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작가는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이라기보다 글을 써야 한다고 믿는(혹은 그렇게 믿어지는)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써야 하는데, 써야 하는데,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즉 작가는 글을 쓴다는 행위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의무를 짊어진 존재를 일컫는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 작가는 하나의 직업이기 이전에 일종의 신분이며, 스스로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 한, 이 신분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104쪽
"…현대는 기술의 파시즘입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그게 파시즘인 줄도 모른다는 거예요. 어쨌든 소설을 쓴다는 것은 그것과 전혀 다른 종류의 일입니다. 소설은 무에서 시작해 스스로에게 선택을 부과합니다. 수백 갈래의 선택들을 거친 후에 그 선택의 흔적들을 삭제해나가는 것입니다. 그게 소설 쓰기입니다. 선택을 해나가는 것은 맞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그것들을 스스로 만들어간다는 점에서 다릅니다. 그래서 소설을 쓰는 사람의 뇌에서는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집니다. 아주 신비로운 것입니다. 나는 그것에서 벗어날 수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이미 나의 정신이 그렇게 조직되어 있단 말입니다. 남이 선택하라고 정해놓은 아이콘만 손가락으로 누르면서 살 수가 없어요."-118쪽
"유년이 그렇게 텅 비어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기묘한 기분에 빠져들게 됩니다. 돌아가야 할 곳이 없다는 기분. 닻이 없는 상태로 끝없이 항해 중이라는 기분. 영원히 안정감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모성에 대한 원초적 기억도 없고 고향이나 가족에 대한 회귀의 충동도 없습니다. 영혼 어딘가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다는 느낌입니다. 소설은 그 깊고 어두운 구멍에 뭔가를 던져넣는 행위입니다. 아무리 기억이 없다 해도 내 삶이 양평의 고압 산소통 속에서 시작됐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뭔가가 있겠죠. 글을 쓰고 이야기를 만들어냄으로써 실은 제 과거를 창작하고 있는 겁니다. 그 구멍을 메우고 있는 거라고요."-12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