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괜히 기분이 들떠서 맨부커상 기사를 죄다 찾아 읽어보고 오늘은 아침에 남편이 출근하기 전에도 뉴스를 같이 보며 번역가가 어떻구 대화를 나눴다. 남편 주위의 누군가가 한국어를 6개월 배운 번역자라고 했나보았다. 그럴리가, 어제 기사는 6년이었고, 오늘 기사는 9년이다.ㅎㅎ 기사가 넘쳐나고, 기분에 들떠 기사들을 보는 독자들은 6년을 6개월로 읽기도 하는 모양이다. 아니면 머릿속은 6년이었는데, 입이 6개월로 말했거나, 어쨌든 그 와중에 나는 한강의 새 소설이 나올 예정이고 그 소설은 '하얀' 것들에 대한 이야기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소설 제목 '흰'을 보면서도 왜 '흰색'이라고 연관을 짓지 못하고 기사를 보고서야 아..하고 터지는 소리를 했다. 그래서 마음이 급해졌다. 사실 나는 이 소설 <흰>을 알기 전에 '흰'것들을 소재로 페이퍼를 하나 작성하기로 맘 먹었기 때문이다. 양심에 걸고, 결단코 소설 <흰>을 알기 전에...ㅎ
누구는 로얄 알버트 홀에서 맨부커상을 그렇게 암시랑토 않다는 표정으로 수상하는 마당에 페이퍼 한 장을 쓰면서 이렇게 전전긍긍하고 있다니...혼자서 마구 웃는다. 유쾌한 아침이다. 핫핫핫..그러니까 나는 표지가 '흰' 내가 좋아하는 책들을 모아 보려고 했던 것이다. 내가 '흰' 것들을 얼마나 희게 관리하기 위해 노력하는지, 그 '흰'표지의 책들이 얼마나 재미있고 좋은 책인지...
흰표지 책 첫번째 는 <안녕 다정한 사람>이다. <안녕 다정한 사람>을 읽을 때는 반드시 손을 씻는다. 비눗칠을 아주 꼼꼼하게 한다. 그러고도 모자라 장갑을 끼고 읽을까, 이런 생각을 하기도 한다. 책장을 넘기는 데 불편할 것 같아 아직 장갑을 끼고 읽은 적은 없지만 <안녕 다정한 사람>을 읽을 때 나의 자세는 적어도 그렇다는 이야기다. 커버를 씌워서 읽는 것은 커버를 씌워서 읽어보고서야 왠지 맛이 안난다는 걸 알았다. 맨손으로 진짜 표지를 만지는 즉물성도 독서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 같다. 나는 <안녕 다정한 사람>을 좀 성스럽게 대우한다. 내가 느끼는 이 성스러움의 이미지는 표지가 희어서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뭔지 때가 타면 안될 것 같은 함부로 만져서 오염시키면 안될 것 같은 그런 경건한 마음으로 이 책 속의 한 명 한 명을 만나러 가는 것이다.
두번째 '흰'책은 <내 옆에 있는 사람>. 사실 이 책은 설명이 필요 없는 책이다. <안녕 다정한 사람>이 반짝이는 설레임의 책이라면 <내 옆에 있는 사람>은 때 낀 청동거울에 비춰 보는 내얼굴 같은 책이라고나 할까. '흰'책이지만 속지는 재생종이를 썼고, 사진은 그 보다 더한 엔틱느낌들이다. 옛날 사각 도시락에 보리밥을 담고, 달걀 후라이를 얹고 쏘세시 반찬을 담아 행'복하게 퍼먹듯 나는 이 책을 먹는다. '흰'책이지만 나는 이 책 앞에선 손을 안 씻어도 될 것 같은 편안함을 느낀다. 이 책 옆에서 나는 늘 '사랑 받는 사람'임을 느낀다. 이 보다 더 좋을 수는 없는 것이다.
세번째 '흰'책은 <삿포로의 여인>이다. 사실 이 책은 '흰'이라기 보다 '은회'나 '은흰'이다. 하지만 삿포로 하면 눈이 아니던가, 최근에 그 곳으로 떠난 여인이 보내 오는 사진을 보니 그 곳은 눈밭이 아닌 시절엔 꽃밭이더라만은. <삿포로의 여인>은 대관령과 삿포로라는 두 공간을 이어주는 이야기이기도 하므로 <삿포로의 여인> 표지는 '은회'이지만 '흰'의 감각적 정서를 공감한다고 보면 되겠다. 더구나 이 책은 순정한 마음으로 읽어지거나, 불결한 마음으로 읽다가도 순정한 마음이 되거나 하는 책이므로 무엇보다 '흰'스러운 책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이 책을 들고 다니며 읽었으므로 할 수 없이 커버를 해서 읽었다.
네번째 '흰'책은 사실 '회'이다. '은회'까지야 우겨서 '흰'스럽다고 할 수도 있었는데, '회'를 '흰'에 넣으려니 좀 죄송한 감이 없지 않다. 사실 '흰' 페이퍼를 이러구러 미루고 있었던 이유는 더 '흰'스러운 책이 나타날 때 까지 기다리려고 했던 까닭이다. 그런데 어제 오프에서 산 책이 너무 혼자 보기 아까워 오늘 '흰'페이퍼에 억지로 끼워 넣는다. 그러니까, 나는 어제 식구들이 다 잠들길 기다려 이 책을 읽으려고 했으나, 식구들은 쉬이 잠들어 주지 않았다. 할 수 없이 특단의 조치로 나는 이 책을 들고 화장실로 들어가기에 이르른다. 집안에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이 오직 화장실 밖에 없는 현실, 이 것이 가족을 이루고 사는 주부들의 현실이 아니던가. 나만 그런가?
어쨌든 나는 이 '회'의 책, 드러난 젖가슴을 와인색 띠지로 가린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을 그렇게 화장실에 앉아서 열심히 읽었다. '회'라도 정성들여 손을 씻고 경건한 마음으로 읽었다. 아무튼 이 책은 무조건 혼자서 조용히 읽어야만 할 것 같았다. 결론은 다음 페이퍼로 넘긴다. 며칠 좀 쉬었다가겠다.다른 번역본도 이렇게 꿀재미인지 찾아 읽어 보고 이야기 해야 겠다. '흰'페이퍼가 '회'로 끝나 구라친 이 마음 어디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죄송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