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리셔스 샌드위치 - 서른살 경제학 유병률 기자가 뉴욕에서 보내온 컬처비즈에세이
유병률 지음 / 웅진윙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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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 종전 이루 CIA는 자율성과 자유로운 행위를 강조하는 예술사조인 추상표현주의가 미국적 가치와 맞아 떨어지고, 또 동구권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맞설 수 있다고 보고 이를 집중 지원했다... 특히 추상표현주의의 영웅으로 꼽혀온 잭슨 폴록은 CIA의 최대 수혜자였다." <세계 명화 비밀>, 모니카 봄 두첸-19쪽

첼시의 갤러리들은 거리가 황량하기 때문에 그 안이 더 예술적으로 보입니다. 왠지 상업적인 것과는 단절된 것 같고, 세상과 격리된 채 오로지 예술 자체만 추구하는 듯한 느낌입니다...그러나 이런 배려 속에도 경제적인 마인드가 교묘하게 숨어있습니다. 미술가이자 비평가인 브라이언 오 도허티는 <하얀 입방체 안에서>라는 책에서 "하얀 입방체로 만들어진 전시 공간은 중성적이고 초월적인 신화적 장소가 아니다...이런 구조는 다른 일반 상품들에 대한 예술품의 배타성을 강화시켜 예술품을 색다르게 보이게 하고 가격을 비싸게 하는 이데올로기적 장치"라고 했습니다.-29쪽

"유레카! 그것은 오랜 기간 피나는 노력의 산물이다"
이노베이션은 진부한 일상 안에 들어있는 흥미로움에 대해 아주 작지만 서서히 영감을 쌓아가고 축적하는 과정이다. 이것은 마치 진주조개가 자신의 속살을 상처내는 모래를 겹겹이 에워싸는 과정에서 마침내 진주를 탄생시키는 것과 같다. 혁신은 이렇게 오랜 시간을 거쳐 열심히 일하는 과정에 서서히 스며드는 것이다.
'아하!'의 순간은 기나긴 시간의 생각과 연구에서 나온다. 성공하는 기업가는 뮤즈가 그들에게 다가와 키스하며 명철한 아이디어를 줄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일을 하러 간다.-82쪽

요즘 미국의 은퇴자들은 여생을 보낼 최적지로 대학촌을 꼽습니다...나이 들수록 문화현장과 가깝게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덜 늙습니다. 각양각색의 문화 옆에 있어야 늙어서도 뭐라도 배울 수 있고 새로운 도전을 해볼 수 있습니다. 그래야 시간이 많다는 게 괴롭지 않습니다. 문화를 알아야 인생의 참맛도 느낄 수 있습니다. -132쪽

얼마 전만 해도 돈과 체면을 한 손에 움켜질 수 있었던 전문직이 이제는 단순사무직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봉급이 줄고 체면이 떨어져서가 아닙니다. '일'과 '자기실현'에 대한 철학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한참전에 사람들은 거대한 기업조직 속에서 표시도 안 나는 자신의 미미한 모습에 대해 끔찍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스스로 하고싶어 미칠 지경인 일을 자신이 정한 시간에 몰입해 하고, 주어진 업무가 아닌 스스로 무엇인가 아이디어를 내 직접 만들고, 결과물을 평가받고 싶어 합니다...'안정된 밥그릇'으로 성공을 평가하던 사람들이 어느새, 그 밥이 주인이 식은 던져줄 때만 기다리는 '개'의 밥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142,154쪽

문화를 알아야 한다는 것은...문화적 마인드를 가져야 한다는 것은 '이질적인 것''자신이 경험하거나 생각하지 못한 것'에 대해 포용력과 유연성을 가져야 한다는 뜻입니다...중요한 것은, 때로는 '백지'가 되어 다른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포용력입니다.-147쪽

새로운 패러다임에서 글을 안 쓰면 영원한 객체일 수 밖에 없습니다. 내 인생의 주체가 될 수 없습니다. 이제 글이 힘이고, 돈입니다. 카리스마고, 리더쉽입니다. 글쓰기가 생존력이 됐습니다. 아니, 글을 안쓰기에는 너무 아까운 시대입니다. 전국민에게 읽히는 나만의 매체를 누구나 공짜로 가지고 있습니다. 글을 안 쓰는 것은 당첨확률 높은 로또를 쥐고도 번호를 안 맞춰보는 것과 같습니다. 글쓰기만큼 남는 장사가 어디 있습니까?-168쪽

하버드는 익스포스의 목적을 설명하면서 "글쓰기와 사고력은 떼려야 뗄 수가 없다. 훌륭한 사고력은 훌륭한 글쓰기를 필요로 한다"고 말합니다.-179쪽

'완성이란 아무것도 덧붙일 것이 없을 때가 아니라, 아무것도 더 떼어낼 것이 없을 때 오는 것'-생텍쥐페리-202쪽

2008.08.3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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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도록 책만 읽는
이권우 지음 / 연암서가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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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는 자신만의 슬픔을 거름삼아 삶이라는 꽃을 피워내고 있는지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꽃에 맺혀있는 이슬은, 그 꽃이 밤새 게워놓은 눈물일지도 모른다. 그것을 깨닫게 해준 작가에게 우리 모두 경의를!-49쪽

만약 인간의 영혼을 투시하는 엑스레이가 있다면, 그래서 그 가상의 기계에 영혼을 얹혀놓고 찰깍, 찍으면 어떤 형상이 나타날까...인화지에는 날카로운 맹수의 발톱에라고 할퀸 듯한 생채기들만이 현상될 듯하다. 산다는 게 결국 상처를 주고받는 일인데, 정작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것은 상처받은 일 뿐이다.
...특히 어릴적 순정했던 영혼이 입은 상처는 제법 오래가고 도통 치유되지 않는다. 갓 구워낸 자기에 쨍, 하며 금이 간 채 세월의 더께가 켜켜이 얹혀진 꼴이다. 없는 듯 잊혀진 듯하지만 사실 한 꺼풀만 벗겨내도 골 깊은 상처가 드러나게 마련이다.-93쪽

국가 권력에 맞서는 시민운동은 늘 질 수밖에 없다...계속 지게 되어 있지만 "그러나 어느 날인가 이기지는 못하지만, 지고 있지도 않는, 그런 때가 올 것입니다"...-136쪽

나는 고전의 문을 여는 열쇠는 치열한 문제의식이라고 여겨왔다...막장을 뚫고나갈 지혜를 묻고, 그 답이 현재적 가치가 있는지 토론한다. 도전적인 토론은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이 과정에서 지은이의 사상이 안고 있는 한계가 드러나며, 이를 넘어서기 위한 대안을 찾게 된다. 이쯤 되면, 고전의 주위를 맴도는 지은이라는 '유령'이 가만히 당할 리 없다. 해석의 오류를 지적하거나 자신의 다른 책을 참조해야 한다고 복화술로 변호하기도 한다. 고전을 읽는 행위는, 그러므로 묵독일 수 없다. 제대로 읽으면 그것만큼 소란스러운 책읽기가 없다. 자신도 모르게 카니발적 책읽기에 몰두하게 된다.-205쪽

지은이가 보기에 '해리포터'의 성공은, 과대광고 덕이 아니라 대중들의 문화적 성감대를 정확하게 건드린 데 있다. 그것을..'역혁명'이라 칭한다...역혁명은 새로운 것이 오래된 것으로 포장된 것을 가리킬 때에 쓰이는 말이 되었다...
역혁명 현상은 신자유주의적 망령에 사로잡힌 세계가 권력과 부를 불평등하게 분배하는 현실과 관련을 맺고 있다. 자신의 힘을 박탈당한 자들이 세계를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을 영성의 형식에서 찾는다는 것이다. "현재를 견디기 위해 과거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324,326쪽

내 삶은, 이를테면 교양주의 정도에 불과할 성싶다. 앎에 대한 열정이 나 자신과 세계에 대한 변혁에 이르지 못한다. 정열은 "극도로 강렬한 차가운 지속성"이라는 말은 이즈음 내가 고민하는 것에 답을 던져주었다.-127쪽

<본드걸 미미양의 모험> <자본론 범죄> <주기율표> <미완의 시대> 네그리의 <귀환> <재일 강상중> <나의 삶은 서서히 진화해 왔다> <플라톤 향연> 래리 고닉의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세계사> <풀숲을 쳐 뱀을 놀라게 하다> <전쟁에 반대한다> <전쟁중독> <살아있는 것들의 아름다움> 고우영의 <삼국지> <채링크로스 84번지> <네 멋대로 써라>-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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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의 맛 - 시에 담긴 음식, 음식에 담긴 마음
소래섭 지음 / 프로네시스(웅진) / 2009년 12월
품절


'고운'이란 말, 참 절묘하다. 몰랐던 말이 아닌데도, 저 시를 읽고 나서야 '고운'이란 말이 얼마나 '고운'지 깨달았다. 예쁜 사람, 착한 사람, 바른 사람, 어떤 말로도 대신할 수 없을 만큼 '고운'이라는 말은 저 자리에 꼭 어울린다. 예쁘고 착하고 바른 것을 모두 합쳐도 '고운'이라는 말 하나를 당해내지 못할 듯싶다. 그 속에는 산뜻하고 맑고 부드러운, 다른 말로 대신할 수 없는 미묘한 느낌이 녹아있다. -19쪽

백석은 '흰 바람벽이 있어'라는 시에서 이렇게 적었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외롭고 높고 쓸쓸한 것', 더러운 세상을 버린 자들이 가질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다.-26쪽

백석 시에는 우리가 음식에 관해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 마치 그는 음식에 대한 문학적 탐구를 수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의 시에서 음식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 음식이 사소하다는 편견과 선입견을 깨뜨리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시 또한 사소하지 않다. 사소하게 보이는 것들이 실은 사소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시인의 역할 중 하나이고, 또 그러한 증명이 예술적 가치로 빛날 때 위대한 시인이 탄생한다. 세상을 외면했던 백석은, 세상이 외면했던 맛있는 것들에 집착함으로써 누구도 도달하지 못했던 문학적 경지를 일궈냈다. 그래서인지, 그의 시는 맛있다. 읽으면 읽을수록 침이 고인다.-34쪽

예술작품은 그것이 진품이나 원본일 때에만 아우라라는 독특하고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지니게 된다. 그런데 아우라는 예술 작품이 아닌 다른 사물에서도 나타난다...아우라의 특성을 종합해보면, 유일무이한 현존성, 가까이 있더라도 먼 것의 일회적인 현상, 일회성과 지속성의 모순 등을 든다. 그런데 이는 백석시에 나타난 음식의 성격에도 해당된다. 조리기간이 길든 짧든 음식이 식탁 위에 존재하는 것은 순간일 뿐이고, 음식은 그 짧은 순간에 특정한 장소에서만 유일무이하게 존재할 수 있다.-88쪽

벤야민에 따르면 아우라의 경험은 '상호 응시'라는 시선을 동반한다. '상호응시'란 인간과 자연, 자아와 세계가 서로를 응시하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상호응시'가 이루어질 떄 주체와 대상은 동일성이 아니라 유사성의 관계에 놓인다. 서로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고 해서, 주체와 대상이 완전히 하나가 되지는 않는다. 다만 점점 서로 비슷해지면서 완전히 같지도 않고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도 않은, 어정쩡하면서도 묘한 상태가 된다. 즉 아우라의 시각적 경험은 나와 타자, 즉 주체와 대상의 경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경계가 흐물흐물해지면서 주체와 대상이 각각 다른 모습으로 변형되는 상호 과정의 경험으로 이해해야 한다. 주체-객체의 동일시나 주체-객체의 분리, 양자 모두를 지양하는 독특한 지각양식으로만 아우라를 경험할 수 있다. -117쪽

인도 미학에서 예술의 영혼으로 간주되는 '라사(rasa)'는 여러 의미가 있다. 먼저 그것은 식물의 즙, 액체 등을 의미한다. 또 라사는 어떤 대상의 비물질적인 본질, 물질로부터 나오지만 말로는 설명하거나 이해하기 힘든 향기, 가장 훌륭하거나 최상인 부분 등을 의미하기도 한다. 감각과 관련해서는 미각, 맛 등의 의미도 있다. 이러한 의미들에서 미각적 경험과 관련된 의미가 파생되었다. 이때 라사는 고양된 기쁨, 오로지 영혼에 의해서만 경험할 수 있는 환희, 예술의 영혼 등을 의미한다. 라사를 포함하지 않은 작품은 예술로 분류되지 못했고, 라사없는 경험은 미적이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었다...서구의 개념과 달리 지성과 감성, 정신과 육체의 이분법을 넘어선 개념으로, 인간의 일과 신의 일을 하나로 연결시키는 신인합일의 경지를 지칭한다.-143쪽

당신은 어쩌다, 하필 외면할 것투성이인 봄에 왔을까...
몸에 한세상 떠넣어주는/먹는 일의 거룩함이여 - 황지우'거룩한 식사'중
우리는 조금 더 미칠 필요가 있다. <정본 백석 시집> <백석 전집> <원본 백석 시집>-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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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카페의 노래 열림원 이삭줍기 12
카슨 매컬러스 지음, 장영희 옮김 / 열림원 / 2005년 2월
구판절판


꼽추는 맨 아래 계단에 가방을 열어 놓은 채로 두고 서서 코를 훌쩍이며 입을 씰룩거렸다. 어쩌면 자신의 초라한 처지를 새삼 깨닫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쓰레기 같은 잡동사니만 가득 찬 가방 하나를 들고 아무 연고도 없는 마을에 나타나서 미스 아밀리아의 친척이라고 우기고 있는 자신이 얼마나 황당하고 비참한지를 말이다. 아무튼 그는 갑자기 계단에 주저않아 울기 시작했다.
난생처음 보는 꼽추가 한밤중에 가게를 찾아와서는 주저않아 울음을 터트리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아밀리아는 손으로 이마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고, 남자들은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꼽추의 울음소리 외에 주변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19쪽

미스 아밀리아의 술에는 무언가 아주 특별한 게 있었다. 혀 끝에서는 정갈하면서도 짜릿한 맛을 내고, 일단 뱃속으로 들어가면 화끈한 기운이 오랫동안 몸을 훈훈하게 녹이는 것이다. 그것뿐이 아니다. 백지 위에 레몬 즙으로 메시지를 쓰면 글씨가 보이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 종이를 잠시동안 불에 대고 있으면 글씨가 갈색으로 변해 그 내용을 분명히 알아볼 수가 있다. 위스키가 바로 그 불이고, 메시지는 한 인간의 영혼 속에 씌어진 글이라고 상상해보자. 그러면 아밀리아가 만든 술의 진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22쪽

그냥 무심히 흘려 버렸던 일들, 마음속 깊이 은밀한 구석에 숨겨져 있던 생각들이 불현듯 모습을 드러내고 마침내 이해가 되는 것이다. 직조기와 저녁 도시락, 잠자리, 그리고 다시 직조기, 이런 것들만 생각하던 방적공이 어느 일요일에 그 술을 조금 마시고는 늪에 핀 백합 한 송이를 우연히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손바닥에 그 꽃을 올려놓고 황금빛의 정교한 꽃받침을 살펴볼 때 갑자기 그의 마음속에 고통처럼 날카로운 향수가 일게 될지도 모른다. 처음으로 눈을 들어 1월 한밤중의 하늘에서 차갑고도 신비로운 광휘를 보고는 문득 자신의 왜소함에 대한 지독한 공포로 심장이 멈추어 버리는 듯한 느낌을 가지게 될지도 모른다. 미스 아밀리아의 술을 마시면 이런 일들을 경험하게 된다. 고통을 느낄 수도, 기쁨을 느낄 수도 있지만 결국 이 경험들이 보여주는 것은 진실이다. 그 술을 마시면 영혼이 따뜻해져서 그 안에 숨겨진 메시지를 보게 되는 것이다.-22쪽

그렇다면, 도대체 사랑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우선 사랑이란 두 사람의 공동 경험이다. 그러나 여기서 공동 경험이라 함은 두 사람이 같은 경험을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랑을 주는 사람과 사랑을 받는 사람이 있지만, 두 사람은 완전히 별개의 세계에 속한다. 사랑을 받는 사람은 사랑을 주는 사람의 마음속에 오랜 시간에 걸쳐 조용히 쌓여 온 사랑을 일깨우는 역할을 하는 것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사랑을 주는 사람들은 모두 본능적으로 이 사실을 알고 있다. 그는 자신의 사랑이 고독한 것임을 영혼 깊숙이 느낀다. 이 새롭고 이상한 외로움을 알게 된 그는 그래서 괴로워한다. 이런 이유로 사랑을 주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이 딱 한 가지가 있다. 그는 온 힘을 다해 사랑을 자기 내면에만 머무르게 해야한다. 자기 속에 완전히 새로운 세상, 강렬하면서 이상야릇하고, 그러면서도 완벽한 그런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49쪽

이제 사랑을 받는 사람에 대해서도 얘기해 보자. 아주 이상하고 기이한 사람도 누군가의 마음에 사랑을 불 지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증조할아버지가 되어서도 20년 전 어느 날 오후, 치허 거리에서 스쳤던 한 낯선 소녀를 가슴에 간직한 채 계속해서 그녀만을 사랑할 수도 있다. 목사가 타락한 여자를 사랑할 수도 있다. 사랑 받는 사람은 배신자일 수도 있고 머리에 기름이 잔뜩 끼거나 고약한 버릇을 갖고 있는 사람일 수도 있다. 사랑을 주는 사람도 분명히 이런 사실들을 알고 있지만, 이는 그의 사랑이 점점 커져 가는 데에 추호도 영향을 주지 못한다. 어디로 보나 보잘것없는 사람도 늪지에 핀 독백합처럼 격렬하고 무모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선한 사람이 폭력적이면서도 천한 사랑을 자극할 수도 있고, 의미 없는 말만 지껄이는 미치광이도 누군가의 영혼 속에 부드럽고 순수한 목가를 깨울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떤 사랑이든지 그 가치나 질은 오로지 사랑하는 사람 자신만이 결정할 수 있다. -50쪽

그래서 우리들은 대부분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기를 원한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사랑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 간단명료하게 말한다면, 사람들은 대부분 사랑 받는다는 사실을 마음속으로 힘들고 불편하게 느낀다. 사랑 받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두려워하고 증오하게 되는데, 충분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연인을 속속들이 파헤쳐 알려고 들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이는 아무리 고통을 수반할지라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가능한 한 모든 관계를 맺기를 갈망한다.-51쪽

성별을 알 수 없는 창백한 얼굴에 회색빛 사팔눈은 너무 심하게 가운데로 쏠려 있어서, 두 눈이 남몰래 간직한 슬픔을 나누며 서로 은밀히 마주보고 있는 듯하다.
회색 눈은 나날이 조금씩 더 심하게 가운데로 모여 마치 슬픔과 고독의 눈빛을 나누기 위해 서로를 찾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10, 1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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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란
윤대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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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찌감치 세상이나 자신에 관해 흥미를 잃고있는 자신을 발견했던 것이다. 나는 권태라는 것이 세포와 혈액속에 퍼져있는 일종의 병이라는 것을 알았다. 실제로 세포우울증이라는 병이 있듯이 말이다. ...
나는 인생이 그토록 파노라마적이라는 사실을 미처 몰랐기 때문에 지레 권태에 사로잡혀 있었는지도 모른다. 또 그때까지는 불행이나 실패를 경험해보지 못한 것도 그 원인 중 하나였다. 내겐 타인에 대한 어떤 감정도 존재하지 않는듯 했다. 일견 남들에게는 조숙한 허무주의자처럼 보였지만 실은 무기질처럼 변해가는 자신을 보며 진저리를 치곤 했다.-17쪽

어쨌거나 사람을 하나 얻었다. 세상의 풍경이 뒤바뀌는 일이다. 정말이지 그런 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녀와 헤어질 수 없다는 것을 여러번 절실히 깨달았다. 내가 굳이 요구하지 않아도 나를 잘 만들어갈 여자다. 나보다 사는 일에 능숙한 사람이다... 다짐했다. 비록 즐기지는 못하더라도 더이상 흔들리지 않겠다고, 가까운 타인으로서의 예의를 지키고 신의를 저버리지 않기로.-127쪽

사람이란 무릇 보살핌의 대상이다. 지극한 관심이 뒤따라야 하는 일이지. 그런데 그 처녀에게는 뭔가 중요한 것이 결핍돼있어. 상대를 이해하는 능력이랄까. 말하자면 따뜻함 말이다.-138쪽

일단의 현실감을 회복한 느낌이야. 마침내 술잔이 술잔으로 보이고 주전자가 명백히 주전자로 보여. 말하자면 그동안 나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서있었던 거야. 자의식의 단단한 껍질을 뒤집어쓴 채 어두운 터널의 한가운데서 에코처럼 울려오는 내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이고 있었던 거야. 그런데 어느날 오후 터널 밖으로 누군가가 사뿐사뿐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더군, 나로서는 최초로 감지한 타인의 생생한 움직임이었지. 그것은 완만한 리듬을 타고 반복되는 아주 부드럽고 탄력적인 소리였어. 그 소리에 혹해 나는 터널밖으로 나오게 된거야... 하지만 대신 염력을 잃었어. 박쥐처럼 캄캄한 자의식의 천장에 매달려있을때 작동하던 주파수가 햇빛속으로 나오자 기능을 상실한거지. -254쪽

사랑은 그런 의미에서 둘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가능성을 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함께 죽을 수 있는 가능성이라도 말이다.-294쪽

내게 주어진 삶은 그렇게 하루하루 변함없이 흘러갔다. 행복의 몇몇 객관적 조건과 얄팍한 기득권을 야릇하게 즐기며... 생일상을 받을 때마나 의식적으로 한번씩 진저리를 쳐가며 서툴게 나이를 먹어갔다.
속내야 어떻든 눈앞에 보이는 것들과 은밀하고 끈끈한 타협의 관계를 유지하지 않는 한 삶은 결고 호락호락 허락되지 않았다. 또 누구나 감시자들이어서 한때의 열정적인 꿈이나 그로인한 모반은 영화나 소설이 아니면 구경할 수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또 옆사람과 닮지 않은 자는 그 옆사람이 대신 나서서 이색분자로 지명해주는 것이었다.-320쪽

2005.11.2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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