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아버지는 미완의 시다. ‘아버지’하고 부른 후에 어떤 말도 쓸 수가 없다.-40쪽
- "말이 잘 통한다는 건 어떤 거죠?" "…그 사람을 기다려줄 수 있다는 뜻이죠. 얘기하고 싶고 같이 있고 싶으니까. 우린 서로를 기다릴 자신이 있어요…." 사랑인가요? 묻지는 않았다. 왠지 그것은 내가 한번도 가본 적 없는 외딴 산골의 살얼음이 얼린 저수지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이따금씩 강태공들이 몰래 숨어 들어와 월척을 낚는 곳의 신비함, 모두에게 알려 주었지만 정작 가는 사람은 극히 드문 그곳의 여운이 아른거렸다.-45쪽
"오해하는 남자는 이해시키면 되고 이해 못하는 남자는 기다려주면 되죠." -88쪽
왜 항상 우리는 상대보다 더 많은 걸 주고 더 많은 걸 실망하게 되는 것일까. 나의 오랜 친구는 내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너이기 때문에 네가 실망스러운 거라고. -200쪽
- "세상에 어떤 사람들은 술로 밥을 벌기도 하지요. 그러니 흐트러져서야 되겠습니까. 우리 사회에서 술은 막강한 생산력을 갖고 있고 저와 팀원들에게는 지금 이 시간이 업무 시간인데 술을 즐기지 않을 수 없지요. 세상에 없는 다이아몬드를 가져다 주겠다고 집사람에게 능청을 떤 적이 있어요. 술을 마시지 않았다면 그런 말도 못했을 테고, 결혼도 못했을 겁니다. 어떤 사람은 비웃겠지요. 그렇게 나약하고 낭만만 있어서 세상 어떻게 살겠냐. 그런데 말입니다. 나약한데도 나를 고치지 못하고 살아가는 비애에 대해서는 아무도 위로 아니, 말하지 않더란 말입니다…." -209쪽
"…사랑보다 더 강렬한 건 나의 이력서라고요, 그죠?" -221쪽
"…승원과 연애를 시작했을 무렵, 그는 카페에서 어떤 이야기들을 열심히 들려주었다. 통과의례 같은 서로의 사용설명서들, 부풀려진 추억들이었다…" -231쪽
...아무도 아버지 웃음을, 목소리를 기억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언제부터 사라지게 된 것일까. 아버지에게는 아버지만의 언어가 있다. 나는 간신히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지만, 언니나 엄마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 아버지가 애써 ‘지우개’라고 말하지만 아무도 지우개를 듣지 못한다. 아버지가 ‘낙엽’이라고 말하지만 아무도 낙엽이라고 듣지 못한다. 깡통, 고양이라고 잘못 듣고 엄마와 언니는 아버지를 곁눈질하거나 뜬금없다며 툴툴거린다... -251쪽
‘연극을 보러가자’가 아니라 ‘연극이나 볼까’라는 말을 들을 때도 연인에게 치명적 상처를 입은 것처럼 마음이 아팠다. 하나의 문장에서 온전한 목적어로서 기능하지 못한다는 건 슬픈 일이었다. 모든 것의 주어가 되었을 때 기쁘지만은 않은 것처럼. -276쪽
기어코 글이 나를 세상에 떨어뜨렸다. 글을 놓지 않는 한, 글이 나를 끄집어낼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한없이 가볍고 어렸다. 세상이 나를 쓰는 사람으로만 봐주기를 바랐다. 고백하건대 어중간한 자리를 들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작가는 스스로를 유폐시켜야 한다… (작가의 말 중에서)-3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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