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와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은 억지로 강요당한 ‘가짜 나’로 산다는 의미가 아니다…모든 오해의 근원은 유일무이한 ‘진정한 나’라는 신화에 있다…단 하나뿐인 ‘진정한 나’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반대로 말하면, 대인 관계마다 드러나는 여러 얼굴이 모두 ‘진정한 나’다. (13~14)
분인은 상대와의 반복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통해서 자기의 내부에 형성되어가는 패턴으로서의 인격이다….한 명의 인간은 여러 분인의 네트워크이며, 거기에 ‘진정한 나’라는 중심 같은 것은 없다. 개인을 정수 ‘1’이라고 한다면, 분인은 일단 분수라고 떠올려주기 바란다. 나라는 인간은 대인 관계에 따라 몇 가지 분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그 사람의 됨됨이(개성)는 여러 분인의 구성 비율에 따라 결정된다. 분인의 구성 비율이 바뀌면, 당연히 개성도 바뀐다. 개성이란 절대 유일 불변한 개념이 아니다. 또한 타자의 존재 없이는 결코 생겨나지 않는다. (14~15)
커뮤니케이션은 타자와의 공동 작업이다. 대화 내용이나 말투, 기분 등등 모든 것이 상호작용 속에서 결정된다. 이유가 뭘까? 커뮤니케이션의 성공은 그것 자체로 기쁘기 때문이다. (46)
인간은 복숭아가 아니라 양파이다. 복숭아는 한가운데 씨가 들어있다. 사람에게도 그렇게 확고한 자아(=’진정한 나’)가 있고, 주체가 있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실은 양파 껍질처럼 우연적인 사회적 관계나 속성을 한 꺼풀씩 벗겨내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즉 ‘진정한 나’ 같은 건 없다는 말이다. (61)
만약 좋아하는 분인이 하나든 둘이든 있다면, 그것을 발판으로 삼아 살아가면 된다…좋아하는 분인이 하나씩 늘어간다면, 우리는 그만큼 스스로에게 긍정적으로 바뀔 수 있다. (156, 157)
사랑이란 상대의 존재가 당신 자신을 사랑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당신의 존재로 말미암아 상대가 자기 자신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그 사람과 같이 있을 때의 분인이 좋아서 그 분인으로 좀 더 살고 싶어진다...지금 사귀는 상대가 정말로 좋은지 어떤지 혼란스러울 때는 반대로 이렇게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그 사람과 함께 있을 때의 내가 좋은가 아닌가? 그러면 대답은 저절로 나온다. (173, 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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