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가스 요사는 이렇게 지적한다. "단지 성만을 다루는 작품은 그다지 매력이 없다. 그런 작품은 활력이 없기 때문이다. 인생은 단지 성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인생을 오로지 성으로만 다루는 작품은 너무 인위적이다." 바르가스 요사는 그런 작품은 너무 단조롭고 예측 가능한 틀 속에서 전개되는 한계를 지니고 있음을 간파하면서, 최고의 에로티시즘은 성이 다양하고 복잡한 세계 속의 원료가 되는 작품 속에서 구현된다고 밝힌다. 다시 말해 에로티시즘은 쾌락이나 섹스를 숨기지 않은 채 성행위를 장식하여 예술적 차원을 덧붙이는 작업과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238쪽
바르가스 요사의 이런 생각은 에로티시즘의 발전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18세기에는 쾌락의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 보다 낫고 보다 진정하며 보다 자유로운 세상을 얻게 만드는 도구였고, 교회나 인습에서 개인을 해방시키는 방편이었다. 19세기에 이르러 에로티시즘은 아주 세련된 유희로 변했지만, 20세기에는 식상하고 피상적인 것으로 변질되었으며, 상업화되고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구성을 따르게 되었다. 에로티시즘은 더이상 형식적 실험을 하지 않았고 사회 비판이나 기존 도덕에 대한 도전적 어조도 잃어버렸다. 그렇다면 과연 현대의 작가는 어떤 에로티시즘 작품을 써야 예술적 차원을 획득할 수 있을까?-238쪽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책은 문학적 의미를 획득한다. 일반적인 에로티시즘 문학이 음침하고 잔인하며 폭력적인 분위기를 띄는 것과 달리, 이 작품은 밝고 우아하며 심지어 아름답게 느껴진다. 또한 문자예술과 시각예술의 경계를 파괴하면서, 성은 예술적 차원을 획득한다. 바르가스 요사는 이 작품에 관해 이렇게 평한다. "<새엄마 찬양>은 그림에서 느껴지는 에로틱한 이미지를 언급하는 유희적 글쓰기이다. 나는 이 소설을 쓰면서 아주 흥미로운 경험을 했다. 기존 작품에서는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그대로 드러내는 기능적 역할을 위한 언어를 사용했지만, 이 작품에서는 아주 풍요롭고 암시적이며, 이전 작품에서 결코 사용하지 않았던 언어를 사용할 수 있었다."-239쪽
...성에 대한 집착과 육체적인 것의 거부라는 상반된 개념은 대립되고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요인이라는 것을 보여주면서 경계를 무너뜨린다. 육체성과 영혼성의 경계 파괴는 천사와 같은 순진한 모습의 알폰소에게서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후에는 리고베르토씨가 근친상관을 알고 독실한 신자처럼 엄격한 삶을 사는 것에서 나타난다. 이러한 암시는 대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수태고지를 하는 장면에서 절정에 이른다. 이 이야기는 '원죄 없는 잉태'라는 기독교의 영혼성과 나머지 텍스트를 관통하는 성적 매혹에 대한 요소를 결합시킨다. 이것은 섹스는 포르노든 고상한 문화든, 심지어 종교든 세상의 모든 인간적 삶에서 중심 요소를 차지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바르가스 요사의 생각이 작품 속에 투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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