툭하고 공기가 끊어졌다는 표현이라도 써야 할까, 순간 주위에 그런 묘한 공백이 생겼다. 곧이어 누군가가 ‘풋’하고 웃음을 터뜨리는 소리가 들렸다. -125쪽
그러나 경찰들에게 난폭하게 저지당하면서도 무네히사는 왠지 모를 안도감을 느꼈다. 자기가 겨우 남자로 인정받은 것 같아서 좀 더 말려주기를 바라며 있는 힘껏 거칠게 날뛰었다. 난폭하게 입이 틀어막히고 등을 무릎으로 찍히고 두 손 두 발을 꺾이면서도 엉덩이를 주물렸을 때보다 머릿속이 맑았다. 적어도 지금 자신이 자기가 아는 세계에 있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127쪽
보람 있는 일을 하며 인정받고, 사랑하는 사람과 삶을 함께 한다. 예전에 어렴풋하게 떠올린 그 이상이 요즘 들어 조금씩 변해가는 느낌이다. 그렇게 되면, 좋겠다고 바라던 이상에서 나 자신도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 하나씩 하나씩 무언가를 지워왔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흔적조차 사라진 그 이상에서, 맨 처음에 무엇을 지웠는지 읽어낼 길이 없다.-16쪽
소설에 쓴 내용은 모두 사실이다. 다만 이 소설에는 쓰지 않은 일이 더 많다. 포도 따기라도 하듯 나는 지금껏 흠집 없이 잘 익은 송이만 따왔다. 그렇다면 쓰인 내용이 모두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완전하지 않다. 모든 순간을 빠짐없이 쓰지 않으면 그것은 결국 거짓인 셈이다. 내가 하는 일은 완전한 현실에서 몇 송이만을 따내어 거짓으로 내일에 남기는 작업일지도 모른다.-2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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