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 괴물이 된 이십대의 자화상 지금+여기 3
오찬호 지음 / 개마고원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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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캠퍼스에는 자신을 기업에 잘 팔리는 상품으로 ‘제조’하는 데 일말의 거부감도 없는 학생들이 가득하다…그리고 이 과정에 대한 불만은 ‘자기개발’이란 포장지로 덮어진다. 자기 착취? 뼈빠지는 고생은 그 결과에 상관없이 미래를 위한 투자일 뿐인데 웬 불평불만? 자기 삶은 곧 기업 활동이고 자신은 이를 이끄는 CEO란 말이다. ‘나는 스스로를 경영할 줄 안다!’는 기업가적 자아는 그렇게 탄생한다. 이것이 바로 지금의 대학이 집중적으로 육성하고 있는 ‘바람직한 이십대’의 표본이다. 기업가적 자아를 지닌, 즉 인생을 ‘효율성의 개념’으로 재단하는 데 익숙하고 능숙한 이십대들은 앞으로도 더 많아질 것이다. (179)

가난은 단순히 물질적 결핍의 상태가 아니다… 바우만은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정상의 삶’이라고 인정되는 모든 것에서 배제되었음을 뜻한다. 그것은 ‘기준에 미치지 못함’을 의미한다. 그 결과 자존감이 낮아지고 수치스러움이나 죄의식을 느끼게 된다. 가난은 또한 그 사회에서 ‘행복한 삶’이라고 여겨지는 기회들과 단절되고 ‘삶이 제공해야 하는 것’을 받지 못함을 의미한다." (197)

그저 사람답게 살기 위해 ‘초인’이 되어야 하는 사회는 무능하기 짝이 없는 사회다. 그런데도 초인적 노력으로 사회구조의 장벽을 뚫은 그 미세한 확률에다 사람을 몰아넣는 자기계발의 이야기들이 판치고 있는 세상이다. ‘자기개발서’라는 렌즈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 이십대들은 자기통제의 고통을 참아내고자 스스로에게 방어막을 친다. 자신이 경험하는 차별이 부당하다고 말하는 순간 ‘자기계발의 패배자’로 낙인찍히는 사회를 살아야 하는 이십대들은, ‘사회적 차별’을 수긍할 수밖에 없다. 그 차별에 자신이 당하는 것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남을 차별하는 것 역시 정당화한다. 그렇게 위계화된 학교서열에 대한 집착은 이십대에게 가장 통속적인 자기 방어기제가 되었다. (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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