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마에 갔다가 나와서
봄나물을 뜯고 싶어 밭둑 언저리에 쪼그려 앉았다.
이런게 꽃샘이지 싶게 바람이 찼지만
기분은 좋았다.
작은 호미를 늘 싣고 다니므로
손쉽게 냉이는 두어 줌을 캐고

일본판 리틀 포레스트에서 엄마가 집 나가기 전에 해놓는
머위된장의 머위
김치처럼 생으로 버무려먹는 이고들빼기
솜털 보송한 개망초
예쁘지만 맛은 없을 것 같은 달맞이는
그냥
들여다만 보았다.

우리는 달맞이와 개망초는 잡초 취급하지만
다 먹을 수 있는 나물들이라고 나물도감에 나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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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이에 마사시의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제목을 미처 외우지 못했는데 비슷하게 안 외워질 것 같은 「우아한지 어떤지 모르는」이 나왔다. 쉬운 것 같은데 은근히 헷갈리는 제목들이다.

「여름은 오래 그 곳에 남아」가 정적이면서 고요한 소설이라면 「우아한지 어떤지 모르는」은 기본적인 톤은 비슷하지만 조금 더 가볍고 위트 있다.
실실 웃어가며 꿀잼이네, 동네방네 마쓰이에 마사시 신간 나왔어 카톡해가며 산만하게 즐겁게 읽었다.

에드가 앨런 포의 「어셔가의 몰락」에 ‘거소의 성격이 일반적으로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의 성격으로 인정되는 것과 완벽하게 일치한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우아한지 어떤지 모르는」에 나오는 주인공이 그런 사람이다. 머무는 공간이 중요한 사람. 자기의 정체성을 거소에 반영해 구현하려는, 더 나아가 삶의 디테일에 집착하는 남자다. 삶의 미시성에 예민한 사람들 대부분은 로맨티스트일텐데 영화 「파리로 가는 길」에 나오는 주인공이 제철요리에 집착하듯 로맨티스트들은 삶의 속도보다는 머묾, 즉 여유에 방점을 두는 사람들이다.

「우아한지 어떤지 모르는」에 나오는 주인공은 오십대를 바라보는 편집자인데 르클린트의 조명기구와 덴마크 엔틱가구를 사고 로열코펜 하겐의 이어플레이트를 사는 것을 즐거움으로 아는 남자다. 그냥 공원이 아니라 자연림이 남아 있는 공원 옆에 살고 싶어하는 남자고 취향이 달랐던 아내와 삶의 적당한 순간에 혼자 살게 된 운이 좋은 남자이기도 하다.

그가 우아함을 추구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겉보기에 제법 우아해 보이는 혼자가 된 그. 마침내 눈치보지 않고 자신의 스타일대로 살아보려고 한다. 그런 그 앞에 느닷없이 닥친 우아와는 거리가 먼 노년의 삶과 다시 함께의 삶은
삶의 아이러니를 던져준다. 누구나 맞이 하는 스스로의 노년도 버거운데, 미리, 이전에 감당해야 하는 부모의 노년은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삶의 질에 집착하는 작가답게 대단히 매력적이고 영리한 결말을 보여준다.

작가 마쓰이에 마사시는 건축학도를 꿈꾸었지만 문학을 전공하고 편집자의 길을 걷게된다. 하지만 그는 취미로 설계도를 그리고 건축공부를 꾸준히 해서 건축가가 주인공인 여름은 그 곳에 남아를 집필할 때도 건축에 대한 자료 조사를 따로 할 필요가 없었을 정도라고 하니 그의 건축에 대한 사랑을 짐작할 수 있다. 마쓰이에 소설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건축가가 가구 디자인을 겸하듯 마쓰이에의 관심사도 공간을 안을 채우는 디테일에 뻗어 있다.

여름은 그 곳에 남아 만큼은 아니지만 우아한지 또한 건축용어나 건축가, 디자이너, 동식물의 이름이 많이 등장한다. 한 번은 그냥 읽고 한 번은 찾아가며 읽었는데 덴마크 황실에서 쓴다는 조명기구 르클린트나 덴마크건축가이자 가구디자이너 폴 키에르홀룸, 핀란드 건축가 알바 알토, 샌프란시스코에서 유명하다는 사워도 브레드 같은 것을 찾아 보았다.

개인적 취향의 재미있는 부분들은, 또 이런 것이었다. 다니자키 준이치로, 다자이 오사무 작가의 이름이 군데군데 툭툭 튀어나오는 것 그것이 장소 앞에서이기도 하고 상황 속에서이기도 하고 미래의 장면이기도 하면서
심심할 수 있는 소설에 윤기를 더해준다.

˝다자이 오사무가 몸을 던져 떠내려간 상수는 당시만큼 물살이 빠르지 않았다˝ p73

˝이럴 때 다니자키라면 어땠을까. 어떻게 혼자 보내겠습니까라며 반강제로 따라갔을까. 적어도 다니자키의 소설에는 이렇게 어중간한 배웅장면은 없었지˝p74

˝외톨이가 된 류 지슈(오즈 야스지로 영화 주연배우)에게 쓸쓸하시겠어요 하고 창너머로 인사하는 것은 친절한 이웃집 아주머니가 아닌가˝p245

˝펜던트 조명은 르클린트 제품을 방마다 각각 다른 타입으로 달기로 했다...
지난 두어 달 동안 지출이 꽤 컸지만 나는 만족했다. 언젠가 여유가 생기면 폴 키에홀름이 디자인한 등나무 헌팅 체어를 이층 다다미방에 놓고 매미소리를 들으며 낮잠을 자고 싶다. 사십대 후반에 이렇게 물욕 넘치는 꿈을 꾸다니, 헤어진 아내는 물론 아들에게도, 아니, 가나에조차도 도저히 말할 수 없지만˝p118

˝나는 가족이 아니라 좋은 집을 원하는 게 아닐까˝
p120


˝폴 키에르홀름(Poul Kjaerholm, 1929~1980)
폴 키에르홀름은 덴마크 가구 디자인의 전통을 세운 카레 클린트의 제자다. 클린트는 새로운 미학을 찾기보다 기존의 우수한 디자인을 더욱 연구해서 기능적으로 개선하는 디자인 방법론을 가르쳤다. 그러나 키에르홀름은 재료부터 차가운 금속을 사용했고 기능보다는 빈틈없는 미학적 긴장에 몰두해 북유럽 디자인 전통에서부터 벗어나 있다. 키에르홀름이 개선한 것은 기능이 아니라 바우하우스의 절제된 미니멀리즘 미학이다. 그는 초기 모더니즘 미학을 더욱 가다듬고 정제해서 순수한 조형의 극단을 보여주었다. 폴 키에르홀름은 자신이 사는 작은 마을의 가구 장인에게 가구 제작을 배웠다. 코펜하겐으로 가서 대니시 스쿨 오브 아트 &디자인에서 가구 디자인을 배우고 동시에 왕립 코펜하겐 미술학교의 카레 클린트 수업도 들었다. 

그러나 그에게 더 큰 영향을 준 것은 미국의 찰스와 레이 임스, 바우하우스의 미스 반 데어 로에, 데 스틸의 게리트 리트벨트였다. 학생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낸 키에르홀름은 1950년에 PK0 의자를 발표했는데, 유기적 형태와 합판을 재료로 한 것에서 임스 부부의 영향을 읽을 수 있다. 1950년대에 그는 덴마크에서는 매우 급진적으로 보이는 성향의 가구를 연속해서 발표했다. 그의 대표작인 PK22는 미스 반데어로에의 바르셀로나 의자를 더욱 극단적인 미니멀리즘 형태로 밀어붙여 디자인한 것처럼 보인다. 접합 부위가 전혀 안 보이게 하려는 노력은 디테일을 강조한 미스 반데어로에의 강령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PK24는 선으로 보여줄 수 있는 가장 미니멀하고 우아한 아름다움이 구현됐다. 폴 키에르홀름은 아르네 야콥센과 함께 전후 북유럽 디자인의 새롭고 급진적인 방향을 보여준 대표적인 디자이너다.˝ 월간 디자인

˝샌프란시스코 사워도우 브레드

거의 금문교만큼이나 유명한 샌프란시스코의 상징인 사워도우 빵은 1849년, ‘골드 러쉬어’들이 밀려들어오고 빵집이 크게 늘어나면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제빵용 효모(이스트)가 발명되기 전인 이 시대에 빵을 부풀려 구우려면 ‘첫반죽(starter)’이 필요했다. 즉 물과 밀가루로 만들어 발효시킨 반죽을 한번에 다 구워내지 않고 조금 남겨두었다가 그 다음 번 반죽을 만들 때 섞는 것이다. 부풀려 구운 빵은 아마도 수천 년 전에 이집트인들이 우연히 발견한 것 같다.

샌프란시스코로 온 빵장이들은 자신들이 구운 빵에서 어딘가 다르고 정의할 수 없는 맛이 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누구는 그것이 샌프란시스코의 안개 때문이라고 했다. 누구는 인근의 포도 재배 지역에서 가져 온 야생 효모 때문에 빵맛이 바뀐 것이라고 의심했다. 그들이 붙인 사워도우(시큼한 반죽)라는 이름이 그대로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것이다. 샌프란시스코는 물론 다른 지역에도 사워도우를 만드는 빵집은 많지만, 진짜 원조 샌프란시스코 사워도우는 프랑스의 부댕 가에서 만든다. 이 전설적인 빵집에서는 1849년에 처음 만들어진 ‘첫반죽’으로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사워도우 빵을 만든다.˝ 죽기전에 먹어봐야 할 세계음식백과

알바 알토 주택
폴 키에르홀룸 의자
르클린트 펜던트 조명
영화 파리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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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할 때부터 눈여겨 보았던 맨체스터 바이 더 씨를 보았다.
괜찮을 것 같아, 볼까?라는 마음과 넘 무거울거 같아, 안볼래라는
마음이 반반이던 영화였는데 눈앞에서 하고 있길래 굳이 피하지
않았다. 역시나 많이 묵직한 영화였다. 개봉관에서 보고 나왔다면
같이 본 누군가와 말 없이 술 한 잔을 기울이고 터벅터벅 걸어서 집으로 돌아와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잠을 청했을 것 같다.

몇 년 전에 본 영화 ‘러덜리스‘와 줌파 라히리의 축복 받은 집에 나오는 첫 번째 단편 ‘잠시 동안의 일‘이 떠올랐다. 세 편 모두 그럼에도 살아가야 하리라의 슬픔의 정서에 맞닿아 있다..

잠시 동안의 일이었지만, 생이 지속 되는 한 고통이 삶을 짓누르리라.
살아 있는 한 떼어낼 수 없는 슬픔 또한 지나고 보면
잠시의 일에 불과하리란 희망을 가져야 할까,
어느 곳에도 그런 기운은 없지만 그러함에도 묵묵히
하루하루를 견뎌나가는 약한 존재의 강인함이 처연하다.

주말에 봤는데 장면이 계속 떠오르고
인물들의 마음자리가 짚어진다.
여운은 길고 할 말은 없어지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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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릿아릿하다를 사전에서 찾으니

몹시 아린 느낌이 있다.

로 나온다.

다시 아리다를 찾으니 생각보다 강한 표현이다.

살갗이 찌르는 듯이 아프다,
마음이 몹시 고통스럽다,

이렇게 설명된다.

뭐지? 내가 떠올린 아릿아릿함은 몹시 고통까지는 아닌 것 같은데...그래도 알알하고 맵싸한 정도의 약한 고통정도 있었던걸로 하고 넘어간다.


장을 봐서 김치를 담느라 실한 마늘 여러 쪽을 까다보니

아릿아릿하다가 떠올랐다가 아니라

그냥 거리를 걷는데 숨을 쉬는데 마음이 계속 아릿아릿 저릿저릿했다.

며칠째 그렇다.

장기전에 돌입하기 전에 준비작업으로 김치를 담았다.

나는 마늘정도 까주고 옆에서 구경만 했지만

색다른 경험이다.

밥을 같이 먹는 것 아니고 밥을 같이 해먹는 건 뭔가 좀 더

다층적인 느낌이 난다.

시간이 감정이 오밀조밀 켜켜이 쌓이는 느낌이다.

닭볶음탕, 만두, 잡채...한 가지를 먹으며 다음에 뭘해먹을

건지 의논한다.

실천해 옮기지 못할지라도 분위기는 즐겁다.

밤이 길다.

정신이 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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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중위의 여자를 읽으며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이런 말들에 대해 생각한다.

소설을 시대사적으로 세워놓고 분석해보는 것,
인물의 성격이나 상황을 골똘히 생각해보는 것,
작가의 전기를 살펴 작품에 적용시켜보는것,
무엇보다 책을 읽는 것,
작가가 되어보는 것, 주인공에 빙의 되는 것,
책수다를 떠는 것,
너무 좋은 책을 혼자만의 비밀로간직하는 것,
인간실격,사양,미친사랑들에 나오는 이상한 캐릭터들 조차도 다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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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슴아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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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인지 비인지 안개인지 모를 비바람 속에 앉아있으려니
아슴아슴하다,라는 단어가 저절로 떠올랐다.

˝용아, 아슴아슴하다라는 단어가 있나 찾아봐˝
˝있어요,언니.˝

용이 읽어주는 아슴아슴하다의 뜻에는 아래 세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흐릿하다
몽롱하다
희미하다

떠오른 말들과 인식된 말 사이의 거리가 없다고 느껴질 때
기분은 흐릿하지도 몽롱하지도 희미하지도 않다.
명쾌해서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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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브레멘에 가고 싶어

브레멘을 처음 인식한 때는 초딩시절 고전읽기 목록에 있었던 ‘브레멘 음악대 삽화‘였다. 두번째는 만병초를 검색하다가 브레멘의 어느 공원에 만병초가 그득그득 핀다는 사실을 알고, 아! 브레멘 했었다.
세 번째는 파울라 모더존 베커 뮤지엄이
브레멘에 있다는 걸 알고
만병초가 필 때 브레멘에 갈 수 있으면 좋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와인을 마시다 혼잣말인 듯 무심코 내뱉은 말.

브레멘에 가고 싶어.
왜?
찾아본지 오래되어 가물가물한데 브레멘인지 그 근처인지에
파울라 미술관이 있어.

가자!
진짜?
그럼, 나랑 함께인데 안되는 게 뭐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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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관계하지 않아서 관계가 유지되는 관계

관계라는 말이 가진 의미가 서로 엮인다일터인데, 관계하지 않았기에 거리가 유지되고 관계가 이어질 수 있었다는 아이러니가 뼈아프기도, 감사하기도 한 시간이다.
관계하려고 했을 때 관계가 깨질 것이라는 예측도 계산도 하지 않았다. 단지 상대가 싫어할 만한 일을 하지 않았을 뿐이다. 노력하지 않았고 저절로 그리 되었다.

노력해도 그러기 힘든 관계가 있고 자연스럽게 관계가 유지되는 관계가 있다. 그것이 현실이라 마음이 간질간질하다.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을 읽으며, 나에겐 처음부터 낭만적 연애관이 또는 사랑관이 없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에 대한 기대치가 낮으면 갈등할 일도 불화할 일도 없다. 관계에 대한 기준이 없으면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 할 일도 없다. 비정상이라고 질책할 일도 괴로워할 일도 없다.

정이현의 산문집 ‘우리가 녹는 온도‘가 나왔다. 대개 낭만적 사랑에 빠졌을 때의 남녀는 녹는 온도가 다른 경우가 대부분인 것 같다. 그 다름에 매력을 느껴 열정적인 사랑에 빠지기에, 녹는 온도가 다르다하더라도 당시의 뜨거움 때문에 같이 ‘녹고‘만다. 누구의 온도 때문에 ‘같이‘녹게 되었는지는 구별이 불가한 채로 서로 비슷하다 느낀다.

비슷한 온도의 사람과 같이 있을 때 마음도 녹는다. 자연스러운 나다움이 드러나고 상대가 그것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좋아한다는 믿음때문에 나를 긍정하게 된다. 다른 온도의 사람과 있으면 차가움에 상처받고, 뜨거움에 화들짝 물러나게 된다.

관계하지 않음으로 유지되는 관계는 충성심이 베이스가 된다. 관계하지 않겠다는 의지와 기대치가 없는 맹목적인 헌신이 관계를 유지하게 한다. 관계에서 ‘서로‘라는 의미를 제거하면 관계가 유지될 수 있다는 게 관계가가진 아이러니다. 정이현의 소설집에서는 낭만적사랑이 어떻게 그려지는지, 우리가 녹는 온도에서는 어떤 일상을 산문으로 끌어왔는지 두 권을 같이 읽어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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