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캠퍼스에는 자신을 기업에 잘 팔리는 상품으로 ‘제조’하는 데 일말의 거부감도 없는 학생들이 가득하다…그리고 이 과정에 대한 불만은 ‘자기개발’이란 포장지로 덮어진다. 자기 착취? 뼈빠지는 고생은 그 결과에 상관없이 미래를 위한 투자일 뿐인데 웬 불평불만? 자기 삶은 곧 기업 활동이고 자신은 이를 이끄는 CEO란 말이다. ‘나는 스스로를 경영할 줄 안다!’는 기업가적 자아는 그렇게 탄생한다. 이것이 바로 지금의 대학이 집중적으로 육성하고 있는 ‘바람직한 이십대’의 표본이다. 기업가적 자아를 지닌, 즉 인생을 ‘효율성의 개념’으로 재단하는 데 익숙하고 능숙한 이십대들은 앞으로도 더 많아질 것이다. (179)
그저 사람답게 살기 위해 ‘초인’이 되어야 하는 사회는 무능하기 짝이 없는 사회다. 그런데도 초인적 노력으로 사회구조의 장벽을 뚫은 그 미세한 확률에다 사람을 몰아넣는 자기계발의 이야기들이 판치고 있는 세상이다. ‘자기개발서’라는 렌즈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 이십대들은 자기통제의 고통을 참아내고자 스스로에게 방어막을 친다. 자신이 경험하는 차별이 부당하다고 말하는 순간 ‘자기계발의 패배자’로 낙인찍히는 사회를 살아야 하는 이십대들은, ‘사회적 차별’을 수긍할 수밖에 없다. 그 차별에 자신이 당하는 것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남을 차별하는 것 역시 정당화한다. 그렇게 위계화된 학교서열에 대한 집착은 이십대에게 가장 통속적인 자기 방어기제가 되었다. (2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