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사실은, 천성이 그(니퍼즈)에게 술을 대어주는 격이었으니, 그는 태어날 때부터 성마르고 브랜디 같은 체질로 꽉 차 있어서 차후의 음주가 조금도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56)
나의 첫번째 감정은 순수한 우울과 진지하기 그지없는 연민의 감정이었다. 그러나 내 상상 속에서 바틀비의 절망적인 고독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에 비례하여 바로 그 우울감이 공포로, 연민이 반발로 바뀌었다. 비참한 모습을 생각하거나 보면 어느 정도까지는 최상의 애정이 우러나오지만, 특별한 경우 그 정도를 넘어서면 그렇게 않다는 것이 과연 사실이며, 너무 섬뜩한 사실이기도 하다. 이런 일이란 어김없이 인간 마음의 타고난 이기심에서 기인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잘못된 것이다. 이는 차라리 과도한 기질적 질환은 치유할 수 없다는 절망감에서 나오는 것이다. 감수성이 예민한 존재에게 연민은 고통이 아닌 경우가 드물다. 그런데 그런 연민으로는 효과적인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지각이 마침내 생기면 상식에 따라 영혼은 연민을 버릴 수밖에 없다. 그날 아침 목격한 것으로 말미암아 나는 그 필경사가 선천적인 불치병의 희생자라는 것을 납득하게 되었다. 내가 그의 육신에 자선을 베풀 수는 있다. 그러나 그를 아프게 하는 것은 그의 육신이 아니다. 아픔을 겪는 것은 그의 영혼인데, 그 영혼에는 내 손이 미치지 않았다. (74)
그 소문은 이렇다. 즉 바틀비가 워싱턴의 배달 불능 우편물 취급소(Dead Letter Office)의 말단 직원이었는데, 행정부의 물갈이로 갑자기 그 자리에서 쫓겨났다는 것이다.…배달 불능 편지라니! 죽은 사람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가? 천성적으로 혹은 불운에 의해 창백한 절망에 빠지기 쉬운 사람을 생각해보라. 그런 사람이 계속해서 이 배달 불능 편지를 다루면서 그것들을 분류해서 태우는 것보다 그 창백한 절망을 깊게 하는 데 더 안성맞춤인 일이 있을까? 그 편지들은 매년 대량으로 소각되었다. 때때로 창백한 직원은 접힌 편지지 속에서 반지를 꺼내는데, 반지의 임자가 되어야 했을 그 손가락은 어쩌면 무덤 속에서 썩고 있을 것이다. 또한 자선헌금으로 최대한 신속하게 보낸 지폐 한장을 꺼내지만 그 돈이 구제할 사람은 이제 먹을 수도 배고픔을 느낄 수도 없다. 그리고 뒤늦게 용서를 꺼내지만 그것을 받을 사람은 절망하면서 죽었고, 희망을 꺼내지만 그것을 받을 사람은 희망을 품지 못하고 죽었으며, 희소식을 꺼내지만 그것을 받을 사람은 구제되지 못한 재난에 질식당해 죽어버린 것이다. 삶의 심부름에 나선 이 편지들이 죽음으로 질주한 것이다. (100-1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