부정할 수 없다고 돌려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혁명 문화'가 완전히 새롭게 생겨났다는 정통주의적 입장에 대해서는 그리 수긍하지 않는다. 문화는 서서히, 그리고 지속적으로 변해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정주의 학자들의 '혁명 이전의 대중 문화가 혁명 당시의 문화보다 훨씬 더 활기가 있었고, 진정한 의미에서 대중적이다'라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다.

혁명에서의 폭력적 성향은 필요악인가 아니면 회피할 수 있는 것인가

조레스는 말했다. "혁명은, 진보라는 견지에서 볼 때 야만적이 사건이었다. 아무리 하나의 혁명이 고상하고, 건설적이며,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혁명은 인간의 발전 단계에서 역시 열등한 사건이었고 반은 짐승의 행동에 속하였다." 폭도들이 프랑스 혁명을 움직인 주요한 세력이라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또한 프랑스 혁명이 저지른 9월 학살과 방데에서의 비극, 낭뜨의 처형 등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혁명을 피를 위한 혁명이었다고 규정할 수는 없다. 혁명의 분위기 조성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되었다는 사실을 부각시킨다면, 혁명은 인류가 다시는 겪어서는 안될 끔찍한 사건일 것이다. 혁명은 폭력적 관성에 의해 진행되는 면이 있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혁명 당시에는 폭력을 강조하는 것이 혁명가들에게는 더욱 강력한 선동성을 부가해주었으며, 반혁명가들에게는 더욱 강력한 부정성을 인식하게 했다. '한 명을 죽이면 살인자지만, 만 명을 죽이면 영웅이 된다' 라는 말은 역사의 비극성을 암시해준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은 인류의 폭력성을 자각하게 함으로써 폭력에 대한 면역을 기르게 했음도 간과할 수 없다. 또한 프랑스 혁명은 언젠가는 넘어서지 않으면 안될 신분제도에 대한 도전이었다. 신분제도는 고대로부터 인간을 억압하며, 엄청나게 부당한 폭력 앞에 다수의 인간을 놓아두는 제도였다. 사회적 인간의 폭력은 더 큰 폭력을 경고하고 저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다. 이는 얼마 전 일어난 미국에 대한 9.11 테러를 상기하게 한다. 미국은 세계 질서 유지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목숨을 살상해왔는가. 그러나 무고한 미국인들은 9.11 테러의 희생양이 되었다. 더 큰 폭력은 그보다 규모가 작지만 끔찍하기는 마찬가지인 테러를 양상하였다. 프랑스 혁명도 이와 같은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

혁명을 움직인 것은 결국 필연인가 우연인가

수정주의 학자들은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이 프랑스 혁명 당시의 정치 향방을 바꾸었다고 말한다. 결국 혁명이 진행된 원인은 부르주아의 이념 따위가 아니라 그저 "정치가들이 정책 판단을 하는 과정에서 개입될 수 밖에 없는 환경적인 우연성과 이에 연관된 제반 현상들" 이라는 주장이다. 혁명의 과정에서 우연적인 사건이 있을 수는 있지만 프랑스 혁명 자체를 우연으로 치부하기는 어렵다. 더구나 그런 왕이 아니고 그런 왕비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가정 역시도 우연의 힘을 지나치게 신봉하고 있다. 이미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을 사실과 다르게 가정함으로서 그 존재 자체를 우연으로 만들 수는 없다. 또한 "인간사에는 논리가 작용하지 않는 부분이 너무 많다"라는 고찰 속에서도 역으로 프랑스 혁명의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비논리적인 인간들의 무책임한 혁명이라는 뜻이 아니다. 역사의 비논리적인 부분들을 인식하고 이를 바꾸어나가려는 의식 자체가 프랑스 혁명에서 배울 수 있는 점이다.

시대착오주의적 프랑스 혁명 해석이란 무엇인가

수정주의 학자들은 프랑스 혁명에서 민중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은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실 정통주의 학자들의 초기 연구에서 민중의 역할에 대한 고찰이 부족했음은 사실이다. 또한 수정주의 학자들은 정통주의자들이 혁명을 정당화하기 위해 구제도를 가정하고 그 제도의 문제점을 찾아내려고 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구제도의 결점들이 유기적으로 작용해서 혁명이 일어났다는 주장을 시대착오라 규정한다. 그러나 시대착오가 바스티유를 유명하게 만들었을 뿐이라는 가정은 미심쩍다. 그렇다면 이제까지 존재한 유명한 역사적 사건들도 시대착오적인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다. 바스티유에 있던 죄인들이 사실은 정치범이 아니라 잡범이었다는 사실이, 민중들이 바스티유를 함락했던 사건의 의미 자체를 완전하게 훼손시키는가? 전설과 허구와 시대착오, 그리고 후세 사람들의 오해를 제하고도 바스티유는 의미 있다. 혁명은 혁명의 순간들을 모아 이루어진 것이며, 바스티유는 그 순간 속에 있다.

혁명의 영향은 긍정적인가 부정적인가

"자유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죄악"이라고 수정주의 학자들이 부르는 혁명은 그 과격함과 지나친 선동성으로 혐오의 대상이 되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또한 왕정 복고로 돌아갔다는 점에서 혁명을 부정적으로 평가할 수도 있다. 이는 프랑스 혁명에 진보성이 없다는 부정적인 견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극단적인 역사적 변화가 궁극적으로 역사를 진보시켰는지, 아니면 퇴보시켰는지에 대한 판단은 개인에 따라 다를 것이다.

프랑스 혁명은 평화적 혁명에 대한 인간의 이상을 무참히 깨뜨린 혁명이었는가? 이 질문에 대해 나는 혁명적 이상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말하고 싶다. 그것은 프랑스 혁명의 부정적인 결과를 모두 무시하는 긍정적이고 정통주의적인 역사관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유효한 것은 혁명이 지닌 순도 높은 이상이며, 무엇보다 인간에 대한 인식의 새 지평을 마련했다는 역사적 사실이다.

3. 결론 : 우리의 혁명론에 대한 물음

이 책에서 대립되는 큰 명제는 다음과 같았다. 정통주의 학자들의 프랑스 혁명의 필연성과 그 위대성을 강조하고 있다. 반면 수정주의 학자들은 프랑스 혁명은 우연히 일어났으며, 그 개념은 후세의 역사가들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주장한다. 정통주의 학자들은 역사의 진보를 가정하고 계급투쟁과 부르주아 혁명론으로 인해 프랑스 혁명의 발생되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수정주의 학자들은 인간의 비논리성에 의한 역사의 후퇴를 인정하고, 객관적 사실들로 조합된 쿠테타로 프랑스 혁명을 설명한다. 전자가 역사를 거대한 전범이자 철학적 성찰의 장으로 삼는다면, 후자는 역사를 적나라한 객관적 사실들의 조합으로 보고 가차없는 비판을 가하는 것이다.

프랑스 혁명은 이 세상의 일부분으로 자신을 여기던 인간이 비로소 세상에 대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며, 절대적이었던 세계관을 변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으로 대표되는 서구의 자유주의적 역사 전통이 제 3세계에는 오히려 폭력과 억압으로 작용하였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저자가 서문에서 밝혔듯이 프랑스 혁명에 대한 긍정과 부정의 역사론을 종합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그 전통에서 소외되어 있다는 이유도 포함된다. 내가 프랑스 혁명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을 갖는 이유는 '서구적 전통'에 대한 동경 때문이 아니라 역사의 진보성에 대한 강한 믿음 때문이다. 그것은 내가 속한 대한민국의 현실에 혁명이 필요하다는 자각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 식의 혁명을 하기 위해서는 서구적 전범에 대한 탐구 역시 선행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나라에서 근대성을 논한다는 것은 매우 미묘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근대성이 제대로 체화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탈근대성의 징조가 나타나는 복합적인 양상을 띄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성은 환상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자신이 우리에게 있는가? 우리에게 근대적인 역사는 있는가? 근대를 모르면서 근대를 뛰어넘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역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친일에 대한 역사적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상황이 계속된다면 혁명의 길은 더욱 멀어질 것이다. 근대와 탈근대 사이의 막막한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는 우리의 근대, 우리의 역사에 대한 진지한 탐구가 필요할 것이라고 믿는다. 혁명이 아니라 개혁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현실은 역사적 자부심의 결여 때문이 아닐까. 혁명의 전통은 그런 의미에서 현재의 역사를 진보시킬 수 있다. 프랑스 혁명의 역사적 의의가 미래까지 계속 이어지리라고 믿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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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현대 사회 - 인간과 철학
찰스 테일러 지음, 송영배 옮김 / 이학사 / 2001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나의 행복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빈곤과 더러움, 그리고 비열한 안일이다.
그러나 나의 행복은 생존 자체를 정당화해야 할 것이다!""
나는 가장 경멸해야 할 인간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것은 최후의 인간(ulitmate man)이다.……
아아, 인간이 더 이상 어떠한 별도 낳지 못하는 때가 올 것이다.
아아! 더 이상 자기 자신을 멸시할 줄 모르는
가장 경멸해야 할 인간의 시대가 오리라."

니체, 『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중

예측불가능한 생의 불안

1. 불안의 요인들

나의 삶을 규정짓는 외적 조건들에는 국적과 나이, 성별, 직업, 출신 학교 등이 포함되어 있다. 나에게는 이러한 규정이 갖는 공통성을 뛰어넘는 특수성 또한 있다. 그것은 내가 어떤 현실적 ·문화적 환경에서 성장하였으며, 어떤 사람들을 만나 왔으며, 어떤 취향을 지니고, 어떤 비전과 꿈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리고 내가 나 자신으로 온전히 존재하고, 인정받는 것은 다분히 사회적 관계 속에서만 가능하다. 그런데 이 사회적 관계는 한편으로는 나 자신을 부정하게 만들고, '함의된 것처럼 보이는' 가치 속으로 나를 종속시킨다.

나는 사회라는 직선의 레이스 위에 서 있는 한 명의 선수이며, 나와 내 옆의 선수가 도달해야 하는 지점은 확실하게 보인다. 그러나 내가 왜 골인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 달려야 하는지 알려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골인 지점에 도달하면 나의 달리기가 멈출 수 있을지 장담할 사람 역시 아무도 없다. 그러나 나는 멈추어서는 안 되며, 뒤를 돌아봐서는 안된다는 일종의 '지상명령'을 듣는다. 나는 마치 달리기를 위한 도구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 골인 지점이란 사회적 관문을 통과하기 위한 시험이나 세속적인 성공, 안정의 획득, 정상적인 삶의 궤도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물론 나는 달리지 않을 수 있다. 아니, 다른 골인 지점을 정해놓고 달리기로 '결정'할 수 있다. 그러나 '지상명령'은 내가 속해 있는 사회의 지배적인 관념이므로, 따르지 않으면 어떤 불이익을 받게 되지 않을까, 라는 불안감이 엄습한다. 결국 나는 어떤 레이스이건, 마음 놓고 달릴 수 없다.

찰스 테일러의 『불안한 현대 사회』는 이러한 갈등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는 일단 불안의 요인으로 개인주의를 꼽았다. 근대 이후 인간은, 이성의 힘으로 자유와 평등을 어느 정도 이룩한 것처럼 보인다. 더 이상 우리에게는 복종해야 할 절대 군주나 사명이 없으며, 개인의 권리와 자유의 지평은 그 어느 시대보다 존중되고 있다. 그러나 더 이상 '우주적 존재의 일원'으로서 스스로를 자각할 수 없는 현대인은 실존의 부재감에 시달린다. 거대목표가 없는 현실은 파편화된 개인주의를 부채질할 수 밖에 없다. 진리와 선악의 절대구분이 사라진 현대에서는 누구나 상대주의적인 입장을 지닐 수 밖에 없다. 상대주의란 대부분의 경우 신념을 상실케하며, 눈에 보이는 뚜렷한 현실 문제에 개인을 종속시킨다. 이런 의미에서 현대의 인간은 니체의 '최후의 인간'과 비슷하다. 최후의 인간은 더 이상 "어떠한 별도 낳지 못하"고 "자기 자신을 경멸할 줄 모르는" 존재이다. 이들에게 있어 개인의 생존과 쾌락, 안정과 사회적 성취는 뚜렷하고도 결과론적인 목표이다. 그러나 이러한 목표들은 개개인의 삶을 지극히 단조롭고 평준하게 만든다. 일상화되고 반복되는 삶은 더 이상 새롭거나 창조적일 수 없으며, 개인을 권태 속으로 한없이 끌어들이는 것이다.

두 번째 불안의 요소는 도구적 이성의 지배이다. 산업화가 가속화되던 근대 시대의 노동자들은 그야말로 기계를 만들어내는 부품에 지나지 않았다. 발전해야 한다는, 변화해야 한다는, 결과물을 획득해야 한다는 것은 근대의 '지상명령'이었고, 개별적 인간은 자연을 변형시키며 이런 지상명령을 따르는 하수인에 불과했다. 결과적으로 현대의 인간은 그와 같은 무분별한 개발로 인한 생태학적 위기에 처해 있다. 자연은 무한한 재료가 아니며, 한번 훼손된 것은 빠른 시일 내에 결코 재생될 수 없다. 이는 도구적 이성의 성취물인 신제품이 나오기 무섭게 또 다른 업그레이드 제품이 나오는 현상과 대비된다. 교환가치와 물신성이 강력하게 지배하는 사회 속에서는 인간 또한 하나의 부품으로 전락할 수 밖에 없다.

물론 테일러가 주장하듯이, 현대문명의 놀라운 쾌거를 이룩한 근대의 업적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중세적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이성을 자각한 새로운 인간의 업적이기 때문이다. 테일러는 이러한 "도구적 이성의 원천"을 살펴보는 것이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환자의 총체적 상태를 고려하지 않고 단지 현상들에만 주목하여 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자부하는 현대 의학자를 예시로 든 것처럼, 도구적 이성은 마치 삶의 수많은 문제들이 정확하게 산출되는 기계적 해답을 얻을 수 있다고 착각할 수 있다. 또한 결과론적인 효용성을 지닌 존재만이 가치있다고 믿는 사회 속에서는 인간의 존엄이 훼손당할 수 밖에 없다.

세 번째 불안은 자유와 자결권의 상실에 대한 문제이다. 현대의 인간은 제도적인 존재이며, 사회성원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혹은 사회나 국가, 시장)역시 인간이 만들어낸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개개인은 이런 제도에 수정을 가할 수 없다는 자포자기식의 결론을 내리기 쉽다. 현실상 정치는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개인은 이런 현실정치의 결과 속에서 살아가지만, 그 과정 속에 개입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것처럼 느낀다. 이러한 개인들은 점차 현실정치와 멀어지며, 최소한으로 행할 수 있는 정치적 행사권마저 포기하게 된다. 지극히 개인주의적 삶에 도취되어 있으면서, 거대조직이나 기관에 대해 아무 것도 행사할 수 없다는 무력감을 느낀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2.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테일러는 이러한 불안감들을 분석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가 제시한 첫 번째 대안은 "자기진실성의 이상"이다.

현대의 이상이란 무엇일까. "부러워해야 할 것은 더 이상 영웅호걸담이 아니라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은 성공일 뿐"이라고 역설하는 블룸의 말처럼, 현대인의 이상은 더 이상 고결하고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앞에서 예를 든 레이스의 경우처럼, 나는 보다 빨리 골인 지점에 도달해야 하고 탈락하지 말아야 한다. 때로는 골인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서 타인에 대해 비윤리적 제재를 가하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서, 출발 지점이 동일하지 않을 수 있다는 문제가 대두된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평등하지 못한 출발점을 '어쩔 수 없는 악조건'으로 여기고, 어떻게 해서든 이 상황에서 벗어나길 원한다. 또한 '억울하면 출세하라'라는 식의 말이 통용되기도 한다. 이는 성공과 생존이라는 지상목표를 위해서라면, 어떤 식의 비윤리적인 수단도 가능하다는 식의 결론을 이끌어낸다. 그러나 어떠한 개인이 제도의 허점이나 우연성으로 큰 부나 권력을 쥐게 된다 해도, 이는 개인의 명백한 탓이라기 보다 사회 제도의 모순에 기인한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어쨌든 이런 식으로 드러난 현실 문제들은 이러한 '현대적 의미의 이상'을 더욱 왜곡시킨다. 그러나 개인에게 있어 제도의 모순을 파헤치는 것보다는, 현실논리에 순응하는 것이 훨씬 손쉬워 보인다. 또한 앞에서 말한 세 번째 불안 요인에 의하면, 제도 앞의 인간은 스스로를 더욱 무기력하게 느낄 수 밖에 없다. 이는 사회전반에 팽배한 패배주의를 더욱 심화시키며, 제도적 모순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버린다.

이런 상황에서, '자기 진실성의 추구'란 개념은 의미심장하다. 자기 자신에게 진실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어느 시대에나 합의된 사회적 윤리가 반드시 존재한다. 이는 수많은 철학가와 사상가가 인간의 존엄과 인권, 자유과 평등, 정의에 대해 논하고 행하기 위해 고심했던 흔적만 봐도 명백하다. 그러나 현실논리라는 거대한 장벽 앞에서 사회적 윤리를 주장하는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명확한 불평등이나 부조리 앞에서도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수 있다면 이를 외면해버릴 가능성이 많다. 인간적 동기란 그렇게 "도덕적 이상과 아무런 연관이 없어도 인간들을 행위하게 만드는 비도덕적인 것들일 뿐"인 것이다.

자기 진실성은 일단 사회와 도덕 문제에 눈감지 않으며, 부당함을 느낄 때 거부감을 표할 수 있는 성질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보다 넓은 의미의 사회적 연대가 지원되지 않는다면 이러한 진실성을 갖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또한 자기 진실성이라는 것은 테일러가 말하고 있는 세 가지가 일단 전제되어야 한다. 모든 입장과 관점을 상대주의적인 것이라고 치부하는 사람들에게도 자기 진실성이란 이해할 수 있는 관념일 것이다. 자기 진실성이란 규정된 가치의 추구나 증명은 아니기 때문이다. 누구나 타인의 삶에 방식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자기 자신만은, 자신의 삶의 방식을 규정하고 의미지을 수 있다. 문제는 원하는 대로 살지 못하며, 그것이 어쩔 수 없다는 체념 속에 자신을 묶어두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나왔고,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는 삶의 행로를 따르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자신을 사회라는 거대의 바퀴의 살에 지나지 않다고 규정짓는 것이 문제다. 요는, 무엇을 하느냐보다 그것을 어떻게 느끼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결국 내가 택해 일생을 영위하는 일에 회의감만 느끼고, 일상의 무력감 속에 온전히 자신을 내맡기는 삶은 진실하지 못한 삶이다. 테일러는 자기 진실성이란 정서와 느낌이라고 말한다. 이는 "내면의 목소리"이며, "내적 본성과의 접촉"인 것이다. 자신의 삶과 본연적인 독자성에 진실하다는 것이 나 자신에게 진실한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우리는 다양한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가치들을 끊임없이 논의하여, 진실성을 발굴해야 한다. 테일러는 이를 "투쟁"이라고 표현한다. 이 투쟁은 전투적이거나 논쟁적인 것이 아니라 창조적이고 다양한 지평을 함의하고 있는 것이다. 더 많은 사람들의 더 다양한 가치를 위하여 투쟁은 계속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예술은 이러한 자기진실성을 보여주는 한 방법에 속한다. 근세 이후, 예술은 더 이상 미메시스가 아니라 독자성을 표출하는 총체적 창조품이 되었다. 세계를 표현한다는 말은, 세계 안에 숨어 있는 총체성을 발견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예술은 꼭 예술작품을 통해서만 보여지는 것은 아니다. 예술적인 삶도 있으며, 예술적인 일상도 있을 수 있다. 예술가란 일상과 삶 속에서 총체적으로 자기 진실성을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현실은 그다지 낙관적으로 볼 수 없다. 치열한 경쟁과 생존의 투쟁이 끊이지 않는 현실에서 자기 진실성을 갖는 것은 그렇게 쉬운 문제는 아니다. 나의 존엄을 지키고, 나의 독자성을 발현할 수 있는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것, 내가 원하는 여가 생활을 즐기는 일 등은 기본적으로 안정적인 생활이 전제되어야 한다. 눈앞에 닥친 생존의 문제는 원하는 일을 할 수 없는 걸림돌이 된다. 일상적 삶 속에서 이러한 충돌은 빈번하게 일어난다. 결국 현실은 꿈과 조화시킬 수 없으며, 생존 문제는 이상과 조화시킬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떤 식의 대안을 찾아야만 하는가.

정치의식을 함양하는 것은 자기 진실성의 추구에 동반한다. 테일러는 특히 파편화된 개인주의를 경계한다. 제도에 대한 개인의 무력감은 종종 '공동체적 이상'을 터무니없는 환상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공동체적 이상'은 보다 많은 사람들이 제도의 수정에 참여하고, 보다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하고 이를 즉각 반영할 수 있는 사회이다. 테일러는 "올바른 형태의 민주적인 자발적 행동"만이 도구적 이성의 지배 권력을 되잡을 수 있다고 말한다. 테일러의 두 번째 대안이 곧 "자발적 정치운동"이다. 이 정치운동은 소규모 집단들 사이에서도 일어나야 하지만, 거대 집단 안에서도 일어나야 한다. 전자는 다원화된 가치를 서로 인정하고 조율하기 위함이고, 후자는 보다 투명한 사회구조를 만들기 위함이다. 근본적인 사회 구조가 평등한 기반 위에 세워져 있지 않으면, 개인의 자기진실성 추구는 매우 곤란해진다. 나의 정체성은 내가 속한 사회 속에서, 내가 맺고 있는 인간 관계 속에서 드러날 수 밖에 없다. 많은 사람들의 현실이 자신의 이상과 다르고, 이상을 추구하는 일이 현실을 배반하는 결과를 도출하는 사회에서 인간의 목표란 살아남는다는 것 외에 무엇이 있겠는가. 삶의 목표를 끊임없이 갱신하고, 서로의 목표를 존중하면서 살아가는 사회를 만드는 것은 능동적인 개인들의 몫이다. 결국 이러한 공동체적 이상을 실현하는 것은 제도적 규정이 아니라 개개인의 정치적 의식인 것이다.

3. 창조적이고 다원화된 개인주의를 위하여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는 다르다. 이 책에서 다소 부정적으로 언급되기도 하였지만, 진정한 의미의 개인주의는 파편화된 생의 추구가 아니다. 인간관계가 분절되기 쉽고 미래가 불확실한 현대 사회에서는 누구나 개인주의를 추구할 수 밖에 없다. 문제는 어떤 개인주의를 추구하냐는 것이다. 타인이라는 이름의 개인을 존중할 때 자신의 개인성도 존중된다. 개인주의는 보다 넓은 의미의 관용성이 함의된 개념이다. '똘레랑스'라고 흔히 표현되는 관용은 공동체적 이상을 추구하기 위한 기본적인 요소이다.

또한 각각의 개인들은 보다 넓은 의미의 정체성을 획득해야 한다. 앞에서 논의된 자기 진실성을 추구하는 일은, 곧 정체성을 확인하는 일이다. 속해 있는 집단이나 외적 조건들에 의해서 규정되는 개인이 아니라, 무엇을 추구하고, 어떤 총체적인 인간관을 가지고 있는지에 의해 평가받아야 한다. 나아가 창조적인 개인들은 서로가 공감할 수 있는 사회적 지평을 더욱 넓혀가야 한다. 예를 들어 유럽의 복지국가 같은 경우에 소득차이에 따른 세금규정을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이는 사회 구성원들의 평균 복지 수준이 높다는 것을 의미하며, 어느 정도의 평균적 합의하에 자유경쟁의 논리를 펼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런 경우 개인의 경제적 성취욕이 감소될 수 있다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겠지만, 전반적인 문화 수준은 당연히 높아질 수 밖에 없다. 높은 문화 수준이라는 것은 개인들이 자신의 여가를 충분히 누릴 시간이 있으며, 자신이 원하는 분야에서 일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으며, 타인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은 상태를 의미한다. 결국 어느 정도의 경제적 평등이 이러한 문화적 상승 효과를 가져온 것이다. 이런 국가에서 추구되는 개인주의는 다원화된 개인주의일 수 밖에 없다. 개인들이 추구하는 목표가 동일한 이상이 될 수 없으며, 그 이상을 성취하는 데 있어 심각한 장애가 따르지 않는다. 따라서 이런 개인들이 추구하는 이상은 창조적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사회에서는 개인적 이상이 아닌 사회적 이상 또한 궁극적으로 추구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을 갖추었을 때, 불안하고 예측불가능한 이 현대사회에서 보다 자유롭고 정의로운 삶을 누릴 수 있게 되리라고 나는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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